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가 진정 두려워하는 것
우리가 지금 탐구하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법. 즉 가족, 명성, 개성, 예금잔고, 식욕 등을 잃어버리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이다. 두려움은 양심에서 생긴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양심을 만들어내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조건들이므로 양심 또한 이미 알고 있는 결과물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미 알고 있는 것과의 관계에서처럼 어떤 지속성을 갖거나 생각을 품는 것, 견해를 갖는 것을 우리는 인식이라고 한다. 우리는 고통을 두려워한다. 신체적인 고통은 신경의 반응일 뿐이지만 정신적인 고통은 나를 만족시키는 것들에 집착할 때 생긴다.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내게서 그것들을 앗아가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고통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심리적인 축적물은 흐트러지지 않는 한 우리를 마음의 고통으로부터 보호해준다. 우리는 누군가가 흐트러버릴까 봐 두려워한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이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고통을 피하고 슬픔을 막기위해 우리 스스로가 끌어 모은 신체적 혹은 심리적 축적물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슬픔은 마음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뭔가를 축적하는 바로 이 과정 속에서 생겨난다.
고통을 피하는데 지식이 도움을 주기도 한다. 의학적인 지식이 신체적인 고통을 막는데 도움이 되는 것처럼, 믿음은 마음의 고통을 피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믿음의 실재를 입증해주는 구체적인 증거나 완벽한 지식이 없으면서도 믿음을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한다..
2.죽을 줄 아는 자만이 스스로를 재생시킬 수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영적인 실체는 분명히 마음의 장 안에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럼 ‘나’도 영적인 실체일까? 영적인 실체라면, ‘나’는 모든 시간을 초월해야 하므로 다시 태어날 수도 없고 지속될 수도 없어야 한다. 영적인 실체에 대해서는 우리의 사고로 생각할 수 없다. 생각은 시간의 한계 안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은 어제로부터 비롯되는 지속적인 움직임, 과거의 반응이다. 그러므로 생각은 근본적으로 시간의 산물이다. 우리의 사고로 ‘나’에 대해 생각 할 수 있다면 ‘나’는 시간의 일부이다. 따라서 ‘나’는 시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므로 영적인 실체가 아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나’나 ‘너’는 생각의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육체적인 몸과 별개로 지속되는 이 생각의 작용이 다시 태어 날 수 있는지, 육체적인 몸의 형태로 환생할 수 있는지 알고 싶어 한다.
자, 이제 더 깊이 들어가 보자. 지속되는 것, 즉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는 그 실재를 발견할 수 있겠는가? 생각의 작용인 이 ‘나’라는 실체가 새로워 질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다면 생각을 소멸시켜야 한다. 지속되는 것은 본래 파괴적이기 때문이다. 지속성을 지닌 것은 결코 스스로 재생시킬 수 없다. 기억, 욕망, 경험을 통해서 생각이 지속되는 한 생각은 결코 스스로를 재생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지속성을 지닌 것은 결코 실재를 알 수 없다. 여러분은 아마 수없이 다시 태어 날 것이다. 하지만 실재를 알 수 없다. 죽는 것 만이, 소멸되는 것만이 스스로를 재생시킬 수 있다. 지속되는 것은 갱생과 재생이 불가능하다. 이것은 실제적인 사실이다. 그러므로 매일 죽어야만 재생도 갱생도 있을 수 잇다. 불멸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불멸은 죽음속에 있다. 하지만 이 때의 죽음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죽음이 아니라 ‘나’와 같은 것으로 동일시하는 이전의 결론, 기억, 경험의 소멸을 의미한다.
