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은 만족을 모른다.
욕망에 대한 스토아 철학의 첫 번째 소견은, 원하는 것을 얻어도 우리가 상상하는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하는 것을 얻으면 더 많이 원하게 됩니다.
하나의 욕망이 소진되면 새 욕망들이 나타납니다. 우리의 마음은 욕망 자체에, 또 욕망의 충족으로 목적지에 도달하리라는 환상에 굶주린 듯합니다. 그러나 목적지에는 결코 닿지 못합니다.
- 몽테뉴, <카이사르의 격언에 대하여>(1580)
우리에게 행운이 한 조각 찾아오면 우리 요구가 점점 커진다. 그런 요구를 통제할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점점 커지는 확장감에 즐거움이 있다.
하지만 즐거움은 이런 과정보다 더 오래 지속되지 않고, 확장이 끝나면 멈춘다. 우리는 늘어난 요구에 익숙해져버리고, 따라서 그것을 충족시키는 부의 양에 무감각해진다. - 쇼펜하우어, <삶의 지혜>(1851)
<‘삶을 산뜻하게 풀어주는, 철학 사용자를 위한 인생 매뉴얼’에서 극히 일부 발췌, 워드 판즈워스 지음, 강경이님 옮김, 윌북출판> * 워드 판즈워스 : 텍사스 오스틴 법학대학원 교수이자 학과장이다. 2012~2022년까지 텍사스 법학대학원 학장을 지냈다. 저서로는 <법률 분석가>, <소크라테스의 방법>, <고전에서 배우는 영어 수사학> 등이 있다.
거의 100년 전, 영국인 카터가 이끄는 탐험대가 이집트 왕의 계곡Valley of Kings에서 계단을 발견했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왕의 문장으로 봉인된 출입구가 나타났다.
파라오의 무덤이란 뜻이었다. 봉인이 뜯기지 않은 것으로 보아 3000년 넘게 아무도 드나든 적이 없었다. 젊은 파라오 투탕카멘의 미라가 찬란한 황금 가면을 쓴 채 온갖 화려하고 아름다운 유물에 둘러싸여 수천 년간 그곳에 누워 있었다.
무덤의 화려함은 죽음을 초월하려는 정교한 의식의 일부였다. 보물로 통하는 입구는 자칼의 머리를 하고 사후 세계를 지킨다는 황금색과 검은색으로 채색된 아누비스Anubis상이 지키고 있었다.
인류가 최초에 어떻게 자신의 유한성을 깨닫게 되었는지 생각해보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어느 순간 인간은 삶이란 영원히 계속되는 축제와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을 인식한다는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모든 문화권은 죽음이 완전히 끝임을 거부하는 믿음과 전략을 함께 발달시켰다.
우리는 추운 밤에 홀로 나가기를 두려워한다. 죽음이라는 현상이 있음을 아는 것 자체가 두려워서 대부분의 시간 동안 죽음을 부정하며 살아간다.
철학자 스티븐 케이브는 “불멸성의 추구야말로 인간 문명을 이끈 동력”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우리의 대처 전략을 네 가지로 분류한다.
플랜A는 영원히, 또는 최대한 오래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런 노력이 실패할 경우에 대비한 플랜B는 죽은 뒤에 육체가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플랜C는 육체가 썩고 부활할 수 없더라도 우리의 정수는 영원히 죽지 않는 영혼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마지막 플랜 D는 우리가 남긴 작품이나 기념품이나 생물학적 자손, 즉 우리의 유산을 통해 계속 살아간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언제나 플랜A를 실천하면서 살아가지만, 다른 플랜을 어느 정도까지 받아들일지는 문화마다 크게 다르다. 내가 자란 인도에서 힌두교와 불교도들은 플랜C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아브라함 종교에서는 플랜 B와 플랜C를 모두 받아 들인다. 영원불멸하는 영혼을 믿지만, 동시에 우리는 죽은 자와 육신에서 다시 살아 일어나며 언젠가 심판을 받는다.
아마 이런 생각 때문에 전통적으로 화장을 금하고 신체를 손상되지 않은 상태로 매장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고대 이집트 등 몇몇 문명권에서는 네 가지 플랜을 모두 신념 체계에 통합했다.
