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신이 존재한다고 납득할 만한 증거를 도무지 찾지 못했다. 신을 믿지 않으면 삶이 완전하고 충만할 수 없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단순히 자신들의 기쁨과 슬픔을 창조했다고 생각하는 신을 믿지 않는다면 삶이 어찌 될까 두려워하는 자신들의 공포를 투영할 뿐이다.
내가 만나 본 유신론자들 가운데 가장 행복해 보이는 쪽은 내가 그들의 신을 믿든 믿지 않든 상관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반면, 가장 불행해 보이는 유신론자들은 내가 그들의 신을 함께 섬기지 않는다고 상스럽게 비난하는 사람들이다.
가장 다루기 힘든 유형은 ‘거듭 태어난’뒤 자기들이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영원히 고통 속에서 살지 않기를 원하기 때문에 나를 ‘구원‘한다고 느끼는 친구들이다~<로리 리프리 브라운,미국 세속연합 초대회장,네바다 주 상원의원,변호사>
사람들은 대부분 종교적인 문화 속에서 태어나며,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 시절에는 수동적으로 각자의 종교적 믿음을 얻는다. 거의 모든 무신론자는 카뮈가 말했듯이, 지성이 명료하게 있을 수 있는 그 장소에 닿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종교적 유산을 내려놓아야 했고, 투쟁해야 할 때도 많았다. 나는 천성이 경험론의 취향을 가진 회의론자였던 것 같다. 신 존재에 관한 다양한 형이상학과 실용주의 논의, 신정론의 시도, 지적으로 종교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다른 견해들은 모두 내게 빈약해 보였고, 흄과 칸트이후 대부분의 철학자도 일반적으로 비슷하게 평가했다. <타마스 파타키,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 대학 철학과 선임연구원>
나는 내 일생의 25년 동안 초심리학자로서 텔레파시,선견지명, 유령, 조짐 등의 초상현상을 찾아다녔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사람들이 자신의 이상한 경험을 묘사하려고 정말 노력하지만, 혼령을 불러오고 신들을 개입시키며, 다른 차원, 미세신,차크라, 과학으로는 알지 못할 힘, 양자 효과 등 온갖 잘못된 설명으로 비약한다는 사실이었다. 나 자신의 유체이탈 체험에서도 그랬다.
신과 초상현상은 둘 다 비합리적이고 증거가 없는 개념들에 결부되며,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의 모든 작동 방식에 위배된다. 둘 다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며, 우주에 대해 갖는 자연스런 사고방식 및 그들이 원하는 우주의 존재 방식에 쉽게 들어맞는다. 둘 다 깊은 신앙을 만들어내는 영감의 원천이며, 일단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난 뒤에는 매우 전염성이 강하고 근절하기 힘든, 고도로 발전한 밈플렉스(memeplex,문화적 구성요소 복합체)를 번식시켰다.<수전블랙모어, 영국의 심리학자이자 과학저술가이다. 의식,ala, 진화이론, 의식과 명상 등에 연구>
인류는 1만 년이 넘는 지난 역사에서 1만 개의 상이한 종교와 신 1000명을 창조해냈다. 야훼가 하나의 진정한 신이고, 아몬 라, 아프로디테,아폴로,바알, 브라마,이시스,시바,제우스 등 986개의 다른 신이 가짜 신일 확률은 어느 정도인가? 모든 사람은 이런 두 번째 부류의 신들에 대해서는 무신론자다. 십계의 첫 세 항목에서 보듯 야훼가 그토록 질투심이 많은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① 내 앞에서 다른 신을 갖지 마라. ② 우상을 만들지 마라 ③ 그들 앞에서 머리를 숙이거나 숭배하지 마라.
