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꿈은 소원 성취다
전통적으로 꿈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두 가지로 갈라진다. 먼저 꿈은 일상의 굴레로부터 사람의 마음을 해방시켜 창조적이고 자유분방한 세계로 인도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꿈에는 현실의 논리를 뛰어넘는 창조와 예언의 논리가 있다는 것이다. 아득한 옛날부터 철학자들과 예술가들은 꿈이 갖는 이런 마력과 생명력을 존중했다. 꿈에는 모종의 진리가 있다고 믿었다.
반면 꿈은 아무런 일관성도 객관성도 없이 아무렇게나 굴러가는 지리멸렬한 세계라고 보는 입장이 있다. 근대 이후 자연과학이 발전하면서 상당수의 의사들은 꿈의 심리적 활동을 사소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여겼다. 꿈의 심리적 능력을 경시하면서 신체적 자극이 꿈의 유일한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생리학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꿈을 연구했다. 꿈을 꾸게 만드는 심리적 자극의 독자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꿈에 예언력이 있다는 말은 틀렸지만 꿈이 단편적인 두뇌 활동이며 무의미하다는 말도 거짓이다. 물질적이고 생리적인 원인과는 엄연히 다른 심리적 역할이 꿈에는 분명히 있다. 그런 면에서는 꿈에는 의미가 있다고 예로부터 믿어온 대중들의 생각이 고루한 학자들의 견해보다 진실에 더 가깝다. 하지만 가령 ‘편지’는 ‘불쾌감’으로, ‘장례식’은 ‘약혼’ 등으로 기계적으로 대입하는, 대중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해몽서’식의 꿈 풀이는 보편성이 없다.
꿈은 많은 생리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연주자의 손이 아니라 외부의 충격을 받고 제멋대로 울리는 악기가 아니다. 그것은 완벽한 심리적 현상이며 정확히 말하자면 소원의 성취다. 간단한 예로 젊은 시절 나는 늦게까지 일을 해서 아침에 일어나기가 힘들었다. 그럴 때면 침대에서 일어나 세수하는 꿈을 꾸곤 했다. 잠시 후에는 아직 잠자리에 있다는 걸 깨달았지만 그 사이 조금 더 잘 수 있었던 것이다.
꿈이 소원 성취라는 건 아이의 꿈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배를 타고 아름다운 호수를 건넜는데 너무 아쉬워서 배에서 내리지 않으려던 내 딸아이는 다음날 어젯밤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는 꿈을 꿨다고 말했다. 그리스 전설에 심취한 내 맏아들은 아킬레스와 함께 마차를 타는 꿈을 꿨다.
꿈이 소원의 성취라는 내 주장에 사람들은 강하게 반발한다. 쫓기는 꿈, 처벌당하는 꿈, 고통을 겪는 꿈 등 편한 꿈보다는 불쾌한 꿈이 더 많다는 것이다. 어른이 꾸는 꿈은 특히 그런 내용이 많다. 게다가 꿈은 두서없고 부조리하고 과장되고 비현실적일 때가 많다. 이런 꿈이 어떻게 소원 성취일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표면에 드러난 꿈의 내용은 꿈의 의미가 아니다. 꿈의 세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표면에 드러난 꿈의 내용은 심층에 자리한 꿈의 사고를 은폐하고 있다. 꿈의 내용은 꿈의 사고가 위장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왜 은폐하는가? 왜 위장이 필요한가? 내부 검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2. 꿈은 소원을 왜곡시킨다
꿈은 이중 구조로 되어 있다. 겉으로 드러난 ‘꿈내용’이 있고 밑바탕에 깔려 있는 은폐된 ‘꿈사고’가 있다. 전문어로는 각각 ‘외현몽’과 ‘잠재몽’이라고 한다. 꿈사고는 본심이지만 결코 표면에 드러나지는 않는다. 꿈내용이라는 우회로를 거쳐서만 우리는 꿈사고에 도달할 수 있다.
