20세기의 최고의 지성인 샤르트르, 그의 삶의 궤적과 사상을 훑어본다!
사르트르는 평생반려자 보부아르 외에 임신한 젊은 비앙카, 여가수 그레코를 위해 샹송가사를 쓰기도하고 자신의 여자 친구를 위해 극작품을 쓰기도 했다. 평생반려자 보부아르와의 관계를 보면, 그들 둘의 관계는 사랑과 자유이다. 순수함의 의지가 결여된 투명함이다. 각자 자신을 위해 꿈꾸고, 타인을 위해 글 쓴다. 각자 자신의 욕망을 양보하지 않고, 사랑받는 자의 욕망에도 양보하지 않는다. 따라서 절대적인 공모이다. 극단적인 은밀함이기는 하다. 하지만 이들은 아주 판이하다. 게다가 사르트르는 보부아르에게 말을 놓지 않았다. 거리감의 표시일까? 경계심의 표시일까? 아니면 반대로 선택의 표시일까? 물론 선택의 표시이다. 항성(恒星)이라는 표시 말이다.
사르트르가 다음과 같이 말할 때, 그 말은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보자. “내 생애에 무슨 일인가 발생한 것 같소. 내가 정념이나 기적 없이 속내로부터 있는 힘껏 한 사람을 사랑하는 말이요” 그리고 “그 한 사람은 당신이어야 하오. 내 사랑, 나와 긴밀하게 섞인 나머지 사람들이 구별할 수 없는 그런 누군가는 의당 당신이어야 하오. 나는 당신을 사랑하오”
이 말은 다음과 같은 모든 사실을 의미 할 것이다. 즉 “내 사랑, 당신은 내 존재의 존재 그 자체요”. “당신은 내 심장의 심장이오”. “당신은 바로 당신을 통해 우리들 각자에게서와 마찬가지로 나의 실존을 대신하는 이 우연성의 보따리, 오해와 우연이 섞인 이 보따리가 필연성을 찾게 되는 그런 존재라오”.
사르트르는 언어로 대리만족을 했던 것이 아니라, 언어의 매개를 통해 쾌락을 즐겼던 것이다. “면도를 잘못한 남자의 턱수염처럼 콕콕 찌르는 (소녀들의)다리”,“물방울처럼 동그랗고, 단단하지만 묵직하고, 위아래로 펑퍼짐한 엉덩이” 같은 표현들이 그러하다.
<구토>에서 자유로운 인간으로 구현된 그와 스타린과의 동반자로서의 그의 공통점은 무엇이며, 냉전시대의 투사였던 그였으며 전체주의에 반대하는 백신을 개발한 그가 훗날 자신에게 백신주입을 직접 주사하는 일을 소홀히 하여 사람들의 뇌리에 덜 기억되는 대사상가인 그가 궁금하다.
스피노자와 스탕달이 동시에 되고자 했던 그가 베르그송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이데거를, 지드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헤밍웨이,포크너, 도스패소스 등을 전략적으로 왜 원용한 걸까?
레버는 두 명의 사르트르가 존재한다고 하였다가 한명의 사르트르만 존재하였다고 했다.
두 명의 사르트르라는 의미는 한명의 사르트르는 선이고, 다른 한명은 악이라는 이분법적인 이해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두 명의 사르트르에서 공통점은 네 가지 요소 즉 반휴머니즘, 반자연주의, 반역사주의,역사적 비관주의가 그것이라고 했다. 사르트르의 반휴머니즘은 인간 또는 인간 주체에 대한 선험적 정의가 존재한다는 견해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설명된다.
그가 보들레르와 마찬가지로 자연을 싫어했다. 인류에 의해 형성된 역사의 총체성을 포착할수 있다는 헤겔의 주장을 수용하는 한편, 그 총체성의 담지자로서의 개인의 내면성을 중시하는 키르케고르의 주장을 수용하기도 한다.~
인간은 어떤 큰 사건이 충격을 계기로 자기의 성격과 사상이 바뀌는 것 같다. 사르트르 역시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포로수용소에서 공동체를 직접 체험하며 자신의 삶과 사상이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완전히 다른 두 부분으로 나뉘었다는 사실을 밝힌바 있다.
그는 대위계급장을 달고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으며 젊은이들의 왕자였고, 모든 대규모 전쟁에 참전한 상징적인 남자였다. 하지만 드골주의자가 되어 옛 동료들로부터 욕을 먹었다.