나는 인간이 신을 만든 것이지 그 역이 아니라는 강력한 증거가 있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20세기의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은 야훼가 전지전능한 우주의 창조자이며, 예수라는 육신으로 현현했다고 믿는 그리스도인인 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20세기의 인도에 태어난 사람은 브라만을 불변적이고 시간과 공간의 창조자이며 힌두교도가 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리스도인은 예수가 구세주이며 그리스도가 마지막 예언이라 믿는다. 유대인은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고, 모슬렘도 마찬가지로 무함마드가 마지막 예언자라고 믿는다. 모르몬교도는 조지프 스미스가 마지막 예언자라고 믿는다. 과학은 초자연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작동한다. 나는 초자연이나 비정상적이라는 것은 없다고 주장한다. 그저 자연적인 것, 정상적인 것, 자연적인 원인으로는 아직 설명하지 못한 수수께끼들이 있을 뿐이다.
유신론자는 신이 우주와 그 속의 만물, 별, 행성, 생명을 창조했다고 믿는다. 지적 설게 이론가들도 이를 믿는다. 창조론이 법적으로 패배한 뒤, 최초의 수정 조항을 우회하기 위해 그들은 지적 설계자라고 규정했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우리는 전지전능한 신 또는 지적 설계자(ID,Intelligent Designer)를 지극히 힘이 세고 정말로 영리한 외계지성체(ETI, Extra-Terrestrial Intelligence)와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그런 존재를 찾으러 나간다면, 우리는 셔머의 마지막 법칙이라 부르는 문제를 만나게 된다. 즉, 충분히 진보한 모든 외계지선은 신과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초자연적인 신은 자연 세계의 일부가 아니기 때문에 과학으로는 알려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과학은 이 신을 알지 못한다. <마이클 셔머, 미국 과학저술가이자 과학사가. 과학저널 스켑틱의 편집자>
플라톤은 철학이 궁금해서 시작된다고 말했다. 내가 발견 것은 그리스도교 사상이 세계를 작은 보따리 속에 가두어두려 했다는 사실이다. 성서 비판 및 중동의 고대 역사를 공부하면서 신약성서가 확실히 인간의 작품임을 알게 되었다. 개인적 해방의 빛나는 기록이 몇 군데 있기는 했지만 그 저자들의 온갖 편견과 설교 의도가 곳곳에 얽은 자국을 남겼고, 그런 자국 속에서 예수의 음성은 다양하게 굴절되었다. 온화하고 순하고 젊잖은 예수가 실제로는 묵시록적인 예언자였을 수도 있다.
힌두교의 지혜, 불교의 지혜, 도교의 지혜는 최소한 실제적인 수준에서 흥미로운 새 사상을 소개해주는데, 이런 지혜가 내가 아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항상 잘 어울리지는 않았다. 예를 들면 자연의 순리를 따른다는 노자의 생각은 영지주의적이면서 때로는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주류 그리스도교식 접근법과는 현저하게 다른 길을 가고 있다.
내가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 그대로 갇혀 있으면서 종교적 친척이나 지인들, 과거의 나 자신에게 계속 충실했다면 이 모든 것에 눈을 감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무신론자는 아닐지도 모르고, 종교적 믿음에 관한 광범위한 회의주의의 일부로서 불가지론자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의 회의주의는 최근들어 더 커졌다.
