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선비)의 아버지는 용연 마을의 지주인 정덕호의 일꾼이다. 선비의 아버지는 정덕호의 지시로 빚을 받으러 갔다가 오히려 소작인의 비참한 살림을 도와준 죄로 덕호에게 맞아 죽게 된다. 뒤이어 어머니마저 죽자 딸 선비는 정덕호의 집에서 몸종으로 지내게 되고, 정덕호의 꾀임에 빠져 순결을 잃고 그의 첩이 된다.
선비는 자신이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덕호의 집을 도망쳐 나와 자기처럼 덕호에게 순결을 잃고 서울로 간 간난이를 찾게 된다. 선비를 좋아하는 남자는 순진한 고향 청년 첫째와 서울 청년 신철이다. 첫째는 덕호에게 반항하다가 그의 술책으로 땅마저 빼앗기고 고향을 떠나게 되고, 신철은 덕호의 딸 옥점과 함께 놀러 왔다가 선비의 모습에 반하게 된다. 점차 선비에게 이끌리는 신철은 옥점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고 있음을 깨닫고 부모끼리의 결혼 약속을 어기고 가출하게 되는데…….(요약)
선비 주인 정덕호에게정조를빼앗기고그의첩이되었다가,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고향을 떠나 노동자로 변신하여 방적 공장에서 일하다가 폐결핵으로 죽음을 맞는다.
첫 째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자신의 땅을 갖고자 하는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 고향을 떠나 부두 노동자가 된다.
유신철 노동 운동으로 첫째를 의식화시키고 변화시키지만, 자신은 전향하는 나약한 지식인이다.
정덕호 지주에다 면장까지 하면서 농민을 착취하고 기만하는 인물이다.
용연 동네와 원소(怨沼) 전설
이 못은 언제 어떻게 생겼는지 물론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동네 농민들은 이러한 전설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이 전설을 유일한 자랑거리로 삼으며, 따라서 그들이 믿는 신조로 한다.
용연 동네는 우뚝 솟은 정덕호의 양기와집, 면역소 양철집, 주재소 양철집을 빼면 모두 농가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그 아래 푸른 못이 원소(怨沼)라는 못인데, 이 못이 있기 때문에 저 동네가 생겼으며, 저 앞 벌이 개간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동네의 개나 짐승까지도 이 물을 먹고 살아갔다고 한다. 이 못은 언제 어떻게 생겼는지 물론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이 동네 농민들은 이러한 전설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이 전설을 유일한 자랑거리로 삼으며, 따라서 그들이 믿는 신조였다.
선비의 아버지 김민수는 위인된 품이 몹시 도착하고 정직했다. 그러므로 정덕호에게몇십년동안부림을받았어도동전한잎축내지못하는그런위인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몸이 고달프더라도 덕호의 명령이라면 물불을 헤아리지 않고 덤벼들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김민수는정덕호의지시로함박눈이내리는와중에빚을받으러가게됐다. 눈길을 헤쳐 당도했지만, 민수는 너무나도 가난한 빚쟁이에게 오히려 “애들 밥 한 끼 해주!” 라고 말하며 돈을 쥐어주고 빈손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김민수가 자신의 돈을 가난한 빚쟁이에게 주었다는 말에 정덕호는 눈이 뒤집히며 들었던 산판(나무판)을 확 집어 던졌다. 산판은 민수의 양미간을 맞혔고, 정덕호는다시 민수를 발로 냅다 차버렸다. 정덕호에게 심하게 맞은 김민수는 며칠후 시름시름앓다 죽고말 았다. 김민수가 죽은 후로 삼년이 흘렀다. 며칠 동안 어머니가 가슴앓이 병으로 앓아누워서, 선비는 큰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어머니 곁에 꼭 마주앉아 있었다. 아픈 와중에도 어머니는 “너를 어서 임자를 맡겨야…… 헐, 헐 터인……”데 하면서 선비의 장래를 걱정했다.
그 때 싸리문이 열리면서 정덕호가 들어왔다. 덕호는 선비에게 오원짜리 지폐를 내밀면서, 내일 집에 들어왔다가 가라고 말했다. 덕호가 선비의 집에 들어선 바로 다음 선비의 둘도 없이 친했던 동무였지만, 지금은 정덕호의 작은댁이 된 간난이가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정덕호에게심한꾸지람을들은간난이는돌아가고, 선비는 간난이가 어째서 왔을까 하고 의문을 가졌다.