꿈은 왜 이런 이중 구조를 가지게 됐을까? 우리 마음 속에서 서로 상반된 두 개의 힘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한쪽에는 소원을 성취하려는 힘이 있고 또 한쪽에는 그것을 누르려는 힘이 있다. 권력자의 비위를 거스르는 진실을 말해야 하는 관리의 처지를 생각하면 된다. 관리가 진실을 솔직하게 밝히면 권력자는 관리의 발언을 억압할 것이다. 관리는 검열을 두려워하게 되고 자연히 자신의 생각을 완화하고 왜곡한다. 악의가 없다는 걸 알리기 위해 암시와 위장과 은폐에 의존해야 한다. 검열이 엄격할수록 위장의 범위는 넓어지고 원래 말하려는 의미를 종잡기 어렵게 된다. 꿈은 두 힘의 타협의 산물이다. 자신을 위장해 검열을 통과한 꿈사고만이 꿈내용으로 진입할 수 있다.
여기서 실제로 내가 꾼 간단한 꿈의 일부를 소개한다. ‘...친구 R이 내 삼촌이다. 나는 그에게 깊은 애정을 느낀다 ...’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꿈이라고 생각했지만 만약 내 환자가 똑같은 반응을 보인다면 나는 그 배후에 뭔가 불쾌한 이야기가 숨어 있을 거라고 추측하리라는 점을 깨닫고 내적 저항을 극복하고 분석을 시도했다. 내 삼촌은 중죄를 저질러 징역을 산 일이 있다. 아버지는 삼촌이 사람은 착하지만 생각이 모자란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친구 R이 삼촌이라면 나는 R이 생각이 모자라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R은 법 없어도 살 사람이다. 나는 왜 R과 삼촌을 연관지었을까? 그때 며칠 전 다른 친구 N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R도 N도 나도 교수 임용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린 친구였지만 경쟁자였다. N은 나에게 자신의 교수 임용이 자꾸 지연되는 이유를 알아보니 예전에 어떤 여자한테 억울하게 고발당한 일 때문이었다며 나한테는 아무 문제 없으니 잘 될 거라고 말했다. 나는 꿈을 이해할 수 있었다. R과 N의 교수 임용이 지연되는 것이 유대계라는 이유 때문이라면 나 역시 유대인이니까 문제가 된다. 그렇지만 다른 이유라면 나는 괜찮다. 꿈 속에서 삼촌은 내 두 친구를 하나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하나는 범죄자로 묘사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 세 사람의 유대인이라는 공통성이 소멸되고 나는 안심하고 교수 임용을 기다릴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나는 왜 애정을 느꼈을까? 나는 삼촌에게 한 번도 정을 느껴본 적이 없다. 한편 R을 좋아하긴 하지만 꿈 속의 애정은 분명 과장돼 있다. 나는 조금씩 깨닫는다. 꿈 속에서 내가 느낀 애정은 꿈사고를 은페하는 구실을 한다. 꿈해석을 가로막는 역할을 한다. 내 꿈사고는 R을 어리석다고 비방한다. 내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도록 애정이 이입된 것이다.
앞에서 말한 불쾌한 꿈들이 모두 소원 성취라는 사실도 이런 이중 구조를 통해 명쾌히 설명된다. 많은 환자들이 자 이래도 꿈이 소원 성취라고 우기겠느냐면서 나에게 들려준 꿈들도 마찬가지였다. 재판마다 패소하는 꿈을 꾸는 변호사, 시어머니와 함께 여행을 가는 꿈을 꾸는 며느리의 꿈에서 나는 내 말이 틀리기를 원하는 그들의 강한 소원을 읽을 수 있었다. 그들은 꿈에서 그 소원을 이룬 셈이었다.
하지만 꿈이 소원 성취라는 말에 가장 거세게 반발하는 사람은 부모나 형제가 죽어서 슬퍼하는 꿈을 꾼 사람들이다. 그들은 절대로 가족의 죽음을 바란 적이 없다고 말한다. 내가 말하는 소원은 반드시 그 사람이 지금 품은 소원이 아니어도 된다. 어린 시절에 적어도 한 번은 품었던 소원이기만 하면 된다. 소원은 망각될 수는 있으나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은 형제 자매를 사랑하고 그들이 죽으면 상심할 사람이 옛날에 나쁜 소원을 품었던 적이 있으면 이 소원이 꿈에서 현실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린 시절부터 형제들은 대체로 화기애애하게 지낸다고 믿는다. 정말 그런가? 아이는 동생이 태어나면 십중팔구 질투한다. 아이는 이기적이다. 새로 태어난 동생 때문에 예상되는 불이익을 정확하게 계산할 줄 안다.
