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자료

화해는 곧 자신과의 조우다.

[중산] 2022. 1. 25. 07:41

화를 내뱉는 것은 에너지 낭비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화가 일어나는 것은 거기에 화의 뿌리들이 있기 때문이다. 화는 우리의 무지, 그릇된 판단, 이해와 연민의 결핍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화를 그저 발산해버리는 것은 화의 에너지만이 밖으로 나갈 뿐이다. 그 뿌리는 여전히 우리 마음속에 남아 있다.

 

화는 하나의 에너지다. 그 에너지가 너무 거셀 때 우리는 그 힘을 감당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것을 감당할 또 다른 에너지를 만들어야 한다. 그 또 다른 에너지는 바로 자각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화가 일어났을 때 우리는 호흡과 보행을 자각함으로써 자각의 씨앗이 마음속에서 싹을 틔워서 에너지를 생성하게 해주어야 한다. 자각은 화를 억압하기 위한 것이다.

 

마음속에서 화가 일어났을 때, 우리는 그 사실을 자각할 수 있다. “난 내가 지금 화가 났다는 걸 알아. 내 마음속에 지금 화가 들끓고 있다는 걸 알아.” 화를 자각한다는 것은 그것의 실체를 인정하고 맞이하고 접촉하고 끌어안는 것이다. 자각은 말하자면 우는 아기를 품에 안아서 달래는 어머니와도 같은 것이다. 우리 마음속의 화는 우리의 아기다. 우리가 보살펴야 할 자식이다. 자각이 있을 때 우리는 안전할 수 있고, 미소 지을 수 있다.

 

화를 처리하는 방법을 모르면 화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 자각이 없으면 우리 자신의 화에 의해서 희생될 수 있다. 화의 실체를 파악해서 그것을 끌어안고 있는 동안에 우리는 지속적으로 자각의 에너지가 생성되게끔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의식적인 호흡과 보행을 지속적으로 실천해야 한다.

 

자각이 없으면 그 무엇으로도 우리는 위안을 얻을 수 없다. 베개를 아무리 주먹으로 쳐도 소용없다. 베개의 실체조차도 보지 못하게 된다. 베개를 주먹으로 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가 사물의 실체를 알기 위해서는 그 사물과 진정으로 접촉을 해야 한다. 어떤 사람과 진정으로 접촉해보지 않고서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진정으로 알 수가 없다. 자각이 없으면 우리는 그 어떤 사물이나 사람과 진정으로 접촉할 수 없다. 자각이 없으면 화의 실체를 알 수 없고, 그리하여 화에게 잡아먹히고 마는 지경이 될 수 있다.

 

화해는 곧 자신과의 조우다.

나는 곧 타인이다. 아들 때문에 화가 난 사람은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이다. 아들이 곧 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틀린 생각이다. 아들이 곧 나다. 유전적으로 생리적으로 과학적으로, 아들은 나의 연속이다. 이것은 진리이다. 어머니는 누구인가? 우리의 어머니는 곧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후손으로서 어머니의 연속이고, 어머니는 곧 우리 자신이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화가 났을 때는 곧 자신에게 화가 난 것이다.

 

아들에게 벌을 주는 것은 자신에게 벌을 주는 것이다. 자식이 아버지에게 고통을 안겨준다면 곧 그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이 세상에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통찰할 때 그 사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화에서 벗어나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내가 이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생명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고 통찰하는 것이 가장 깊은 위안을 얻기 위한 최선의 길임을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한다.

 

내가 이 세상에 홀로 존재하지 않다는 것은 추상적인 철학이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를 늘 자각하면서 살 때 누구나가 실감할 수 있는 현실이다. 그 통찰이 나와 타인들 사이에 평화와 조화를 되찾아준다. 우리는 누구나 평화와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다. 우리가 타인들과 함께 살아갈 방도를 모색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화가 풀리면 인생도 풀린다, ’화’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틱낫한지음,최수민님 옮김,명진출판>

* 틱낫한(1926~2022) : 베트남의 승려이자 시인, 평화운동가, 열여섯의 나이에 불가에 입문하여 평생 구도자의 길을 걷고 있다. 베트남 전쟁 당시 죽어가는 동포들을 위해 전 세계를 순회하며 전쟁을 반대하는 연설과 법회를 열고, 불교평화대표단 의장으로서 파리 평화회의를 이끌었다. 1967년 마틴 루터 킹 목사로부터 노벨평화상 후보에 추천을 받았지만, 이후 베트남 정부의 박해를 받아 귀국을 금지당해야 했다. 으로 1980년대 초반 프랑스로 망명, 보르도 지방에서 명상수련센터 ‘플럼빌리지’를 세웠다. 1960년데 그가 주장한 ‘참여불교’는 내세론에 기댄 기존 불교의 빗장을 열고 사회문제에 적극 참여하는 것을 기본정신으로 삼아 전세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세계 4대 생불로 불리었고, 96세인 2022년 1월 21일 서거했다.