아직 날도 밝지 않은 새벽, 싸리문이 찌걱 하고 열리는 소리가 났다. 깜짝 놀란 모녀는 문 앞에 서 있는 남자가 첫째라는 것에 한층 놀랐다. 첫째는 “아주머니가 아프시다기에 저 소태나무 뿌리가 약이라 가져 왔수” 했다. 선비의 어머니는 첫째가 선비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그리고 선비도 첫째가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생각에 볼이 화끈 달아오르며 무서움이 온몸에 흠씬 끼쳤다.
며칠 후 선비 어머니는 마침내 세상을 뜨고 말았다. 덕호의 주선으로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선비는 정덕호의 집으로 옮겨가게 됐다. 그러던 어느날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는 정덕호의 딸 옥점이가 한 양복쟁이 남자와 고향집을 방문했다.
덕호네 넓은 뜰에는 장리쌀(봄에 꾸어진 곡식에 대하여 가을에 그 절반을 이자로 쳐 받는 변리 쌀)을 가지러 온 소작인들로 빽빽했다. 덕호는 한껏 거드름을 피운 후 사랑에서 장책과 붓을 들고 나와서, 농민들의 성명을 일일이 적어 놓고 그리고 몇 섬 몇 말 가져갈 것까지 꼭꼭 적어 놓았다. 그러나 정덕호가 내놓은 좁쌀은 쭉정이가 절반이었다. 이때까지 비록 장리쌀이나마 가져가게 된다는 기쁨에 잠겼던 농민들은 어디 가서 호소할 곳 없는 그런 애석하고도 억울함을 느꼈다.
첫째는 선비를 만나기 위해 정덕호의 집 앞에 한참이나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나 선비는 만나지 못하고, 첫째를 찾아다니던 이서방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이서방은 첫째가 어떤 계집을 생각해서 잠도 못 자고 다니는 것인가를 짐작하고 있었으나, 어떤 계집인지 꼭 알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 계집을 첫째에게서 알아가지고, 될 수 있는 대로 힘써 보려고 했다. 만일 저대로 첫째를 방치해 두면 첫째는 불일간에 무슨 병에 걸려들지 않으면 무슨 변이라도 낼 듯 싶었다.
신철이를 따라 몽금포에 내려가서 해수욕을 하고 올라온 옥점이는 오늘 아침차로 상경하겠다는 신철이를 만가지 권유로 겨우 붙들었다. 그때 선비가 빨래함지를 이고 부엌으로부터 나왔다. 신철이는 얼른 몸을 똑바로 가지고, 지나치는 그의 왼편 볼을 뚫어지도록 보았다. 그가 중대문을 넘어가는 신발 소리를 들으며, ‘빨래를 하러 가는 모양인데……’ 하고 생각할 때, 이상한 광채가 그의 눈가를 스쳐갔다. 신철이는 선비의 고운 자태, 눈, 등의 검은 점을 생각하며 ‘그와 말이나 해보았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선비에게 호감을 가지게 된 신철이는 옥점이에게 흥미를 잃어갔다. 처음에 기찻간에서 옥점이를 만날 때에는 다소의 흥미도 가졌지만, 불과 며칠이 지나지 못해 다만 잠시 데리고 놀 여자지, 오래 사귀어 놀 여자가 되지 못할 것을 곧 알았다. 그러나 그는 웬일인지 이 집을 떠나기 싫고, 이 동네를 떠나기 싫었다. 그래서 몽금포에 가서도 오래 있지 못하고 곧 올라왔던 것이다.
선비에 대한 신철이의 사랑을 깊어지고, 마침내 선비를 서울로 올라오게 하려면 자기가 옥점이를 잘 꾀면 쉽게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옥점이와 결혼까지 하고 싶은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그 교활한 성격! 더구나 미국 영화 배우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애교가 넘쳐흐르는 그 눈매! 길 가다 만난 자라도 단박에 홀릴 만한 그의 독특한 표정, 그것이 신철이로 하여금 더욱 싫증나게 했다.