노동자계급의 배반자, 민족주의자, 변절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승리했다. 그는 인정을 받았으며 여러 잡지들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도하고 그가 중심이 된 잡지를 창간하기도 하였다. ~
1949념 혁명토론회에 초대된 그는 프랑스정부의 공식 대표처럼 대했다. 말하자면 그는 그저 국가원수처럼 환영받고 신망을 받은 것이 아니라 원수처럼 대접 받았고, 그의 말은 국가원수의 그것처럼 경청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는 일종의 이동하는 국가처럼 살았다. 그는 자유와 진리의 화신이었다. 그는 전 지구적 차원의 도덕적 권위를 가진 자였으며, 사람들은 그의 면죄부를 획득하고자 서로 다투었다.~
우리는 정치권력과 상징권력의 제로섬게임에 근거한 권위와 명예에 대한 새로운 “마리오트(Miriotte,압력과 부피는 반비례한다는 법칙)의 법칙”을 세울수 있다. 즉 국가가 가장 강력할 때 지식인들이 가장 허약하다는 법칙 말이다. 자코뱅파들의 치하, 나폴레옹 치하, 러시아의 볼세비키들이나 나치들의 치하에서 지식인들의 권력은 정치와 합해지니도 했고, 정치에 수렴되어 복종하기도 했고, 공포 속에서, 그렇기 때문에 은밀함 속에서 쥐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기도 했다. 또는 반대로 정치권력이 쇠퇴해 있을 때 지식인들은 머리를 쳐들었고, 계속해서 그런 현상이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사르트르의 경우만큼은 아주 분명했다. 그는 절대적 지식인이었다. 사람들은 과거에 다른 사람에게서 결코 기대할 수 없었던 것을 그에게서 기대했고, 또한 결코 다른 사람에게 기대할 수 없는 것을 그에게 기대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그에게서 무언가를 기대했다. 그는 신뢰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대중의 열정과 조급함의 대상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에 시몬 졸리베에게 보낸 한통의 편지에서 사르트르가 자신의 미래 삶을 묘사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나에게 경의를 표하며 잔을 높이 드는 정장 차림의 신사들과 야회복 차림의 부인들로 가득한 댄스홀, 이것은 완전히 에피날의 판화를 상기시키는 이미지지만, 나는 어릴 때부터 이런 장면을 상상하곤 했소” 그는 수첩메모에서 “스물여덟 살이 될 때까지 유명해지지 않은 사람은 영원히 영광을 포기해야만 한다”는 기록을 남겨, 자신의 꿈이 이루어지기까지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았다는 것을 모른 채 조급해하던 그의 모습이 담겨 있다. 이와 같은 강박관념은 <대역>이라는 작품의 실패와 함께 사라진다.
훗날 그의 친구인 슈크리는 눈살을 찌푸리며 이렇게 말했다. “쉰 살이 되어 유명해지다니,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속담에서도 일컫듯, 씹을 수 있는 이빨이 다 없어지고 나서야 빵을 얻는 것과 같으니 말이다”
“영광은 좋은 것이다. 40세나 50세가 되었을 때에도 여전히 그러하다. 영광은 탐낼만 것이다. 이처럼 찬란한 조명을 잗는 것은 행복하고도 즐거운 일일 수밖에 없다.”
<모험가의 초상>에서 그는 영광에 대한 관심을 정당화한 작가도 아마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 자신에게서 아무것도 떼어내지 않은 채 모두를 위해 존재한다.” 비록 그것이 삶의 후반부에서 전개될 “투쟁적 동지애”라는 이상이 도출해내는 것과 반대된다 할지라도 말이다. 그는 “황홀함”이라는 표현을 종종 사용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물론 이와 반대되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사람들은 그런 영광과 찬란함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사람들은 바타유를 더 좋아할 수도 있다. 가명 뒤에 숨어서<하늘의 푸르름>을 출판한 뒤 20년을 더 기다리면서, 그리고 세상을 떠나면서 출간되지 않은 자신의 작품 일부를 남겨준 바타유를 말이다. 눈에 띄 말 것. 유명해지지 말 것, 원칙적으로 너무 격렬한 폭발과 너무 강한 태양을 피할 것. “나는 나의 이름을 지우기 위해 글을 쓴다.” 사람들은 데이비드 샐린저를 더 좋아할 수 있다. 현대문학에서 남의 눈에 띄지 않은 인물이자, 마지막까지 비가시성의 원칙에 충실했던 작가인 샐린저 말이다.“나는 의심 받을 만한 위험이 있는 의견을 표명하게 될 것이다. 또는 달리 말하면 익명성의 무명은 한 명의 작가에게서 작품을 생산해 내는 동안 자기 자신의 보초에게 맡겨놓은 가장 중요한 위탁물 가운데 하나이다.”
