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자료

오묘함!

[중산] 2011. 7. 14. 18:09

 

성공적인 인생을 가는 법 - 큰 도에 통달하라

 

 

진정한 도는 영원한 변화이다

노자는 말할 수 있는 도는 영원불변의 도가 아니며, 묘사할 수 있는 형태는 영원불변의 형태가 아니라 했다. 천지만물은 무형으로부터 와서 유형 속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사물은 늘 무형의 상태로 끊임없이 변화하며, 동시에 유형의 상태로 창조의 결과를 나타낸다. 유형과 무형은 이름만 다를 뿐 동일한 사물의 두 가지 모습이다. 이 둘의 관계는 매우 현묘하여 상호 간 전화(轉化)로 모든 사물의 변화 발전의 근원을 이룬다. 여기서 인용한 글은 『도덕경』 전체의 머리말이라 할 수 있으니, 이를 이해하면 각 편을 여는 열쇠를 쥔 셈이다.

 

 

노자 시대에는 에 대한 인식을 가장 위대한 발견 중 하나로 보았다. 그렇다면 는 도대체 무엇인가? 노자는 이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도덕경』에서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묘사했다. 보려 해도 보이지 않으니 이(夷)라 하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으니 희(希)라 하며, 잡으려 해도 잡지 못하니 미(微)라 한다. 요컨대 는 형태가 없고 성질이 없어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고 심지어 느낄 수도 없지만, 오히려 끊임없이 작용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는 현대철학에서 말하는 규율이며 노자가 말하는 도에 관한 귀납은 현대인의 규율에 관한 정의와 정확히 일치한다. 여기서 말한 규율은 사물 사이의 본질적이고 필연적인 관계로, 사물이 발전하는 추세를 결정한다. 또한 필연성, 보편성과 안정성을 지니며 사람의 의지에 의해 바뀌거나 옮겨가지 않는다. 그러나 규율에 대해 사람들은 늘 소극적이고 피동적이지만은 않다. 규율을 인식하거나 발견하고 이를 실천에 옮길 수 있다.

 

 

노자는 의 개념을 제기함과 동시에 이름(名), 이름이 있음(有名), 이름이 없음(無名) 등의 개념을 제시했다. 이름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은 어떤 사물을 관찰하고 인식한 후 보통 이름을 짓는데, 때로는 이름을 채 짓기도 전에, 혹은 적당한 이름을 생각해내기도 전에 대용명(代用名)이 붙기도 한다. 예컨대 무명산(無名山), 미지수 등도 이름의 하나가 되었다. 노자가 말한 이름은 사물이 이미 드러난 형태를 가리키는 말로, 이름이 있음은 형태가 있는 것을, 이름이 없음은 형태가 없는 것을 각각 의미하는데, 유형과 무형은 서로 전화(轉化)하며 사물의 영원한 발전과 상대적 정지의 이중적 특징을 이룬다. 이는 현대철학의 설명과도 완전히 일치한다. 한편 안타깝게도 노자와 동시대를 산 사람, 나아가 후대 학자들의 인식 수준은 노자의 경지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형태가 없고 성질이 없는 것이 어떻게 우주 사이의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는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체가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은데 이렇게 큰 신통력이 어디에서 올까?

 

 

사람들이 저마다의 인식 수준에 따라 『도덕경』을 읽으니 수많은 이견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리고 『도덕경』에 관한 여러 해설은 무수한 학파를 파생시켰는데, 그 내용을 보면 종교학, 철학, 문학, 미학, 의학, 무학, 군사학, 사회학, 윤리학, 천문학, 양생학 등이 있다. 이들은 중국 특유의 고전철학 체계를 이루었는데, 때문에 사람들은 『도덕경』을 존경의 의미로 만경지왕(萬經之王), 백과전서라 부른다. 부정적인 면에서 보자면, 이러한 현상 때문에 『도덕경』을 잘못 이해하여 중국 학술계가 실제적이지 못하고 견강부회하는 문화 특성을 형성했다. 반대로 긍정적인 면에서 보자면, 이로써 사람들의 혁신적인 영감을 깨우고 탐구하고자 하는 열정에 불을 붙였다. 그렇다면 이득이 큰가, 폐단이 큰가?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그러나 노자의 원래 취지는 규율을 존중하고 발견하고 이용하도록 권고하는 데 있다. 이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이기도 하다. 한편 규율을 발견함을 두고 선인들은 도를 깨우친다고 했고, 현대인은 진리를 이해한다고 말하는데, 표현은 달라도 의미는 같다. 그러나 노자는 깨달음에 찬물을 끼얹는 듯한 말을 던졌다. 말할 수 있는 도는 항상 그러한 도는 아니고 이름이라 할 수 있는 이름은 항상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즉 당신이 깨달은 도는 결코 영원히 변치 않는 도가 아니고, 당신이 말한 진리는 결코 항상 이치에 맞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말할 수 있는 도는 항상 그러한 도는 아니다는 부분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신비로운 해석을 내놓는데, 뜬구름 잡는 느낌이다. 일반적으로는 도란 말할 수 없는 것이며 입 밖에 나오면 틀린 것이라 이해한다. 깨달을 수 있을 뿐 말로 전하기 어렵다는 것은 중국의 문인, 학자들이 보편적으로 인정하고 상용하는 표현방식이다. 이는 매우 예술화된 표현이지만 과학적인 방식은 아니며 자신의 무지를 해명하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사물이든 당신이 진정으로 깨달았다면 반드시 완전하게 말해낼 수 있다. 만일 말로 전하기 어렵다면 완벽하게 깨닫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노자가 말한 도라 말할 수 있는 것은 말로 전하는 것뿐 아니라, 마음으로의 깨달음도 포함한다. 만일 진정한 도를 깨달았다면 말할 수 없을 것이 없다. 관건은 진정한 도를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이 없으며, 당신이 깨달은 것은 다만 도의 부스러기일 뿐이고 시간이 흐르면 쓰레기 더미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도를 추구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 아닌가? 규율을 발견하는 것은 노력만 들 뿐 아무 효용이 없는 일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노자는 늘 변치 않는 진정한 도를 깨달을 수 없다고 했을 뿐, 도를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고는 하지 않았다. 도리어 도를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규율에 따라 일해야 한다고 사람들을 일깨웠다. 이 둘은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세상에는 진정한 도가 과연 존재할까? 노자는 말했다. 존재한다! 늘 무심하면 그 오묘함을 보게 되고, 늘 있고자 하면 그 껍데기를 보게 된다는 말은 세상에 유일한 도는 영원불변의 변화임을 말해준다. 변화란 무엇인가? 알 수 없다. 노자는 말했지만 말하지 않은 것과 같으니, 역시 도는 말로 할 수 없는 것이라! <“왼손에는 명상록, 오른손에는 도덕경을 들어라”에서 극히 일부 요약, 후웨이홍 지음, 라이온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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