죽음을 맞이하려면 매일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고통, 외로움, 부여잡고 있는 관계, 생각, 습관을 버려야 한다. 가족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가족을 버리고, 새롭게 신선하고 젊은 사람이 되고 사회를 진정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사회를 버려야 한다. 이렇게 매일 죽지 않으면 죽음에 직면할 수 없다. 사랑도 죽을 때만 다가온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이에게는 사랑이 없다. 물론 습관적으로 동정심을 갖고 억지로 친절을 베풀거나 피상적으로 배려를 할 수는 있다. 하지만 두려움은 슬픔을 낳고 슬픔은 생각처럼 시간에 매여 있다. 슬픔을 소멸시키려면 살아가면서 죽음과 접촉을 해야 한다. 생기 있고 젊고 맑은 사람이 되어 사물이나 상황을 왜곡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도록 이름, 집, 재산, 주장을 버려야 한다. 이것이 바로 죽음의 순간에 일어나는 일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육체의 죽음이라는 제한적인 죽음만 경험한다. 유기체는 언제고 소멸되리라는 것을 논리적으로나 이성적으로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의 생명을 만들어내서 고통, 무감각, 늘어만 가는 문제, 어리석음으로 점철된 삶을 매일 살아간다. 그리고 이런 생명을 ‘영혼’이라 부르며 이어가고 싶어한다. 우리가 가장 신성한 것이라고 말하는 영혼은 바로 이런 것이다. 하지만 이 영혼은 우리 생각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므로 신성과는 전혀 무관하다. 그저 우리의 생명일 뿐이다! 우리는 매일 죽으면서 살아야 한다. 그래야만 삶과 접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으면 매 순간 소멸을 경험하게 되므로 재생도 가능 해진다. 그러면 미지의 것을 향해 문을 열어두게 된다. 실재는 미지의 것이다. 죽음도 미지의 것이다. 그렇지만 죽음을 아름다운 것으로 말하는 것, 내생에서도 나는 계속 존재할 것이므로 죽음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라는 식으로 온갖 터무니 없는 소리를 늘어 놓는 것은 진실하지 않다.
진실한 것은 죽음을 있는 그대로, 즉 소멸로 바라보는 것이다. 지속이 아닌 갱생, 재생을 가능케하는 소멸로 바라보는 것이다. 지속되는 것은 썩게 마련인 반면 스스로를 재생시킬 수 있는 힘을 지닌 것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3. 환생은 근본적으로 자기 본위적인 개념이다.
환생을 통해 불멸을 추구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자기 본위적인 것이므로 진실이 아니다. 불멸을 추구하는 것은 삶과 지성에 대항해서 자기 방어적인 반응을 지속하고 싶다는 또 다른 형태의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욕망은 결국 우리를 환영으로 인도 할 뿐이다. 중요한 것은 환생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현재 속에서 완전한 충족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런 충족은 우리의 마음과 정신이 더 이상 삶에 대항해서 자신을 보호하지 않을 때만 가능하다. 우리의 마음은 자기 방어 면에서 아주 교활하고 미묘하다. 그러므로 우리를 어리석게 만드는 자기 방어의 본질을 분명하게 깨달아야 한다. 이것은 곧 완전히 새롭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4. 과연 영혼이라는 것이 있을까?
죽음의 문제를 이해하려면 두려움이 없어야 한다. 내생, 불멸, 환생에 대해 다양한 이론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이 두려움 때문이다. 우리, 특히 동양인들은 환생, 재생, 갱생이 끊임없이 계속된다고 말한다. 소위 영혼이라는 것이 계속 이어진다는 것이다. 정말로 영혼이라는 것이 있을까?
우리는 그런 것이 있다고 싶어한다. 영혼이라는 것은 생각과 말을 넘어선 것이고 우리에게 위안을 주기 때문이다. 영혼은 영원하고 영적이며 결코 죽지 않는 어떤 것이다. 우리의 생각은 여기에 집착한다. 시간과 생각을 초월하는 어떤 것, 인간의 발명품이 아닌 것, 인간의 본성을 초월한 것, 교활한 마음이 조합해낸 것이 아닌 것, 이런 영혼이 정말로 있을까?
우리의 마음은 엄청난 불안과 혼란을 느낀다. 그리고 삶에서 영속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정말 아무것도 없다. 아내, 남편, 일과의 관계도. 그 어떤 것도 영속적이지 않다. 우리의 마음이 영속적인 어떤 것을 만들어낸 다음, 우리의 머리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므로 이 영혼은 여전히 시간의 장 안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내가 무언가에 대해 생각한다면 그것은 내 생각의 일부다. 그리고 내 생각은 시간, 경험, 지식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영혼도 시간의 장 안에 잇는 것이다. 영혼이 지속적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개념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 안에 희망이 있다는 이유 때문에 두려움에 사로잡힌 마음, 갈망하는 마음, 영속성을 통해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 확실성을 갈망하는 마음이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오늘을 살기위하여“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크리슈나무르티, 박윤정 옮김, 판미동>
지두 크리슈나무르티--1895~1986, 인도생. 달라이 라마가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사색가’라고 칭송 함. 그의 가르침에 아인슈타인의 친구이자 물리학자인 데이비드 봄, 세계적인 신화학자 조셉 캠벨, 영국의 문호 헉슬리, ‘20세기의 예언자’ 칼릴 지브란 등도 포함.
<씀바귀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