이와 같은 부류에 있는 스피노자를 생각해보자. 자신의 이름으로 단 한권의 저서를 출간한 스피노자! 모든 저서를 가운데 가장 덜 “스피노자 다운” <데카르트의 원칙>이 그것이다. 나머지 저서<신, 인간과 인간 행복에 대한 소론 등>에는 그의 이름이 없다.
사람들은 또 한명의 “범신론자” 헤겔을 생각한다. “국가”의 항구성을 반대하고 “세계주의”를 옹호한 그는 가장 공격적인 그의 젊은 시절의 일부 저서들은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출간하지 않았다. 엄격하고 자로 잰 듯하고 총애를 받던 베를린 대학의 교수가 감옥에 가둘수도 있을 “예수의 생애”의 저자라고 되리라고 생각할수 있겠는가?
사르트르는 무신론자다. 진짜 무신론자다. 분명 그가 경건했던 적이 있었다. 그는 글을 쓰는 작업에서 교회를 떠올리게 하는 모든 요소로부터 떨어져 있다.
<사물의 힘>에서 보부아르 그녀의 지적에 따르면, 사르트르 자신의 일부가 해방이후 그에게 떨어진 영광을 “완전한 파국”으로, “신의 죽음”과 동일한 것으로 체험했다. 메를로 퐁티와의 우정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그보다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리고 허세를 부리고 싶지 않다. 그때는 지하실의 생쥐들의 시대였으며, 실존주의적인 자살행위에 적합한 시대였다. 악질적인 신문들이 내게 오물을 쏟아부었고, 또한 그만큼 온갖 나쁜 것들을 뒤집어씌웠다. 오해에 의한 명성이었다.”
우리는 친구와 한 시간 동안 잡담을 하기 위해서는 한 시간의 노동을 포기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을 위해서 하나의 현실을” 희생시키려 들수도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단지 “자신을 기다리는 거대한 임무를 거부하도록”할 뿐인 예술가의 이미지를 거부 할 수도 있다. 즉 우리는 프루스트에 반하여 자아들의 최종적인 통일성에 내기를 걸면서만 그 이미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이 자아들은 분명 복수적이다. 그것들은 서로 전투중에 잇다. 자아를 둘러싸고, 자아를 담고 있는 여러 목소리를 통해 이 자아의 “착취행위”를 사르트르보다 더 뛰어나게 연출한 작가는 별로 없다.
잘 웃고, 때로는 경박해 보이는 위대한 철학자, 항상 환희와 소동, 가벼운 희극, 기이하거나 노골적인 이야기, 익살, 패러디, 사변적이면서도 짓궂은 장난을 보여주는 이 위대한 철학자의 이미지를 나는 좋아한다.
모든 작가들은 그들 나름의 적을 가지고 있는 법이다. 그 가운데 어떤 작가들은 아주 심한, 때로는 견딜수 없을 정도의 적대감의 표적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적어도 라 브뤼예르(1645-1696, 프랑스 도덕주의 경향의 작가) 이후 ‘모든 사람들은 유명해진 한 사람에 맞서 궐기한다“는 법칙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역정, 이와 같은 가차없는 혐오, 무덤 저 너머까지 쫓아가고, 지드에게서 일어난 사건을 넘어서는 끝없는 괴롭힘, 이와 같은 모든 행위의 표적이 되는 것은 극히 적은 사람들의 특권이다. 스피노자와 볼테르에 대해서사람들은 결코 그처럼 치욕적인 말들을 쓰지는 않았다. 스피노자와 볼테르에 대해서는 그들의 사후에 파리 한복판에서 동상을 끌어내리는 등과 같은 공격을 행하지는 않았다. 스피노자-볼테르-사르트르로 이어지는 축. 진실을 말하는 이 위대한 자들, 인류의 혐오자들, 결코 우리를 감언이설로 꾀려 하지 않았으며,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른 자들.
소설가는 “결코 신이 아니다”. 소설가는 “자신의 절대적 판단을 가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그가 창조한 인물들을 허수아비로 만들 권리도 역시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그들의 이성, 정신착란, 전지전능한 화자의 속마음의 하얀색 실로 직조된 그들의 가련한 모순들 속으로 들어갈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1941년에 그라스에 있는 카페에서 선배작가인 지드가 항복을 하고, 후배작가인 샤르트르가 승리하는 그런 모습이 있었다.