이런 회의주의적 혼합물에다 새로움에 대한 개방성을 조금만 더 보태고, 상상적 비전과 개념적 명료성에 대한 철학자의 관심을 적용한다면, 우리는 까마득하게 긴 시간 속에서 합리적인 종교가 진화해 나올 뿐만 아니라 우리 생전에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시대에 어울리는 종교 형태가 있다면 그것은 회의주의적인 종교, 즉 믿음이 없는 종교일 거라는 생각이다. 우리와 같은 존재에서, 진화 초기의 흙덩이가 여전히 달라붙어 있는 우리에게서 플라톤의 궁금증은 최소한 그 정도는 요구한다. <J.L.셀헨버그, 케나다 마운트 세인트빈센트 대학 철학과 교수, 종교철학에 관한 책을 여러 권 냈다.>
신에 관해 말하자면, 나는 그들이 존재하는지 아닌지, 그들이 어떤 종류인지 모른다. 그 주제가 워낙 불분명하고, 인간의 수명은 워낙 짧기 때문이다<프로타고라스>
지난 몇 년간 종교적 신앙과 태도를 진지하게 검토하고 비판한 책들을 출판되었다는 사실이다. 스텐저의<과학은 신을 발견했는가?>와 <물리학의 세계에 신의 공간은 없다>와, 리처드 도킨스<만들어진 신>, 크리스토퍼 히친스<신은 위대하지 않다>, 샘 해리스의 <종교의 종말>과 <어느 그리스도교 국가에게 보내는 편지>다.
이 책들은 중심 이슈 두 가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먼저 종교적 믿음, 특히 신의 존재에 대한 합리성 문제다. 두 번째는 특정한 종교적 믿음이나 태도가 도덕적 비판에 열려 있는가 하는 점이 정당화될 수 없다는 주장에 관심이 있다. 스텐저와 리처드 도킨스는 일차적으로 신에 대한 믿음이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도킨스는 어떤 측면에서는 종교에 도덕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관심은 크리스토퍼 히친스<신은 위대하지 않다>의 책에서도 중심 이슈로 떠오른다. 히친스는 “종교가 모든 것을 중독시킨다”는 견해를 길게 논의한다.
1965년 가을에 나는 카우프만이 맡고 있던 종교철학 수업의 조교였는데, 과제물 가운데 한 가지를 내려면 마태복음을 읽어야 했다. 복음서를 보면 어떤 예수상이 떠오르는가? 먼저 예수는 거짓과 믿음을 여러 가지 받아들였다. 그 중 하나는 악령이 들린다는 현상을 믿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열두 명을 지명해 함께 지내면서 전도를 하고 악령을 축출할 권위를 갖게 했다.<마가복음 3장14~15절>
성욕에 관한 예수의 견해는 심히 청교도적인 것으로 보인다. “~천국을 위해 거세한 사람들이 있다.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이게 하라”.<마태복음 19장12절> 예수는 또 간통 때문에 그렇게 된 경우를 제외하면, 이혼은 도덕적으로 잘못이라는 입장이다. “아내와 이혼하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자는 그녀에 대해 간음을 범한 것이다. 여자가 남편과 이혼하고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면 그녀 역시 간음을 범한 것이다.”<마가복음 10장11~12절>
예수는 자신의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거의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어떤 장소가 너희를 받아주지 않고 너희 말을 듣지 않는다면, 그곳을 떠날 때 그들을 반대한다는 증거로 발의 먼지를 떨어버려라.<마가복음6장11절>
예수는 도덕적으로 야만스러운 생각을 여러 가지 받아들였다. “그러나 시대가 끝날 때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등장해 악한 자와 의로운 자를 갈라놓고, 전자를 불의 용광로에 던질 것이며, 그곳에서 사람들이 울고 이를 갈 것이다<마태복음13장49~50절>
이 때문에 나는 평범한 그리스도인이 자신들의 신앙에 대해 비판적으로 생각하도록 만들고 싶다면, 예수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가장 전망이 밝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이클 톨리, 미국 콜로라도 대학 철학과 교수>
<‘무신예찬, 신 없이 살아가는 50가지 방식’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피터싱어/마이클서머/그레이건 외 지음, 김병화님 옮김, 현암사출판>
유⦁무신론자 모두가 알아야 할 신에 대한 논쟁, 사람들이 신을 믿는 50가지 이유
위험한 이 세상에서 강력한 보호자이자 동시에 선의 궁극적인 원동력인 신의 존재 자체를 의심해 보는 것은 누구에게도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신의 존재 여부에 대하여 의문을 품는 것이 어떤 신자들에게는 가족과 친구들을 심각하게 배신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신앙을 향한 회의적인 비판과 객관적인 분석으로부터 신자들이 소극적으로 멀어지는 또 다른 이유는, 분노한 신으로부터의 처벌이 두렵기 때문이다.