순결을 잃는 선비와 고향을 떠나는 첫째
가을철 들면서부터 정덕호는읍의출입이잦아졌다. 그리고 안 입던 양복까지도 말쑥하게 입는 것을 가끔 볼 수가 있었다. 읍에 출입이 잦으면서부터 덕호는 간난이를 내어보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읍에 기생첩을 했다니 처녀 첩을 했다니……’ 하고 수군수군하는 말이 많아졌다. 그 바람에 옥점 어머니는 화가 치받쳐 집안에 붙어 있지 않고 남편의 뒤를 따라 역시 읍 출입이 잦아졌다.
옥점 어머니가 읍내에 나가 돌아오지 않던 어느날 밤, 정덕호가 유서방과 함께 귀가했다. 귀가한 정덕호는 선비에게“선비야 나 다리 좀 주물러 다우” 말했고, 선비는 내키지 않았지만 할 수 없이 다리를 주물렀다. 덕호에게 이불을 깔아주고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던 선비는 정덕호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덕호에게 물 한 잔을 갖다주자, 덕호는 선비에게 서울 가서 공부하고 싶지 하고 묻었다. 선비는 덕호의 갑작스런 제의에 당황해하면서 갑자기 첫째의 얼굴이 휙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한편 추수가 끝난 농민들은 지주인 덕호에게 땅을 빌린 값과 그에게 빌린 빚을 계산하고 있었다. 정덕호는 개똥이에게 빚이있음을 지적하고, 시세의 절반도 안 되는 가격을 매겨 개똥이가 일 년 동안 피땀흘려 경작한 쌀을 가져가려고 했다. 이에 화가 난 개똥이는 “이 벼만 가져 봐라!” 하고 호통을 쳤고, 분개했던 많은 농민들은 첫째를 따라 이에 동조했다.
다음날 개똥 어머니는 정덕호를찾아가빌었고, 그 덕분에 농민들은 주재소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풀려난 농민들은 다시 타작 마당에 나갔고, 그들은 다음과 같은 정덕호의 일장 훈시를 들었다. “어제만 하더라도 내가 곡식으로 차지한 것이 전혀 자네들을 위함에서 그렇게 한 게야. 자네들의 형편에 그 곡식을 갖다가 팔아서 돈으로 빚을 갚는다고 하세. 돈을 제때에 갚지도 못하게 될 뿐 아니라 그 곡식을 제값을 못 받고 더구나 꼭 적당한 시기에 팔지를 못해. 그러니 내가 곡식으로 차지하는 게여. 나야 손해가 되지마는, 왜 손해가 되느냐 하면 말이어, 이제 좀더 있으면 자네들이 지내보는 바와 같이 곡가가 내리는 것만은 뻔한 사실이 아닌가 응, 왜 그런 줄을 몰라주느냐 말이어, 나는 자네들을 친자식같이 아는데 자네들은 그것을 몰라준단 말이어. 어제 일만 하더라도 내가 아니고 딴사람이라면 자네들을 그냥 두겠나. 그러나 나는 자네들도 생각할 뿐만 아니라 자네들의 가족들은 생각하야 친히 순사부장에게 사정을 하다시피한 것을 자네들은 아는가 모르는가. 한 번 실수는 누구나 있는 것이니 이 다음부터는 주의들 해.”
정덕호의 말을 듣자 사람들은 갑자기 달라졌다. 어제는 이 타작마당에서 그들이 일심이 되었는데 겨우 하룻밤을 지나서 그들은 첫째를 원망했다. 첫째는 덕호에게서 욕먹은 것보다도, 순사에게 밤새워 매맞은 것보다도, 그들이 자기 하나를 둘러싸고 원망하는 데는 그만 울고 싶었다. 그리고 캄캄한 밤길을 혼자 걷는 듯한 적적함이 그를 싸고도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첫째는 이제 밭까지 떼이고 말았다. 밭까지 떼인 첫째에게 이서방은 “첫째야 너 그만 이 동네를 떠너라!” 하고 말했다. 이서방은 “떠나야 하지, 여기가 사람 사는 데냐……” 말 들으니, 서울이나 평양에는 공장이라는 것이 있어서, 우리같이 없는 사람들이 그곳에 들어가 돈 받고 일하며 살기 좋다더라, 너두 그런 곳에나 가보렴.“했다. 이 말을 들은 첫째는 아무 말 없이 달아났다. 이 서방은 기가 나서 쫓아갔다. 이제 떠나면 다시 볼지 말지 한 첫째! 그는 마지막으로 손이라도 잡아 보고 싶은 맘에 허둥지둥 동구 밖을 벗어났다. 그러나 첫째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 저 산등 위로 그믐달이 삐죽이 내밀었다.