나는 한 명의 늙은 작가가 “나는 마지막 작가이다”. “철학은 끝났다”고 말하는 대신 후계자를 물색하려고 하고, 횃불과 바통을 물려주려는 것처럼 보이는 이 감동어린 순간을 좋아했다. 이와 같은 행동은 종종 후계자를 통해 그 자신이 연원히 존재하기 위한 생각, 즉 일종의 임기연장이나 집행유예를 얻고자 하는 생각을 동반하는 것으로 보인다.
1947년부터 사르트르는 이렇게 주장했다. “라디오, 영화, 사설, 기사와 관련된 문학적 기법이 있다. 이미지로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책에 담긴 사상을 새로운 언어로 표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미 르 아브르에서 상장 수여식에서 학부형들 앞에서 “여러분이 살고 있는 세상의 아름다움, 속도와 기계들의 시학, 비인간적이면서 찬란한 산업의 숙명을 가르쳐 줄” 영화 만세 “나는 여러분에게 종종 극장에 출입할 것을 권유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늘 정치에 참여했으며(1930년대에는 극우주의에 참여했다), 사르트르, 그의 세대 가운데 모든 장르에 한꺼번에 정열을 쏟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하나의 사물에서 다른 사물로 넘어가면서 그렇게 많은 언어로 기술할 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사르트르가 가진 강점과 약점에 대한 고백도 있을 수 있다. 아마도 콕토에 대해 자주 말하는 것처럼 사르트르에 대해 말하는 것이 적합할지도 모른다. 모든 분야 가운데 한 분야에서 남들을 압도할 확신이 있었다면, 그는 결코 이 모든 영역들의 문을 두드리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즉 모든 분야에서 이등을 하며 어떤 분야에서도 일등을 하지 못하는 자, 전분야의 대가, 모든 것을 다 건드리는 천재, 왕관 없는 군주, 이 왕좌에서 저 왕좌로 옮겨다니며, 황홀을 가지고 노는 그런 자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자신이 홀로, 그것도 절대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다른 왕국, 다른 분야를 상실할 것이라는 점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사르트르는 그 자신의 행보에서 동시대의 문학적, 문화적 영역을 풍요롭게 하는 데 성공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훌륭한 소설가가 아니었던 이유는, 그가 동시에 철학자이기도 했다는 점, 철학이 그의 소설의 토대를 무겁게 했다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어떤 패배>나 <멋쟁이 예수> 같은 유쾌하면서도 장난기 가득한 작품들이다. <자아의 초월성>이나 <존재와 무>같은 것은 이론적 도구로 무거워지지 않은 “자유로운”형식이다. 멋을 부린 언어, 유치함, 종종 무거움이 들어 있다는 것과 진부하고 교과서적이라는 것이다. 반대로 <구토>에서는 아주 훌륭한 효과를 낳았다. 그러니까 정반대로 그에게 있어서는 바로 이 철학이 그의 “선택을 위한 도구”의 힘을 증가시켜주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구토>의 앞부분에 나오는 거울 일화가 궁극적으로는 <자아의 초월성>에 대한 주석, 즉 “있는 그대로의 자아 그 자체는 우리에게 미지의 것으로 남아 있다”에서 온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헤겔에게 항복을 선언한 그때부터 사르트르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헤겔이후 더 이상 철학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려야만 할 경우 첫 번째 할수 있는 것은 “침묵“을 지키는 것이다. 1950~55년 사이에, 사르트르가 ”이른바 철학적 사색“을 ”포기하고“, 그의 모든 ”활동“을 ”정치행위“라는 ”행위“에 ”투사“하기로 한 시기에 ”나는 결코 충격적인 저서를 쓰지 못했어요. 가렬 세익스피어나 헤겔의 저서와 같은 그런 저서 말이에요. 따라서 내가 쓰고자 한 저서와 비교해보면 결국 실패를 한 것이죠“ 라고 그는 베니 레비와의 대화에서 씁쓸함을 느끼면서 말하고 있다. 사르트르는 샵살에게 자기 사유의 기이한 작동에 대해 설명한다. 샵살에게 이 글쓰기의 광기는 물론 자기 사유의 일반적 토대인 말, 이념, 일탈, 과장 등의 불안정한 증식에 대해 말한다. 사르트르는 먼저 이와 같은 글쓰기의 증식이 병이었다는 사실을 털어놓는다. 그러니까 더욱 정확히 말하면 그것이 ”암“이었다는
것이다. “그렇소, 나는 암에 걸려 괴로워 했습니다. 이 암이란 것은 바로 나의 철학적 글쓰기였죠” 그런데 한권의 책, 그의 사유를 암으로부터 치유해준 책, 치유와 동시에 그 사유를 죽어버린, 더 정확히 말해 철학자로서의 취향, 재능, 수단들을 죽여버린, 더 정확히 말해 철학자로서의 취향, 재능, 수단들을 죽여버린 한권의 책, 바로 <변증법적 이성비판>이 그것이다.