장대한 무덤을 짓고 파라오의 시체를 미라로 만들어 내세에 그 육신 그대로 일어날 수 있도록 했다.
동시에 그들은 인간의 정수를 간직한 채 죽지 않고 영생하는 영혼, 즉 바Ba를 믿었다.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 역시 다면적 전략을 구사해 영생을 얻으려 했다.
수많은 나라를 정복하면서 살아남은 그는 권력을 굳건히 한 후 불로장생의 영약을 찾아다녔다. 불로초를 찾지 못하면 처형당했으므로 많은 사람이 소식을 끊고 종적을 감추었다.
플랜B와 D를 결합해 극단까지 밀어붙인 결과가 진시황릉이다. 무려 70만명을 동원해 시안西安도시 크기의 무덤을 건설했다. 무덤에서는 흙으로 구운 병사와 말 모형이 7000점이나 발견되었다. 황제가 다시 태어날 때까지 호위하기 위해서다.
진시황은 기원전 210년, 49세로 세상을 떠났다. 역설적이지만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온갖 독성 물질 때문에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일찍 죽었을지 모른다.
18세기 계몽주의와 현대적 과학 시대가 열리면서 죽음에 대처하는 방식도 변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플랜B와 C에 매달렸지만, 합리성과 회의주의가 힘을 얻으면서 마음 한구석에 의문이 일었던 것이다.
‘그것이 정말 대안일까?’ 인류는 점차 오래 살 방법을 찾고, 죽은 뒤에 유산을 보전하는 데 집중했다. 언젠가 세상을 떠날 줄 알면서도 오래도록 기억되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을 느끼는 것은 인간 정신의 흥미로운 면이다.
오늘날 부유층은 무덤과 기념물을 건설하는 대신 자선사업을 벌인다. 죽은 뒤에도 오래도록 존속할 건물과 재단을 세워 기증한다.
시대를 막론하고 수많은 작가, 예술가, 음악가, 과학자가 작품과 연구를 통해 불멸을 추구했다 하지만 결국 후세에 남긴 것을 통해 살아남는 방식은 완벽하게 만족스러운 대안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의 유한성에 대해 끊임없는 실존적 불안을 느끼며 살아가지는 않는다. 어쩌면 우리 뇌는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일어날 뿐 내게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식의 보호기전을 진화시켰는지 모른다.
주변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흔히 볼 수 있었던 과거와 달리, 오늘날에는 건강하게 살아가는 다수와 격리된 채 요양원이나 병원에서 죽는 사람이 많다.
결국 우리는 플랜A로 돌아간다. 장구한 세월동안 지각 있는 모든 존재가 공통적으로 추구했던 전략, 최대한 오래 살아남으려고 하는 것이다. 어린 아이에도 우리는 사고, 적, 질병을 본능적으로 회피한다.
이런 보편적 욕구 덕에 무기를 개발하고 군대를 양성해 적의 공격에서 스스로를 지켜왔다. 다른 한편으로는 약과 치료법을 추구해 결국 현대의학과 수술법을 개발했다.
인간의 기대수명은 오래도록 거의 변하지 않다가, 지난 150년간 두 배로 늘었다. 100년 전에 유전자를 발견하면서 시작된 생물학적 혁명으로 인해 오늘날 우리는 기로에 서 있다.
고령 인구가 계속 늘기 때문에 이들이 최대한 오래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시급해졌다. 지난 10년 사이에 노화에 관해 30만 건이 넘는 과학 논문이 발표되었다.
2019년 말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은 자연이 인간의 계획 따위에는 전혀 개의치 않음을 냉혹하게 상기시켰다.
바이러스는 인간이 존재하기 훨씬 전부터 살았고, 뛰어난 적응력으로 우리가 사라진 후에도 오래도록 살아갈 것임을 다시한번 일깨워주었다.
나는 오래도록 세포 속에서 단백질이 어떻게 만들어지는를 연구했다. 이 문제는 기본적인 생명 현상이라서 사실상 생물학의 모든 측면과 관련 있다.