 

 

울산 울주 나사리해변

 

 

전문가들은 쉬면서 일할 것과 여가를 선용하라고 충고한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쉼이나 여가조차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을 따라야 직성이 풀리는 것 같다. 펜션이 유행하여 산속과 바닷가에 그림 같은 집들이 우후죽순 들어선다. 얼마 전엔 캠핑 장비가 꽤 비싼 것을 알고 놀랐다.

 

게다가 그걸 마련하려고 몇 달치씩 할부를 끊기도 한단다. 휴식 준비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은 탓에 푹 쉬고 난 뒤에도 피곤은 여전하다. 휴식이 또 하나의 스트레스가 된 격이다. 휴식마저 사람들이 이리저리 쏠리며 비슷한 형태를 띠는 것은 남들과 다르게 행동하면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치거나 손해를 볼 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 생각만 버리면 보이는 것도 많고 즐길 수 있는 것도 많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가장 편하고 즐겁게 할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나만의 진짜 휴식이다. 휴식(休息)의 한자를 풀이하면 ‘사람이 나무 옆에 앉아(休) 스스로 마음을 들여다보고 숨 쉬는 것(息)이다. 이 글자 풀이만으로도 휴식은 아주 단순하고 쉽고 편안하다.

 

내가 즐겨하는 휴식의 방법은 명상이다. 고요한 공간에 앉아 눈을 감고 호흡을 통해 몸과 마음을 다독인다. 그런데 명상에 대한 편견이 깨진 일이 있다. 네팔 오지에서 한 명상가의 제안으로 명상 체험을 했다. 그러나 4천 미터가 넘는 고산에서 명상가는 펄쩍펄쩍 뛰게 하고 숨을 크게 쉬는 호흡법을 가르쳐 주었다.

 

내가 알고 있던 고요한 좌선이 아니었다. 하늘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산에서 온몸을 자유롭게 흔들어대는 명상을 하면서 속이 어찌나 후련하던지, 좌선만 명상법으로 알았던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여유로움이란 다음을 위한 저축이요. 생체 리듬을 북돋우는 영양제 역할을 한다.

 

남들이 하는 휴식법에서 벗어나 보자. 무엇보다 일 따로 휴식 따로 하겠다는 생각을 바꿔 보자. 에디슨이 많은 발명을 했던 비결도 “앉을 수 있는 곳에 앉고 누울 수 있는 곳에서는 누워 쉬었기” 때문이다.

 

하루에 조용한 시간을 틈타 크게 숨을 골라 보자. 하루에 한 번만이라도 이런 여유를 가진다면 굳이 요란한 휴가를 갈 필요가 없을 것이다. 히말라야에서 함께 명상했던 네팔인이 말했다. “세계인들이 명상을 한다면 세상은 평화로울 것입니다.”

 

맞다. 물론 세계 평화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쉬고 싶을 때 제대로 잘 쉬는 것이다. 젊은 시절부터 잘 쉬는 법을 알아야 인생 후반기에 후회가 적다. ‘일을 더할 것을 ∙∙∙∙, 하고 후회하는 사람보다 ’일보다 나를 위한 여유를 가져 볼 것을 ∙∙∙∙, 하고 후회하는 사람이 더 많다.

 

<멋지게 나이 들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인생의 기술 53‘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이근후(이화여대명예교수)지음, 김선경님 엮음, 갤리온 출판>

* 이근후교수 : 이화여자대학교 교수이자 정신과 전문의로 50년간 환자를 돌보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76세 나이에 고려사이버대학 문화학과를 최고령으로 수석 졸업하면서 세간의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30년 넘게 네팔 의료봉사를 하고 40여년 넘게 광명보육원 아이들을 돌보았다. 그는 10년 전 왼쪽 눈의 시력을 잃고 당뇨 등 일곱 가지 병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