자기시대를 “플라톤이라는 질병의 치유”로 초대한 니체의 말이 생각난다. 다만 사르트르의 경우에는 플라톤으로부터 치유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치유도 첨가된다.
<변증법적 이성비판>의 한 각주에서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 책 이후로 그가 입을 다문 것도 사실이다. “ 내 관념들은 죽었다. 같은 페이지에서 그는 ”마르크스와 헤겔“ 이후 ”새로운 합리성“을 ”구축해야 할“ 필요성을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자기의 사유들은 죽었다는 것이다. 사르트른 공산주의자들 편에 서서 우리 시대의 극복할 수 없는 철학인 마르크스주의를 바로 이 세계에서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변증법적 이성비판> 이후에, 어쩌면 그보다 앞서<도덕을 위한 노트>를 쓴 후로부터 사르트르는 일종의 좌파 코제브가 되었다.
공적인 논쟁에 휘말리지 않은 채 1930년대를 보낸 사르트르, 그의 비서 장 코의 말에 따르면, 1950년대까지만 해도 정치를 “고역”, “우울한 권태”, “마르지 않는 구토”의 근원으로 여겼으며, 1970년대에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질문에, ‘나는 장차 한 사람이 어떻게 정치를 하기에 이르는지, 한 사람이 어떻게 정치에 사로잡히고, 정치에 의해 원래의 모습과 다른 사람이 되는지를 보여주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아울러 ”사실 내가 정치를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결국에 가서는 내가 정치를 할 수밖에 없도록 이 정치라는 것이 나를 얼마나 많이 바꾸어놓았는지도 살펴볼 필요가 있지요“라고 덧붙이면서 이 절대적 예술가 사르트르, 바로 이 사람이 이제 현실의 문제와 호응하면서 살게 된 것이다.
이 현실의 문제는, 갈수록 절제되지 않은 리듬으로 여론, 시위, 사건에 대한 논평, 꼭 필요한 혹은 헛된 선동, 비방의 글에 대한 그의 역할과 몫을 요구하게 된다. 유감스럽고도 애석한 사르트르의 모습, 일종의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행동가로서 여기저기에서, 이 논단 혹은 이 재판에서 저 논단 혹은 저 재판으로 뛰어 다니며 메가폰을 쥐고 소련에 대한, 중국에 대한, 쿠바에 대한, 모택동에 대한 신념을 바탕으로 감언이설을 전하고 다니는 그의 모습...<이별의 의식>에서 사르트르는 ”50세 정도가 되면 정치적이 되고 말지요. 졸라를 보세요. 지드도요. 그리고 빅토르 위고도요. 나는 내 삶을 항상 그런 시각에서 보았어요. 나는 문학영역을 떠나서 정치영역으로 갈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나는 항상 문학 영역을 떠나서 정치 영역으로 갈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사르트르가 그와 같은 정치적 인간이 된 데에는, 그에게 남은 삶의 중요한 부분을 쿠바에서 사탕수수의 수확을 설명하고, 베트남에서 미국인들이 저지른 죄를 단죄하기 위해 “러셀 법정”을 주재하고 시간을 할애하기 위해서는 전혀 다른 이유가 필요했다. 요컨대 그가 이처럼 공산당의 동반자 역할에 자기 자신의 몸을 맞추고, 역사의 종말이 아니라 적어도 철학의 종말을 주장하는 이론가들에게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기 위해서 전혀 다른 이유가 필요 했다. ~
<“사르트르평전“에서 극히 일부 요약발췌 및 가감, 베르나르 앙리 레버 지음, 변광배박사 옮김, 을유문화사>
베르나르 앙리 레버;
24세, 철학교수자격시험합격, 파리고등사범학교에서 철학 강의, 30세 나이에 대표작<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발표<위험한 순수>,<신의 유언>, 아메리칸 버티고>,<그럼에도 나는 좌파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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