직업도 중요하다. 안전도 중요하다. 하지만 당신 자신을 위하여 생각하고, 당신 자신을 존중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나는 강조하고 싶다.
대부분 종교가 어리고 연약해서 무엇을 반박하기보다는 그저 의심 없이 믿고 따랐을 어린 시절에 주입되었음을 생각해본다면, 우리가 좀 더 성장한 뒤에 과거의 종교적인 믿음에 대해서 실수를 인정하고 방향을 바로 잡는 것은 조금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무신론자로 평가받는 것을 신자들이 그토록 꺼리는 이유는 아마도 무신론이 부도덕성, 소름끼치는 거부감, 그리고 활발히 임무를 수행 중인 사탄의 불길한 손길 같은 것을 암시한다고 느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신론자들이 나쁜 사람이라는 잘못된 관념을 재고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작업이다.
2006년 미네소타 대학 연구의 자료에 의하면 “미국 사회의 이상에 제일 어울리지않는” 집단으로 당당히 1위에 오른 것은 39.6%를 차지한 무신론자였다. 2위로는 26.3%를 차지한 이슬람교도, 3위는 22.6% 동성애자기 뽑혔다. 미국 부모가 가장 반대하고 싶은 배우자감 역시 47.6%인 무신론자였다. 2위가 이슬람교도(33.5%),3위가 흑인(27.2%)이었다.
무신론을 따르는 사람 속에는 인류의 존경을 받을 주목할 만한 인물들이 많지만 몇 사람만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토머스 에디슨, 어니스트 헤밍웨이, 노암 촘스키, 마크 트웨인, 제임스 왓슨, 빌 게이츠, 워린 버핏, 스티븐 호킹, 이들이 사악한 인간들인가?
참으로 비논리적이고 불공평하게도, 미국 사우디아라비아, 아프카니스탄 같은 매우 종교적인 국가들은 무신론자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러한 편견은 신들의 존재 여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가끔 신자들이 대중성을 이용해서 진실에 접근하려는 실수를 범하기도 하지만, 이것 역시 착각일 뿐이다. 대중적으로 인기가 많은 것이 반드시 진실의 척도가 될 수는 없다.
무신론자를 반대하는 편견의 이면에는 신자들도 결국 무신론자라는 재미있는 사실이 감추어져 있다. 예를 들면, 기독교도는 힌두교의 신들에 대해서만큼은 무신론자다. 기독교는 힌두교의 주장에 회의적이며, 힌두교에서 예배하는 신들이 그저 오래된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런데 예수가 신이라는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이슬람교도도 확고한 무신론자다. 10억 명이 넘는 이슬람교도들은 예수에 대해서만큼은 무신론자다. 신자든 무신론자든 상관없이 누구나 자기가 믿지 않는 신은 거부한다.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 신자들과는 달리, 무신론자는 일관성을 유지하기 때문에 특정한 신에 대해서만 관대하게 예외를 두지 않는다.
신앙을 유지함으로써 치러야 하는 또 다른 비용은 사람들이 과학적인 호기심을 잃게 된다는 점이다. 물론 모든 신자에게 적용되지는 않을 것이다. 과학을 존경하고 감사하는 신자들도 많다. 하지만 안타깝지만 그들보다 더 많은 수의 신자들은 그렇지가 않다.
과학적인 설명은 발견과 관찰과 실험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런데 종교적인 설명은 매우 다르다. 종교는 사물과 상황을 간단히 ‘마법’이라 부르거나 아니면 증명되지도 않은 주장을 ‘신의 계시’라고 부르며 이것들을 이용해서 현상을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결국 종교와 과학은 우주를 파악하려는 두 개의 매우 다른 방법들이고, 이 둘은 서로 양립할 수가 없다.
