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서양철학을 대표하는 34명 철학자들의 삶과 사상을 그야말로 에스프레소 커피의 맛처럼 짧고 강하게 압축해놓은 책이다. 2,500년 서양철학의 대표자들을 다루다 보니 자연스럽게 서양철학의 흐름을 읽는다는 느낌도 강하다. 이들 철학자들도 약점 많은 보통 사람들처럼 한 세상 살다가 허무하게 가버린 사람들이니만큼 그들의 삶의 에피소드 또한 약점도 많고 인간적이다. 원래 말발이 센 사람들이라 욕발도 그만큼 강했고, 서로를 향해 퍼붓는 욕설도 철학적이고 현학적이다. 그 밖에 많은 철학자들이 엉뚱한 괴짜 천재들이라는 점까지 합쳐서 그들의 삶의 이야기 부분은 이따금 정말로 웃긴다.
우리의 삶은 길다고 해도 짧기만 한데 세상은 한없이 어지럽다. 잠깐만 생각해도 물음은 끝없이 이어지고 답변할 수 없는 엄청난 의문 앞에서 너무나 작은 존재인 나는 주체할 수 없는 어지럼증을 느낀다. 다른 한편 우리는 이따금 자연의 경이로운 모습에 큰 경탄을 느끼기도 한다. 누구라도 체험해본 적이 있는 이런 질문과 경탄들은 곧바로 철학의 주제로 이어지는 길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질문이 나타나면 깊이 따지고 생각하는 것을 골치 아프게 여기고 슬쩍 외면해버린다. 하지만 살면서 어쩔 수 없이 우리에게 닥쳐오는 평범한 물음의 끝을 내려놓지 않고 계속 생각한다면 그것은 곧 ‘철학’으로 통한다. 철학이란 이런 물음을 포기하지 않고 그에 대한 답변을 계속 찾아보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부자가 되는 것이 모든 사람의 꿈이 되어버린 시대에 웬 철학?” 하고 누군가 묻는다면 별로 할 말이 없다. 그러나 분명히 철학자들은 무상한 존재인 인간의 행복과 인간에게 정말로 좋은 것(善)이 무엇인가 하는 것도 탐구한 사람들이다. 어쨌든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정말 행복이라는 걸 느낄 수 있고, 지금도 잔뜩 수지맞은, 그래서 엄청 부자가 된 느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어지러워도 한동안 버텨나갈 에너지를 다시 얻을 것이다....(요약)
철학의 탄생 혹은 탈레스
나이가 들어 삶의 종말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자기 삶의 시작부분을 돌아보는 고요한 순간이 있을 것이다. 철학에도 그런 일이 생긴다. 철학은 2,500살이나 되었으니까. 오늘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철학은 곧 죽어버릴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그리고 철학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다루는 학문이 지치고 낡아서 약간 덜거덕거린다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그래서 과거로 돌아가 철학이 아직 신선하고 젊은 힘이 존재하던 그 시작의 시간을 알아보고 싶다는 욕구가 생겨난다. 하지만 그 탄생의 순간을 알아내려는 노력은 당혹스러움으로 바뀌게 된다. 정신적 사건을 관장하는 관청 같은 것이 없으니 아무도 철학이 탄생한 날짜를 기록해두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그 시작은 옛 시대의 어둠 속에 파묻혀 있다.
탈레스, 2,500년 전에 철학을 시작하다: 오랜 전통에 따르면 철학은 고대 그리스에 속한 소아시아 지역(오늘날 터키)의 상업도시인 밀레토스 출신의 영리한 남자 탈레스(Thales)와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한다. 기원전 6세기에 밀레토스에 살았던 이 사람이 모든 인간들 중 처음으로 철학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에 대해서 학자들은 모두 한 목소리만 내는 것은 아니다. 일부 사람들은 그보다 더 일찍 활동한 그리스 시인들에게서도 이미 철학적 사유를 찾아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헤시오도스나 심지어는 호메로스까지도 철학의 시조로 삼는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 그리스 민족이 아직 역사에 등장하기 이전 동방의 민족들 사이에 이미 일종의 철학이 존재했었다고 주장한다.