지난 수십 년간 밝혀진 사실은 노화의 많은 부분이 우리 몸에서 단백질의 생성과 파괴를 어떻게 조절하는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아직 젊고 영원히 살 것처럼 느끼는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나처럼 71세가 되어 일상적인 일조차 버겁고, 10년이나 20년 전에는 쉽게 했던 일들을 아예 할 수 없는 나이가 되고 보면 이 문제가 말할 수 없이 중요하게 다가온다.
자, 여행을 시작해보자. 죽음이란 정확히 무엇인가? 죽음은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는가? 도대체 우리는 왜 죽는가? ~
<‘우리는 왜 죽는가 - 노화, 수명, 죽음에 관한 새로운 과학’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 베니 라마크리슈난 지음, 강병철님 옮김, 김영사출판> * 베니 라마크리슈난 : 미국과 영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분자생물학자. 1952년 인도 태생으로, 인도 바로다 대학 물리학,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에서 물리학 박사를 취득했다.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생물학을 또 공부했고, 미 유대 대학을 거쳐, 영국 캐임브리지 MRC분자생물학 연구소에 합류해 지금까지 그룹 리더를 맡고 있다. 2009년 노벨 화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유전자 기계>, <인공지능은 무엇이 되려 하는가> 등의 공동 저서가 있다.
한계상황을 견디고 도약하기!
“실패를 보면 산다는 게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현실을 아는 것이 불안을 더욱 키우고, 희망 없음이 나를 불안 속에 스러지게 한다면, 피할 수 없는 사실성 앞에서 불안은 궁극의 것처럼 보인다. 원래의 불안이란, 출구 없이 궁극의 것인 양 느껴지는 불안이다.“
“이런 불안에서 나는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불안의, 바닥도 없는 심연에 빠져든다.” 이것은 절망의 상황이고 “아무것도 없음의 경직된 어둠”을 바라보는 일이다.
이런 상황에 맞서서는 인간이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견디는 것만이 도움이 된다.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 삶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긍정해야 한다.
죽음과 고통과 싸움과 죄와 운명에 대해 ‘그렇다’고 긍정해야 한다. 이것을 아주 진지하게 행하면, 한계상황을 견디는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의 본래 실존에 이르게 된다. “우리는 눈을 뜨고 한계상황으로 들어감으로써 우리 자신이 된다.”
- 야스퍼스
* 야스퍼스 (1883~1969) : 그는 극단적 위기에 몰려 보기도 하였다. 파괴적인 광신주의 세력(국가 사회주의, 즉 나치)이 그에게 교직을 포기하도록 강요했을 때, 아내에게 추방령의 위협이 닥쳤을 때, 그 자신도 그런 위협을 맛보았다.
정치적 세력들만 인간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다. 기술과 대중의 삶, 떠들썩한 법석으로 정신이 산만해짐, 생활환경의 비인간성 등을 통해 위협을 받는다.
대체 자유란 무엇인간? 야스퍼스에게는, 인간이 자기가 처해 있는 상황에서 그때마다 이것 혹은 저것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 자유다. 그러나 자유는 더 깊은 차원을 갖는다.
인간은 자유에서 자신을 파악하거나 아니면 놓친다. 자신을 얻거나 아니면 잃는다. 여기서 야스퍼스 철학의 윤리적 뿌리가 드러난다. “가장 깊은 실존적 자유”, “실존적 선택”, “나 자신의 선택”, “삶에서 자기 자신이 되겠다는 결정” 등이 여기서 중요하다.
왜냐하면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인간이 정말로 자기 자신을 붙잡는 것, 그가 자기 자신을 선택하는 것, 자신을 자신 위에 세우고 그래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 가장 중요한데 특히 철학하기에서 그렇다.
“철학하는 사람은 자기로 있음에 대해 말한다. 그것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철학을 하지 않는 것이다.”
야스퍼스는 자신의 철학을 “실존철학”이라고 부른다. 실존철학이란 “인간이 그것을 통해 자기 자신이 되는 생각하기”다.
실존은 단순히 여기 있음, 곧 우리의 일상적 존재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실존이란 인간의 극단적 가능성으로서 ‘자기로 있음’을 의미한다.“나는 상대방이 그 자신으로 있는 그만큼 나 자신으로 있다. 그리고 상대방이 자유로운 만큼 나도 자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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