고대의 책이나 권위 있는 지도자의 말에 근거하여 만사를 해석하는 습성에 길든 사람의 마음속에서는 과학적 호기심이 억눌릴 수밖에 없다. 결국, 신앙은 인간의 과학적인 이성과 합리성을 죽이고 지성을 약하게 만드는 마약과 같다.
지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신을 믿는 사람이 사람들이 많다. 우리는 지옥을 두려워하기 전에 먼저 지옥을 창조한 신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를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나는 잘못된 신들을 선택하고 믿은 사람들이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라는 신자들의 주장이 가장 나쁘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신자는 특정한 신이나 신들을 강압적으로 주입하는 사회와 가족들 속에서 태어나고 자란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을 자력으로 ‘진짜’신을 알아내거나 자기 자신에 대하여 혁신적으로 반성해볼 기회가 많을 수는 없다. 타인과 정의를 염려하는 신자라면 ‘잘못된’신을 믿거나 혹은 신을 믿지 않는 것이 정말로 범죄에 해당하는지를 진지하게 자문해보아야 한다.
신자들은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이 신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만약 천국이 사실이라면, 단지 종교적으로 안내를 잘못한 부모나 사회가 당신에게 한 말을 신뢰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좋은 곳에서 영원히 제외 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나 가혹하다.
오늘날 살아 있는 10억 명의 힌두교도들은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지옥으로 동시에 가게 되는가? 아니면 시간을 나누어서 교대로 양쪽으로 번갈아 가게 되는가?
지옥은 증명되지 않은 또 하나의 종교적 주장일 뿐이다. 제대로 된 방식으로 자기를 예배하지 않았다는, 철저하게 믿지 않았다는, 혹은 잘못된 신을 경배하는 악의 없는 실수를 했다는 이유를 내세워서 전능한 신이 인간을 영원히 잔인하게 학대하는 것은, 상식적인 인간의 품위에 비추어보았을 때 매우 잘못 되었다.
선한 신과 나쁜 지옥 둘 다를 동시에 믿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나는 신자에게 반성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대다수 신자는 그들의 신을 그냥 선한 정도가 아니라 매우 선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처럼 매우 선한 신이 어떻게 그렇게 끔찍한 고문실을 능숙하게 관리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신자들이 이렇게 모순되는 견해를 둘 다 믿는 것은 실수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당신의 선한 신이 사실이 아니거나, 당신의 무서운 지옥이 사실이 아니어야 한다. 혹은 양쪽 다 사실이 아니어야 한다.
신자들은 우리의 죽음은 진짜 죽음이 아니라고 말한다. 또 다른 존재를 시작하기 전에 그저 잠시 쉬어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천국, 지옥, 혹은 환생-무엇으로 다음에 확실히 온다고 신자들은 나에게 약속한다.
죽음을 넘어서 산다는 신자들의 말은 대단하게 들린다. 그것을 믿고 싶지 않은 사람이 과연 어디에 있을까? 하지만 나는 믿지 않는다. 만약 이러한 거짓 희망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죽음 이후에 더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이생에서 자기 자신에게 불충실하도록 이끈다면, 이는 단순히 잘못되었을 뿐 아니라, 굉장히 파괴적인 희망이기도 하다.
어떤 이야기가 평범하지 않다거나 일어날 것 같지 않을수록, 그 이야기를 신뢰하기 위해서는 더욱 더 확실하고 명확한 증거가 필요하다. 이처럼 회의적인 태도는 우리가 사는 별난 세상에서 함정에 걸리지 않도록 도와주는 안전한 방법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현대 인간 화석 중에서 생물학적으로 가장 오래된(16만 년 전쯤으로 추정되는) 화석의 발견자인 팀 화이트와 ‘루사’라고 불리는 유명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의 발견자인 도널드 조헨슨이 그들이다.