덕호는 다시 선비에게 서울로 가서 공부하고 싶지 않느냐고 물었다. 선비는 학교에 가 공부할 생각에 들떠 있었다. 밤에 다시 돌아온 덕호는 다시 서울에 가서 공부하고 싶냐고 물으면서 선비의 순결을 빼앗아 버렸다. 덕호는 시뻘건 눈을 부릅뜨고 선비를 금방이라도 죽일 듯이 위협을 했다. 전날에 믿고 또 의지했던 덕호! 그리고 돌아가신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같이 그의 장래를 돌보아 주리라고 생각했던 이덕호가…… 불과 한 시간이 지나지 못해서 이렇게 무서운 덕호로 변할 줄이야 꿈 밖에나 상상했으랴! 선비는 그 무서운 덕호를 보지 않으려고 머리를 돌리며 눈을 감아 버렸다.
노동현장에 뛰어든 신철이와 덕호의 집을 떠나는 선비
신철이의 아버지는 “여기 늘 오는 옥점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하고 신철에게 묻었다. 그 순간 신철이는 전날 밤에 악을 쓰고 매달리는 옥점이를 사정없이 물리치고 나오던 때를 다시금 되풀이하며 양미간을 약간 찡그렸다. 신철이는 덕호와 아버지 사이에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있었음을 깨닫고 더욱 놀랐다. 동시에 덕호가 올라오면서 혹시 선비를 데리고 오지 않았냐? 하며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옥점이의 방에 당도한 신철이는 선비가 올라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옥점과의 결혼을 포기할 것을 결심했다. 집에 돌아온 신철이는 재산을 보고 옥점이와 결혼하라는 아버지의 말에 반발하고, 집을 나왔다.
집을 나온 신철이는 한 동무를 찾아가기로 했다. 그때 마침 신철은 자신이 찾아가던 동무를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나게 됐다. 그 동무의 집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동무 외에 두 사람이 자취를 하고 있었다. 한편 선비는 덕호에게 유린당한 후 몇 번이나 봇짐을 들어보다가 아무래도 덕호가 서 있을 것 같고, 그가 나가다가 길거리에서라도 만날 것 같아서 그만 봇짐을 놓고 한참이나 망설였다. 그리고 우선 밖에 누가 있지 않나 보려고 문밖을 나섰다.
그때 선비는 얼핏 생각이 났다. 그것은 간난이였다. 그가 덕호에게 유린을 받기 전만 하여도 간난이를 아주 몹쓸 여자로 알았지마는, 그가 한번 그리 된 후에는 웬일인지 꿈에도 간난이를 종종 만나 보고 서로 붙들고 울기까지 하곤 했다. 그리고 이렇게 나갈까 말까 하고 망설일 때마다 문득 그의 머리에는 간난이가 떠올랐다. 간난이를 생각한 선비는 간난이의 집에 들렀다가, 간난이의 편지를 얻게 됐다. 간난이는 서울로 먼저 올라간다고 했다.
옥점이와 옥점 어머니의 구박은 날로 심해지고, 마침내 옥점이는 “이 계집애 당장 나가라, 우리집에 이젠 못 있어.”라고 했다. 이에 선비는 자신이 나가야 할 것을 절실히 느꼈다. 그나마 믿었던 덕호까지도 시뻘건 거짓말을 하는 것을 들으니, 이젠 다시는 선비를 가까이하지 않고 내보내려는 심산인 것을 깨달았다. ‘잘되었다!’ 선비는 이렇게 속으로 생각하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다. 악이 치받쳐서 부들부들 떨릴 뿐이지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그는 봇짐 위에 칵 엎어지며 어서 밤 되기를 기다렸다.
그날 밤 선비는 봇짐을 옆에 끼고 덕호의 집에서 벗어났다. 사방은 먹칠을 한 듯이 캄캄했다. 그리고 낮에부터 쏟아질 줄 알았던 비는 쏟아지지 않고 바람만 슬슬 불기 시작했다. 선비는 읍으로 가는 신작로에 올라섰다. 선들선들한 바람이 그의 타는 볼 위에 후끈후끈 부딪치고 지나쳤다.
