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고 온 시> 고은
그럴 수 있다면 정녕 그럴 수만 있다면
갓난아기로 돌아가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을 때가 왜 없으리
삶은 저 혼자서
늘 다음의 파도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렇다고 가던 길 돌아서지 말아야겠지
그동안 떠돈 세월의 조각들
여기저기 빨래처럼 펄럭이누나
가난할 때는 눈물마저 모자랐다
어느 밤은 사위어가는 화톳불에 추운 등 쪼이다가
허허롭게 돌아서서 가슴 쪼였다 또 어느 밤은
그저 어둠 속 온몸 다 얼어들며 덜덜덜 떨었다
수많은 내일들 오늘이 될 때마다
나는 곧잘 뒷자리의 손님이었다
저물녘 산들은 첩첩하고
가야 할 길 온 길보다 아득하더라
바람 불더라
바람 불더라
슬픔은 끝까지 팔고 사는 것이 아닐진대
저만치 등불 하나 그렇게 슬퍼하라
두고 온 것 무엇이 있으리요만
무엇인가 두고 온 듯
머물던 자리를 어서어서 털고 일어선다
물안개 걷히는 서해안 태안반도 끄트머리쯤인가
그것이 어느 시절 울부짖었던 넋인가 시인가
<길> 고은
길을 보면
나에게 부랴부랴 갈 데가 있다
신영리나 내리 마을을 보면
나에게 저 마을을 지나서 갈 데가 있다
그렇도다 마정리 에움길 하나에도
장호원 이백리 길도
나에게 그냥 잠들지 못하게 한다
길을 보면 나는 불가피하게 힘이 솟는다
나는 가야 한다 나는 가야 한다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 말아라
저 끝에서 길이 나라가 된다
그 나라에 가야 한다
한평생의 추가령지구대
그 험한 길 오가는 겨레 속에
내가 살아 있다 남북 삼천리 모든 길
나는 가야 한다
기필코 하나인 나라에 이르는 길이 있다
나는 가야 한다 나는 가야 한다
<아직 가지 않은 길> 고 은
이제 다 왔다고 말하지 말자
천리 만리 였건만
그동안 걸어온 길 보다
더 멀리 가야할 길이 있다
행여 날 저물어
하룻밤 잠든 짐승으로 새우고 나면
더 멀리 가야 할 길이 있다
그동안의 친구였던 외로움일지라도
어찌 그것이 외로움 뿐이었으랴
그것이야 말로 세상이었고
아직 가지 않은 길 그것이야 말로
어느 누구도 모르는 세상이리라
바람이 분다
나는 물 속에서 솟아올랐다
물 위의 허공을 보았다
파도더미 위의 허공
그 허공 위의 남빛 하늘을 보았다
나는 다시 물 속으로 내려왔다
모든 무한은 유한 안에서 나타난다
한 떨기 꽃처럼 오해처럼
아 내 작은 몸뚱어리가 품고 있는
나의 연장인 우주처럼
나는 바다에 익숙해진다
그렇게도 두렵던 곳이
나의 집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高銀, 호:파옹(波翁), 본명:고은태(高銀泰), 법명:일초(一超)
한국의 대표적인 참여시인. 본명은 고은태로 1933년 전북 군산에서 출생하였다. 1952년 20세의 나이로 입산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법명은 일초(一超)로 효봉선사의 상좌가 된 이래 10년간 참선과 방랑의 세월을 보내며 시작 활동을 하다가 1958년 『현대문학』에 시「봄밤의 말씀」「눈길」「천은사운」등을 추천받아 등단하였다. 1960년 첫 시집『피안감성』간행하였으며 1962년 환속하여 시인으로, 어두운 독재시대에 맞서는 재야운동가로서의 험난한 길을 걷기도 하였다. 초기 시는 주로 허무와 무상을 탐미적으로 노래한 반면 이후 어두운 시대상황과 맞물리면서 현실에 대한 치열한 참여의식과 역사의식을 표출하었다. 영웅주의에 물들지 않고 진솔한 삶의 내면을 드러내는 독특한 시 세계를 보여주었다.
진정한 리더란
진정한 리더는 한 사람이 다른 다수를 통솔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자기 자신을 지도해야 리더가 됩니다. 나는 나 자신만의 리더인, 바로 그런 리더가 되어야 합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석사학위를 따고, 박사학위를 따서 세상을 휘어잡아라? 그런 리더? 그것은 치사한 겁니다. 내가 다니는 대학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대학도 그러고 있습니다. 그러면 또 싸움질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자기 운명을 자기가 책임지는, 자기 자신의 삶을 지도할 수 있는 리더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겁니다. 작은 곳에서 작은 일을 하는 것이 전부 리더입니다. 고을을 통솔하고 나라를 통솔하는 것만 리더가 아닙니다. 자기 집, 자기 식구를 서로 평화롭게 만드는 힘이 전정한 리더십인 겁니다. 이런 리더십이 세상에 꽃피울 때 한여름 밤의 별빛 같은 눈동자가 뜨는 겁니다. 리더란 이런 것입니다.
시간에 대하여!
사실 시간이라는 것은 어리석은 것인지도 모른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간 속에는 현재가 없어요. 과거, 현재, 미래, 이것이 시간의 길이겠는데, 이 길에는 현재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미 현재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과거가 되어버리기 때문이죠. 참고로 그리스 철학에서는 존재를 얘기합니다. 그런데 동양에서는 행(行)을 이야기합니다. 변화하는 것, 움직이는 것, 모든 것은 움직입니다. 그래서 제행이라고 하죠. 하지만, 존재는 영원히 여기 있는 것입니다. 마모되고 부식되고 있는 거죠. 이것이 1만년 뒤에도 있을까요? 없죠. 쇠조차, 바위조차도 끊임없이 변합니다. 하물며 나약한 인간들은 얼마나 가겠습니까?
그런데 시간은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단둘이 있을 때는 참 행복하죠. 시간도 짧습니다. 그러나 병원에서 혈관주사라도 한번 맞아 봐요. 시간이 한참 느립니다. 시간은 주관에 의해서 규정되는 겁니다. 그런 겁니다. 시간은, 우리가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없어진 다음에는 시간은 없습니다. 인간에 의해서 시간이 비로소 규정되는 겁니다. 시간은 또 치유입니다. 오늘 아픔을 겪는다면, 지금은 아프지만 내일, 모레, 몇 년 뒤 10년 뒤에는 그 아픔이 없어져서 추억으로만 남습니다. 아픔 자체가 하나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바뀌죠. 이것이 치유입니다. 시간 속에는 치유가 있죠. 망각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현재를 유지하는 겁니다. 시간에는 오묘한 여러 가지 얼굴이 많이 있습니다. <글로벌 시대 자신만의 스펙을 디자인하라, 고은 외 지음, 아카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