처음으로 철학의 역사를 서술한 저 위대한 아리스토텔레스도 그와 비슷하게 생각했다. 학문과 철학이란 외적인 필요성이 어느 정도 충족되고 사람들이 그 밖의 일에 관심을 돌릴 여유가 생겼을 때 비로소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옛날 이집트 사제들이 여기 해당한다. 그래서 이들은 수학과 천문학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본래 의미의 철학은 그리스 사람들과 더불어, 부유한 도시 밀레토스의 큰 상인이 누릴 수 있었던 여유에서 시작되었다. 그렇게 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이후로 사람들이 철학의 시작이라고 여기는 인물에 도달했다. 밀레토스의 철학자 탈레스가 그 사람이다.
지혜로운 사람, 세계의 근원을 묻다: 현대의 역사가 한 사람은 철학이 탄생한 시간을 정확하게 제시했다. “그리스 사람들의 철학은 기원전 585년 5월 28일에 시작되었다.” 이것이 바로 탈레스가 예언했던 일식이 일어난 날짜이기 때문이다. 물론 철학이 태양이 어두워지는 것과 대체 무슨 상관이 있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철학의 역사가 밝아지는 것(계몽)의 결과가 아니라 어두워지는 것(일식)의 결과라면 또 모르지만 말이다. 그는 물건들이 아니라 물건들의 본질을 문제로 삼았던 것이다. 그는 이 세계에 아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모든 것이 정말로는 무엇인지를 탐색하려고 했다. 그러니까 산, 짐승, 식물, 바람, 별, 인간, 인간의 행동과 사유 등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들이 실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였다. 탈레스는 ‘이 모든 것은 어디서 생겨난 것인가?’ 하고 묻는다.
그가 스스로 그렇게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물음들이 탈레스의 핵심 질문이었다. 그리고 그가 처음으로 이런 질문을 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가 철학을 시작한 사람이라고 여겨진다. 본질과 바탕에 대해 묻는 것이 오늘날까지 철학의 핵심적인 관심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탈레스가 이 질문에 대해 내놓은 답변은 아주 이상하다. 그는 이 모든 것의 기원이 물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뭐라고? 우리 눈앞에 온갖 다양한 형태로 펼쳐진 이 모든 것들, 산과 별과 짐승과 우리 자신과 우리 속에 깃들어 있는 정신 등 이 모든 것이 물에서 나왔다고? 가장 깊은 본질이 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러한 그의 핵심적인 사유를 놓고 보면 우리는 탈레스를 물질주의자라고 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신화가 힘을 잃으면서 철학이 시작되다: 철학은 처음 시작할 때 신화에게서 무엇을 넘겨받았을까? 탈레스가 수수께끼 같은 말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세계가 깊이를 지닌다는 것이다. 그리스 사람들의 신화를 신神이라 불리는 우화적 인물이 등장하는 재미있는 이야기라고만 생각한다면 너무나 표피적인 이해다. 그리스 사람들이 자기들의 신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현실의 배후에 감추어진 깊이를 뜻하는 것이었다. 세계의 모든 영역을 휩쓸고 지나가는 투쟁의 현실을 체험하고 그들은 거기에 ‘아레스(Ares, 전쟁의 신)’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낮의 미적인 고요함을 체험하고 거기에 ‘판(Pan, 정오의 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로써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현실의 모든 것은 거룩한 것에 바탕을 두고 있다. 거룩한 것이 거기 있음이야말로 현실에서 본래 현실적인 것이다.
이제 최초의 철학이 시작되었다. 철학은 신화가 직접적인 방식으로 담고 있는 내용을 넘겨받을 수 없었다. 철학은 종교적 표상들이 의심스럽게 되면서 인간이 직접 묻고 직접 답변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던 시대에 시작되었다. 그러면서도 철학은 신화적·종교적 지식에서 참된 것이라고 생각되어온 것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철학은, 현실의 모든 것이 앞면만 지닌 것이 아니라 배후에 더욱 깊은 것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이야말로 전해 내려오는 ‘참’임을 발견했다. 그 이후로 배후에 숨어 있는 더욱 깊은 원칙을 탐색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적 물음의 정열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철학은 처음과 다름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철학의 에스프레소”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빌헬름 바이셰델 지음, 역자 안인희박사, 프라하>
▣ 저자 빌헬름 바이셰델
(1905~1975). 베를린 자유대학교 철학 정교수로 일하다가 1970년에 은퇴했고, 임마누엘 칸트의 역사비평 판본(板本)의 발행인으로 이름을 남겼다. 주요 저서로 『철학자들의 신(Der Gott der Philosophen』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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