인간이 진화에 대하여 신자들이 품고 있는 의문의 핵심은 원숭이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문제 삼는 것은 인간이 아닌 짐승들과 우리가 연관된다는 부분이다. 그들은 이러한 연관을 모욕적이라고 느낀다.
진화공포증이 있는 신자들은 인간과 자연 사이에 자기들이 만들어놓은 상상의 벽에 금이 가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DNA나 다른 여러 연구들을 통하여 얻은 결론에 의하면 인간은 원숭이 집단이 아니라, 유인원 집단에 속하는 것으로 파악된다(캐머린 스미스/찰스 설리번) 그러니까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변해왔다는 의견은 명백히 틀렸으며, 사실 진화론이 이러한 주장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인간이 진화와 종교, 둘 다를 함께 수용할 수 없다고 말하는 종교인들은 종교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이다. 인간이 진화했다고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신앙도 유지하는 사람들이 오늘날 세상에는 수 억 명이 넘는다. 예를 들면 교황 요한 바오르 2세는 천주교 신앙이 인간의 진화론과 충돌할 필요가 없다고 1996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천주교의 공식적인 입장은 인간의 진화가 그들이 믿는 신의 창조과정이라는 것이다. 물론 하나의 신이 자연의 진화를 주관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나는 천주교의 가정도 하나의 가능성으로 받아들여진다.
진화를 수용하는 이슬람교도, 힌두교, 모르몬교도, 심지어는 침례교도도 많다. 이렇듯 인간의 진화로부터 도망가지 않고도 신이나 신들을 믿는 것은 가능하다. 더 이상 진화를 거부하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증거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신자들은 이제 입장을 바꾸어서 진화론에 자기들의 신앙을 순응시키게 되었다. 이러한 태도를 가리켜서 ‘유신론적 진화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나는 이러한 입장을 좋은 출발이라고 부르고 싶다.
지구에서 가장 종교적인 국가들, 특히 아프리카 국가들은 에이즈감염률에서 아주 심각한 상태임을 보여주고 있다. 반면, 성교육 수준이 높고 산아 제한 또한 쉽게 허용하고 있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있는 나라들 같은 서구 유럽의 비종교적인 국가들은, 에이즈 감염률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나라들 가운데 상위권에 올라 있다.
지구는 인간의 삶에 이상적인 터전을 제공하는(잦은 지진, 허리케인, 토네이도, 홍수, 전염병 같은 것을 제외하면) 훌륭한 위성이다. 현 시점에 우리가 우주에 대하여 아는 것은 너무나 미약하기 때문에, 지적인 생명체가 오직 지구에서만 생겨났는가에 대한 결론을 내리는 것은 조금 더 유보하는 게 옳을 것이다. 어느 특정한 하나의 신만이 우리의 존재 뒤에 있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아직 충분한 설명이 될 수 없다.
아주 많은 사람이 자기들의 신앙을 정직하게 분석할 용기를 내지 못하는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신자들은 무신론자들이 부도덕하고, 비열하고, 냉정하고, 신뢰할 수 없고, 적응 불능인 불행한 자들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스웨덴 인구의 46에서 85퍼센트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무신론자이다.
2005년 갤럽 국제 조사 연구 자료인 <사람의 소리>는 전 세계 65개국이 넘는 나라의 5만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거나 혹은 기초 교육만 받은 사람들보다는 중등 교육이나 그 이상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훨씬 덜 종교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세상의 어느 아기도 알라, 예수, 혹은 헤주르를 태어날 때부터 믿지 않았다. 우리는 누구나 다 예외 없이 무신론자로서 인생을 시작하였다. 다양한 종류의 불가지론 가운데 가장 일반적인 입장은 신들을 알 수 없는 것이라는 어정쩡한 태도다. 정확히 말해서 불가지론은 신앙이나 비 신앙 그 어느 쪽의 입장도 취하고 있지 않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죽음에 대한 생각이 대다수의 신자나 무신론자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신자 또한 병원에서의 치료에도 성심껏 임하고, 큰 수술도 마다하지 않고, 위험한 상황에 부닥치면 제발 죽지만은 않기를 바라며 필사적으로 기도에 매달린다. 죽으면 근사한 낙원 같은 곳으로 가게 된다는 것을 진심으로 믿는다면 그렇게 까지 걱정하지는 않을 것 같다.