부모의 경우는 어떤가. 자식이 부모가 죽는 꿈을 꿀 때는 대개 자기와 성이 같은 쪽이 죽는 꿈을 꾼다. 아들은 아버지가 죽는 꿈을 꾸고 딸은 엄마가 죽는 꿈을 꾼다. 이것은 어린 시절 경쟁 의식을 느꼈기 때문이다. 어린 남자아이는 엄마를 독차지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아버지라는 존재 때문에 그럴 수가 없다. 남자아이는 아버지가 사라지기를 바란다. 불가피한 운명으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는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 오이디푸스는 모든 남자아이가 한번쯤 꿈꿔본 모습이다. 반면 여자아이는 아버지에게 끌리며 엄마를 경쟁자로 여긴다.
혈연이 죽는 꿈은 어떻게 검열을 피할 수 있었을까?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 부모가 죽기를 바라는 소원이 있을 리 만무하다고 보기 때문에 아예 검열의 관심조차 끌지 못했을 것이다. 고대의 법에 아버지 살해에 대한 처벌 규정이 없는 것과 비슷하다.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어서 고려의 대상에서 아예 제외된 것이다. 둘째 낮에 소중한 사람을 염려했을 수 있다. 이 염려는 앞서 말한 소원을 등에 업고 꿈에 들어오며, 한편 소원은 염려 뒤로 모습을 감추고 나타날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낮에 걱정을 했기 때문에 그 걱정의 연장선에서 밤에도 꿈을 꾼 거라고 여긴다.
3. 꿈은 어떻게 만들어지나
꿈은 이중 구조라고 말했다. 이제 우리는 은폐된 꿈사고가 꿈내용으로 변장하기 위해 동원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규명해야 한다. 어떤 과정을 통해 꿈사고가 꿈내용으로 변형되는지 물어야 한다.
첫째로, 꿈은 ‘압축’된다. 꿈사고는 풍부하고 복잡하지만 꿈내용은 짧고 간결하며 빈약하다. 꿈사고 중에서 대부분은 생략되고 최소한의 내용이 꿈내용으로 등장한다.
둘째로, 꿈은 ‘전위’된다. 꿈사고가 정말로 겨냥하는 대상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엉뚱한 대상이 등장한다. 꿈사고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꿈내용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요소로 등장한다. 꿈을 이루는 요소들의 상대적 비중이 꿈사고에서와는 다르게 처리된다. 하나의 생각이나 경험과 관련된 감정이 원래의 자리에서 떨어져나와 다른 생각이나 경험에 붙어버린다. 직장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던 사람이 집으로 돌아와 고양이를 발로 걷어차는 것은 직장에서 표현될 수 없었던 분노가 엉뚱한 대상을 향해 표출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자연스럽게 나와야 할 감정이 전혀 생기지 않는 경우도 있다. 감정이 사건과 분리되는 것이다.
셋째로, 꿈은 ‘시각적 묘사’를 선호한다. 같은 값이면 추상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구체적으로 묘사하기를 좋아한다. 가령 논문의 매끄럽지 못한 부분을 고쳐야겠다는 내 생각은 내가 나무 토막을 대패질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어떤 문제에 관한 사고의 끈을 놓쳐버렸다는 내 생각은 마지막 몇 줄이 빠져 있는 조판으로 나타난다.
넷째로, 꿈에서는 ‘2차 가공’이 이뤄진다. 갈피를 못 잡겠는 꿈들도 많지만 조리정연하고 논리적으로 보이는 꿈도 적지 않다. 이것은 꿈 속에서 가공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꿈에서 깨어나 해석을 하기 전에 이미 해석이 가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마치 누더기를 깁듯 부조리한 꿈의 빈 틈을 메꿔나간다. 우리는 고통이나 슬픔을 느끼면서 이것은 꿈일 뿐이야 하는 생각을 곧잘 하는데 이것도 이미 허용한 꿈에 의해 허를 찔렸다고 느끼는 검열이 뒤늦게 덧붙이는 2차 가공의 일종이다.
