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에 대한 지혜_ 착해서 늘 손해만 본다고 투덜대는 너에게
‘착하다’라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다. 하나는 보편적 기준에서의 ‘올바름’과 ‘정의로움’을 의미한다. 또 하나는 상대적인 기준에서 ‘나에게 좋은 사람’이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나에게 좋은 사람’이란 어떤 의미일까? 냉정하게 말해, 자신의 이익이나 처지보다는 타인의 이익이나 처지를 배려하고 쉽게 양보해주는 사람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착한 것’은 ‘정의’와는 상관이 없다.
사실 누군가에게 착하다는 평을 듣기는 쉽다. 그의 이익을 위해 나의 이익을 얌전히 양보해주면 된다. 이렇게 상대적 의미의 착하다는 평가에는 ‘자신의 손해’라는 부분이 내포되어 있다. 그래서 너무 착하면 손해를 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것은 개인의 선택에 달린 것이므로 논쟁의 여지가 별로 없다. 그러나 ‘착하다’의 의미가 ‘올바름’과 ‘정의로움’일 때 ‘너무 착하면 손해’라는 명제는 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논쟁거리가 된다.
사적인 이익을 제외하고 누군가를 착하다고 평가할 때는 그 사람이 도덕적이고, 양심적이며, 정의롭고 이타적인 사람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손해를 본다는 것은 바로 도덕적이고, 양심적이며 정의롭고 이타적으로 사는 것이 ‘손해’라는 뜻이 된다. 뒤집어서 생각하면 착한 사람이 사는 그 사회가 부도덕하고 불공정하고 불법과 편법이 많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착하면 손해’라는 말에 대한 사람들의 공감도는 그 사회의 도덕 지수와 공정 지수를 측정하는 바로미터가 될 수 있다.
그럼 이제 ‘착하면 손해’라는 말을 우리 자신에게 던져보자. 우리는 저 말에 얼마나 공감하고 있는가. 아마 대부분이 저 말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심정적으로 동의할 것이다. 부도덕하고 불법적이고 이기적으로 살아도 보란 듯이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불의에 너그러워진다. 그래서 ‘착하면 손해’라는 말은 진실이 되어버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하는 게 최고라는 인식이 정의로 둔갑해 버린다. 그런데 이런 혼란이 현재에만 일어나는 문제일까? 아니다. 기원전, 아주 오래된 시대에도 정의와 불의에 대한 혼란은 있었다.
“불의를 저지르기보다는 불의를 당하는 편이 낫다.” -《고르기아스》469c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이 혼란에 대해 이와 같이 단호히 선언했다. 그는 악한 사람은 언제나 불행하지만, 선한 사람은 잘 속고 놀림을 당하더라도 절대로 고통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불의를 행하면서도 벌을 받지 않는 사람은 ‘위중한 병에 시달리면서도 치료를 원하지 않는 사람’과 같고 ‘아프다는 핑계로 치료를 거부하는 어린아이’와 같다며 그들을 동정했다. 권력과 불의의 핍박에 목숨을 걸고 대항한 철학자다운 생각이다.
비록 지금 당장은 인과응보의 쾌감을 느낄 수 없지만, 우리는 언젠간 불의가 단죄될 것이며 불의로 얻은 성공은 안전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범죄 속에는 어떠한 행복도 없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불의가 눈앞에 성공을 보장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그것을 행하는 데 망설이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불의가 응징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고, 그동안에 많은 사람이 피해를 본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문제점 때문에 칼리클레스(Callicles)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현실 감각은 결여한 채 지나치게 철학적 사유만 즐기는 이상론’이라고 맹비난했다.
“진짜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불의를 당하는 것이 불의를 저지르는 것보다 나쁘다. 이때 피해자는 모욕에 대해 자신을 지킬 수 없는 ‘노예’와 비교할 만하기 때문이다.” - 칼리클레스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불의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칼리클레스는 불의에 적극적으로 대항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의 주장이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불의에 대항하는 방식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불의에 대한 저항을 ‘정의로운 방식’으로 해야 한다고 했고 칼리클레스는 불의에 대한 저항을 ‘법’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은 언제나 정의롭게 집행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부분에서 소크라테스와 칼리클레스는 의견을 달리한다.
법의 존재 목적은 강자로부터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법을 정의이며 선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법의 존재 목적이 정의 구현이라는 것은 맞지만, 현실에선 약자를 보호하는 법이 불의를 저지른 강자를 보호하는 수단으로 악용되는 일이 많다. 때로는 법의 목적 자체가 약자가 아닌 강자를, 정의가 아닌 불의를 옹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법을 만들고 제정하는 사람들은 약자가 아니라 강자이기 때문이다. 그 속에는 불의를 통해 강자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법의 이런 속성을 잘 알기 때문에 철학자들은 약함이 미덕이고 힘이 악이라고 믿게 하려고 법이 발명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늘 하는 것이다.
<“스무 살에 만난 지혜가 평생을 먹여 살린다”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로랑스 드빌레르 지음, 역자 이주희님,명진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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