죽으면 천국에 가리라는 것을 내가 신자들처럼 확신하고 있다면, 그러니까 ‘정말로 안다면’, 나는 현세의 인생을 지금처럼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고 감사하지는 않을지 모르겠다. 신자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사후에 대단한 무엇이 더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의 직감으로는 지금 사는 인생이 우리에게 주어진 전부인 것 같다.
<뉴 사이언티스트><사이언티픽 아메리칸> 그리고 <내셔널 지오그래픽>같은 잡지들을 정기적으로 읽기만 해도, 우리 지구의 생명체들을 장기적으로 보호해주는 보호막 따위는 아무데도 없음을 충분히 배우고도 남을 것이다.
신들이 오늘이나 내일, 혹은 내년에 세상을 파괴하거나 사람들을 죽일 수 있다는 가정에 대하여 걱정할 필요가 없는 까닭은 다음의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초자연적인 어떠한 재앙이 조만간 우리에게 닥치리라는 전망을 지지해줄 수 있는 타당한 증거가 전혀 없다. 둘째, 세상의 종말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수세기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길게 줄지어 서 있지만, 그들은 매번 예외 없이 틀렸다.
당신이 신을 믿고 싶다면, 좋다, 믿어라 . 하지만 나는 당신이 멸망의 날이 두려워서 신을 믿는 것은 권하고 싶지 않다. 종말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되고 공허한 위협이며, 그 모든 세월이 흐르고 난 지금, 이제 더 이상 누구도 그러한 두려움에 빠져서는 안 된다.
“제가 행복한 이유는 제가 행복하겠다고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제에게 행복이란 일차적으로 마음의 상태인데, 저는 저의 마음을 통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저의 행복도 통제할 수 있습니다. ~ 정신의 명확성에는 행복이 있고, 정신의 합리성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자유로운 생각이야말로 정신적 건강과 행복의 근본이 됩니다.
만약 당신이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당신은 누구와도 자유롭게 사랑을 주고받을 수 없습니다. 만약 유일하게 가치 있는 당신의 주장이 ‘자비로운’독재자로부터 온 강제적인 선물과 같다면, 당신은 절대 자신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저는 기독교도로서 지난 인생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제 자신의 의지대로 저만의 삶을 사는 것이, 과거의 삶보다 훨씬 더 좋습니다.“기독교 목사였다가 무신론자가 된 댄 바커의 고백이야기이다.
<‘사람들이 신을 믿는 50가지 이유‘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가이 해리슨 지음, 윤미성님 옮김, 다산북스>
* 가이 해리슨 : 사우스 플로리다 대학교에서 역사와 인류학을 전공했다. 이 책을 통해 스탠퍼드 대학, 워싱턴 대학, 세인트존스 대학 등 사회학, 인류학, 심리학 교수들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일상생활 속 아픔과 어려움을 당했을 때 누구나 간절한 소망과 적당한 믿음을 드러내는 게 사실이다. 이는 완전한 무신론자가 아닐지라도 상황에 따라 신을 찾는 약간 기회주의적인 불가지론자에 해당한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죽음과 관련하여 종교에 누구나 관심이 지대하다. 각 계 여러 전문가와 작가들이 기술한 책을 통해 이해의 폭을 넓혀보고자 유, 무신론에 관심을 가질 뿐이지 종교를 폄하하기위해 이렇게 후기를 남긴 것이 아님을 밝혀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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