이차 가공은 말 그대로 꿈이 만들어지는 긴 과정의 마지막 단계에서 일어난다. 뿔뿔이 흩어진 생각과 감정을 모아서 이야기를 엮어 초고를 완성한 작가가 다시 한번 읽어보면서 첨삭가감을 하는 것처럼 마음도 잠에서 깨어나기 전에 각성 상태의 이성적 논리를 다분히 의식하면서 꿈내용들의 논리적 고리를 만들어 꿈의 줄거리를 엮어간다. 나중에 덧붙여지는 것이므로 이 논리적 고리가 가장 먼저 망각된다. 꿈을 기억하기 어려운 건 그래서다.
환자에게 꿈 이야기를 다시 한번 들려달라고 부탁하면 똑같은 말로 표현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표현이 달라지는 부분이야말로 꿈 위장이 실패한 곳이다.
4. 꿈 해석
꿈 해석은 조각 그림 맞추기와 비슷하다. 꿈을 만들어내는 꿈 사고들은 논리적 인과 관계에 따라서 배열되는 것이 아니라 한 자리에 그냥 같이 놓인다. 꿈은 논리적 관계를 묘사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 꿈은 꿈 사고의 알맹이만을 받아들여 가공한다. 꿈 작업이 파괴한 관계를 되살리는 것은 해석자의 몫이다.
꿈 속의 심리적 과정은 깨어있을 때의 심리적 과정과 다르다. 깨어있을 때는 우리의 감각으로 들어온 지각 내용들이 앞으로 ‘진행’하여 사고를 만들어낸다. 꿈 속에서는 반대다. 무의식 속의 꿈사고가 자꾸만 자신을 낳았던 원래의 감각으로 ‘퇴행’하려 한다. 깨어있을 때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감각이 워낙 많아서 퇴행 과정이 원활하게 이뤄질 수 없다. 하지만 수면 중에는 이것이 가능해진다. 꿈사고는 원래의 감각 원료로 해체된다. 고향을 찾아간다. 꿈은 시각 형상으로 바뀐 사고다. 억제됐거나 무의식 속의 기억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고만 이런 변화를 겪는다.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퇴행은 무의식 속의 사고가 정상적 경로를 통해 의식에 진입하는 것을 막으려는 저항의 산물이며 강한 감각성을 지닌 기억들이 무의식 속의 사고를 빨아들이는 과정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더 큰 맥락에서 보았을 때 퇴행은 인류의 태고적 유산과 정신적 근원을 탐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 앞에 열어준다.
그 정신적 근원은 꿈에서 상징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꿈에도 상징은 등장한다. 꿈에 나오는 상징의 대부분은 성적 상징이다. 하지만 그 상징은 꿈의 전유물이 아니라 미술, 문학, 언어와 공유되는 상징이다. 개인의 무의식 속에는 그 사람만의 체험에 의해 만들어진 그물망처럼 복잡한 세계가 있다. 상징은 그 중 극히 일부분만을 드러낼 뿐이다. 그 세계에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고정되지 않고 사방으로 뻗어가는 자유연상의 길뿐이다.
<“꿈의 해석(Die Traumdeutung)”에서 일부요약 발췌, 지그문트 프로이트 지음>
▣ 더 깊이있게 알기 위하여
프로이트처럼 찬반 양론의 극단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 사상가도 흔치 않다. 긍정적 측면은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는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는 것이다. 흔히들 프로이트를 무의식을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사람이 의식하지 못하는 세계가 있다는 것은 옛날 사람들도 알고 있었다. 프로이트의 혁명성은 무의식이 나도 모르게 나를 ‘억압’한다고 주장한 데 있다. 무의식 속의 억압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프로이트는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는 새로운 체계를 제시했다. 그래서 인간 행동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확대했다. 이 의미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람의 행동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무의식이 나도 모르게 나를 '억압'한다
나는 슈퍼마켓의 계산대에서 왜 돈을 지불할까? 음식을 구입해서 먹기 위해서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소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행동한다. 이 의식되는 소망이 돈의 지불이라는 의식되는 행위의 동기인 셈이다. 동기는 행동을 낳는 내면의 심리 상태다. 우리는 행동을 낳은 동기가 있을 때 그 행동을 합리적으로 여긴다.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하는 동기를 대개 안다. 자기의식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물은 그렇지 않다. 행성은 자신이 움직이는 이유를 모른다.
