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자료

군중 속에서만 편해지는 사람!

[중산] 2024. 5. 19. 19:15

 

작약꽃

 

 

고독은 거리로 재는 것이 아니라 날짜로 세는 것이다.

 

고독은 언제나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영국에는 고독할 수 있는 거리들, 도로변들, 수천만 개의 장소와 높이 솟은 언덕들이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고독은 거리로 재는 것이 아니라 날짜로 세는 것이다.

 

고독은 모든 인간이 매일매일 새롭고 자유롭게 다스릴 수 있는 자신만의 영토와 같다. 나이에 상관없이 인간은 살아갈 나날만큼 고독을 품을 수 있다. 고독은 지상에 있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으며, 누구도 거부하지 않는다.

 

고독의 시간이 짧아지는 것도 아니고, 고독에서 우러나온 침묵이 훼손되는 법도 없다. 사람들은 누구나 혼자였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다. 아니, 고독은 날짜로 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수만큼 셀 수 있다.

 

산자와 죽은 자 모두 자기만의 ‘빛나는 고독의 순간을 가져봤을 테니까. 고독해지기 위해 공원에 갈 필요는 없다. 고독은 그저 시골에서 일할 때도 찾을 수 있다.

 

울창한 숲이 아니라 작은 덤불에도 우리는 숨을 수 있다. 타인의 시선과 귀를 피하기 위한 시간을 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세상에는 평생 단 한 시간도 혼자 있을 수 없는 사람도 많다. 그들은 하숙집에 사는 사람들이 그러하듯 마지못해 혹은 무심하게 타인과 같이 살아가고 있으며, 그런 모순적인 선택 덕분에 타인과 익숙하지만 친밀하지 않은 관계로 지낸다.

 

그들은 항상 타인의 조심성 없는 시선과 질 낮은 호기심의 대상으로 살아간다. 그들이 본의 아니게 무의식중에 내린 선택은 그들의 손해이며 헛되고 무익한 결과를 낳는다.

 

홀로 서 있으며 그 누구도 접근하기 어려운 사람으로 고독한 사람을 그린 사람은 누굴까? 장 프랑수아 밀레가 그린 그림 속에서 여자 양치기의 고독이 그렇게 묘사되어 있다.

 

그 작은 소녀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혼자 초연하게 서 있다. 그 소녀는 목장 일이 끝나는 시간을 기다리며 햇빛 속에서 서 있다. 그 소녀는 화가가 떠났을 때도 그렇게 서 있다. 밀레는 그렇게 시야에서 사라지는 소녀를 그렸다.

 

앞서 시골에서 고독을 누리기 위해 공원에 갈 필요는 없다는 말을 했다. 사실 마음의 평화에 이르기 위해 그렇게 먼 곳까지 긴 시간을 들여 가는 것은 아주 간단하게 얻을 수 있는 고독을 피하는 것처럼 보인다.

 

고독에 이르려면 한 걸음 정도만 옆으로 벗어나도 충분하다. 거의 평생 고독한 인생을 살게 될 수도 있는 시골에서 길을 잃어본 여행자는 그런 황무지의 고독한 사람들이 얼마나 헤아릴 수 없고, 극복할 수 없는 고독 속에 있는지 안다.

 

그가 지나가면서 그들의 고독이 잠시 깨지더라도, 사라진 건 아니다. 그들은 여행자를 보지만, 그가 그들을 보고 있다는 점을 의식하지 못한다. 아니, 그들은 마치 자신이 투명인간인 듯 여행자를 본다.

 

그 경지는 실로 어마어마하다. 그들의 몸과 영혼 둘 다 은둔자 그 자체니까. 설사 호기심이 생겨서 고개를 돌려 지나가는 사람을 보더라도 그들은 근본적으로 혼자이다.

 

- 엘리스 메이넬(1847-1922) 영국의 시인이자 수필가. 첫 시집<서곡>(1875)을 출간했다. 시를 쓰면서 편집자로 활동했으며 다양한 글을 기고해 저널리스트, 에세이스트로도 사랑받았다.

 

 

노랑꽃창포와 붓꽃

 

 

군중 속에서만 편해지는 사람!

 

창문에 이마를 대고 정신없이 군중의 얼굴을 관찰하는데 갑자기 어떤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65세에서 70세 사이로 보이는 노인이었는데 그 묘한 표정에 대번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것은 내가 그때까지 본 그 어떤 표정과도 달랐다. 나는 몹시 흥분했고, 경악했고, 매료되었다.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저 노인의 가슴에 얼마나 크나큰 격동의 역사가 쓰였을까?” 그를 계속 지켜보면서 그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다는 처절한 욕망이 치솟았다.

 

나는 허겁지겁 외투를 걸치고 모자와 단장을 움켜쥐고 거리로 나가 그가 사라진 방향으로 인파를 헤치며 갔다. 마침내 어렵사리 노인의 모습을 찾아 그가 눈치 채지 못하게 조심하면서 바짝 다가가 뒤를 쫓기 시작했다.

 

이제 그를 가까이서 관찰할 좋은 기회였다. 그는 키가 작고 몹시 여윈 데다 언뜻 보기에도 무척 약해 보였다. 옷은 전반적으로 지저분하고 너절했다.

 

성큼성큼 나아가는 노인을 따라가며 나는 놀랐고, 이전보다 더 강한 호기심에 사로잡혀 끝까지 놓치지 않겠다고 결심을 굳혔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덧 해가 떴다.

 

시시각각 혼란스러워지는 이 거리에서 나는 끈질기게 이 기이한 노인을 미행했다. 하지만 그는 종일 번잡한 거리를 떠나지 않고 이리저리 돌아다니기만 했다.

 

둘째 날 저녁에 어둠이 깃들 무렵 지쳐서 죽을 것 같았던 나는 이 방랑자 앞을 막고 서서 얼굴을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내 존재를 깨닫지 못한 채 그 엄숙한 산책을 다시 시작했다.

 

나는 그를 따라가길 멈추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저 노인은,” 나는 결국 입을 열었다. “심오한 죄악의 전형이자 귀재이다. 그는 홀로 있기를 거부한다.

 

그는 군중 속에서만 편해지는 사람이다. 더 쫓아가 봐야 그에 대해, 그의 행동에 대해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다.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마음이 바로 그런 마음일 거야.

 

영혼의 정원이라는 뜻의 16세기 기도서인 <호르툴루스 아니마에>보다 더 끔찍한 책이지. 읽히기를 거부한다는 것은, 어쩌면 신이 내린 자비로운 은총일지도 모르겠다.“

 

- 에드거 앨런 포(1809-1849)

미국의 작가, 편집자, 평론가. 마흔 살에 세상으로부터 제대로 이해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지만, 사후에 시대를 앞서 나간 문학 천재로 인정받았다. 1945년에 발표한 시 <까마귀>는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군중 속의 사람>은 근대 도시가 만들어 낸 고독의 유형을 가장 초기에 포착한 동시에 가장 성공적으로 묘사한 작품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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