프로이트의 심리학에 깃들어 있는 혁명적 요소는 동기의 존재와 동기의 인식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분리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행동을 유발하는 동기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이다. 꿈은 무의미하고 우발적이고 목적이 없어 보인다. 이렇다 할 동기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겉보기에만 그렇다고 말한다. 동기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주인이 모르는 동기다. 꿈을 해석한다는 것은 무의식 속의 동기를 찾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프로이트는 동기에 토대를 둔 설명의 범위를 혁명적으로 확대시켰다. 무의식을 설명권 안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프로이트가 사람들에게 주는 매력은 이런 광범위한 설명력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프로이트에 거부감을 갖는 사람도 많다. 프로이트의 설명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가령 칼 포퍼는 프로이트가 하는 말은 반증 가능성을 원천 봉쇄한다고 비판한다. 포퍼에 따르면 어떤 말이 참이기 위해서는, 이러저러한 조건이 성립한다면 그 말은 거짓이 된다고 밝힐 수 있어야 한다. 즉 반증의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 자기를 객관적 조건 속에 노출시켜야 한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그러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꿈은 소원 성취라는 명제에 대해 어떤 환자가 불쾌한 꿈을 소개하면서 반론을 폈을 때 프로이트는 당신은 내 말이 틀리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런 꿈을 꾼 것이고 그건 결국 소원 성취인 셈이라고 했다. 그래서 프로이트의 비판가들은 언제나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하는 프로이트의 이론은 과학이 아니라고 말한다.
원숭이의 무의식 속에서도 억압이 이뤄지나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전제가 되면서 또 일반인에게 가장 널리 수용된 요소는 무의식의 억압이다. 프로이트의 이론이 가장 박대를 당하는 미국에서도 어린 시절에 겪은 너무나 충격적이고 고통스러운 기억은 무의식 속에서 억압된다고 하는 프로이트의 주장은 폭넓게 수용됐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 성적으로 학대를 당했다며 친부모를 고소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심심치않게 화제에 오르내린다. 하지만 개나 원숭이 같은 동물도 꿈을 꾼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지면서 많은 연구자들은 억압에 바탕을 둔 프로이트의 꿈이론에 의문을 제기한다. 프로이트는 꿈은 무의식에 의해 억압돼 있던 유년기의 경험이 위장하고 나타나는 것이라고 설명하는데 그럼 개나 원숭이의 무의식 속에서도 억압이 이뤄지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현대의 정신의학계에서 점점 대세로 자리잡은 약물 치료에 맞서서 심리 치료의 중요한 축을 맡아왔다. 무의식의 막강한 영향력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인간을 왜소한 존재로 격하시키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처럼 인간의 주체적 역량을 신뢰한 치료 기법도 드물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은 자기 무의식에서 억압당해온 것을 인식함으로써 해방될 수 있다고 프로이트는 믿었다. 과정은 더디더라도 그것이 진정한 치료라고 생각했다. 프로이트는 ‘인식’의 힘을 믿었고 ‘말’의 힘을 믿었다. 그는 인문주의자요, 계몽주의자였다.
▣ 프로이트의 생애와 작품
1856 오스트리아 모라비아 지방에서 출생
1860 빈으로 이주
1873 빈 의과대학 진학
1881 의대 졸업
1882-85 빈 종합병원에서 뇌해부학 연구
1885-86 파리에서 샤르코의 지도 아래 히스테리와 최면을 연구
1886 마르타 베르나이스와 결혼. 빈에서 개업
환자를 돌보면서 차츰 신경생리학에서 정신병리학으로 관심을 돌림
1888 브로이어를 따라 히스테리 치료에 최면술을 사용하기 시작
얼마 뒤 자유연상기법을 고안
1895 『히스테리 연구』출간
1900 『꿈의 해석』출간
1901 『일상 생활의 정신병리학』출간
1908 제1회 국제정신분석학회 개최
1909 융, 아들러와 함께 미국 강연 여행
1911 아들러와 결별
1912 정신분석학을 인류학에 응용한 『토템과 타부』출간
1914 융, 정신분석학회 탈퇴
1920 『쾌락 원칙을 넘어서』출간
1923 암 발병
1930 파괴 본능을 다룬 『문명 속의 불만』출간
1933 히틀러 정권의 프로이트 저서 공개 소각
1938 히틀러 오스트리아 침공. 빈을 떠나 런던으로 이주
1939 런던에서 사망. 향년 83세
<프로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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