한편, 신철이는 밤송이 동무로부터 “자네 인천으로 가게 되었네, 오늘 저녁 차로나 내일 아침까지 곧 떠나게” 하는 지령을 받게 됐다. 신철이는 인천만 가면 그의 모든 비겁성을 확 풀어 던지고 아주 노동자의 씩씩한 참 동무가 되리라고 굳게 결심했다.
신철을 만나 의식화되는 첫째, 그리고 노동현실의 모순을 깨닫게 되는데
인천에 도착한 신철은 어느날 철수 동무가 갖다 준 잠방이 적삼을 입고 각반을 치고 지카다비(작업화)를 신고 부두 노동을 하게 되었다. “이 자식아! 빨리 가거라!”하는 십장의 호통소리에 신철이는 앞으로 나아갔다. 숨이 가빠 오고 가슴이 죄어 오고 어깨 위가 부서지는 것 같았다. 신철이는 죽을 힘을 다해 시멘트 포대에 볼을 꽉 붙이고는 비틀거렸다. 겨우 오십 간 가량이나 와서 쾅 하고 짐을 내려놨다.
힘들어하는 신철이에게 한 노동자가 “여부슈, 손으로 나르면 손이 아파서 못합니다. 당신 일 처음 해보는구리.” 하면서 조언을 한다. 이러한 노동을 하면서 신철이는 잉여노동의 착취를 생각하게 됐다. 그가 책상에서『자본론』을 통하여 읽던 잉여노동의 착취보다, 오늘 직접 당하는 잉여노동의 착취가 얼마나 무섭고 또 무게가 있는가를 깨달았다.
며칠을 앓은 신철이는 다시 노동현장에 나가 자신에게 조언을 했던 외눈까풀이 노동자를 만나게 됐다. 신철이 그 외눈까풀이 노동자의 이름을 묻자 그는 첫째라고 답하고, 다시 고향을 묻자 고향이 없다고 답했다. 첫째는 신철에게 “저, 저…… 어떻게 해야 법에 안 걸리우? 법에 안 걸리게 좀 가르쳐 주……”하고 부탁했다.
한편, 선비는 서울로 올라와 간난이와 함께 기거했다. 밤늦게 돌아온 간난이는 잠들었다가 깨어나는 선비를 보며 생긋 웃었다. 이틀 후 그 둘은 인천으로 내려가게 됐다. 우선 간난이와 선비는 공장에서 사귄 어떤 동무 집에서 있게 됐다. 그리고 그 동무의 주선으로 대동방적공장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경찰서에서 신원보증까지 싸게 맡게 됐다. 동시에 대동방적공장에서는 사숙을 허락지 않고 전 여공을 기숙사에 수용한다는 것이 철칙이 되어 있었다. 대동방적에 들어간 선비는 간난이의 도움으로 점차 노동현장의 부조리와 모순, 나아가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깨닫게 됐다. 첫째는 우연히 작업 중에 선비를 얼핏 보게 됐다. 자신이 본 사람이 선비인가 아닌가를 알고 싶었지만, 감독에게 제지당해 확인하지 못했다.
신철이가 처음 첫째를 만났을 때는 다만 순진한 노동자로 밖에 그의 눈에 비치지 않던 그가, 순진함이 도수를 지나 어찌 보면 바보 비슷하게 보이던 그가, 불과 몇 달이 지나지 못한 지금 보면 아주 딴 사람을 대한 듯이 되어 있었다. 첫째는 신철이가 건네준 격문 뭉텅이를 받아 걸으면서, 인간이란 그가 속하여 있는 계급을 명확히 알아야 하고, 동시에 인간사회의 역사적 발전을 위하여 투쟁하는 인간이야말로 참다운 인간이라는 신철의 말을 다시 한번 생각했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첫째를 순간적으로 지나치게 된 선비는 밤마다 첫째를 생각했다. 그리고 옛날에 그가 나물하러 잿들에 올라갔다가 첫째를 만나 싱아를 빼앗기고 울면서 내려오던 그때 일을 다시금 회상해 보곤 했다. 동시에 그의 어머니가 가슴을 앓아 돌아가실 때, 어느 새벽에 갖다 주던 소태나무 뿌리! 지금 생각하면 그때에 자기는 너무나 첫째를 몰라본 것 같았다. 지금 같으면 그 소태 뿌리가 얼마나 귀한 것이며 얼마나 고마운 것이랴! 첫째의 결백한 순정의 전부가 그 싱싱한, 그리고 아직은 흙이 마르지 않았던 그 소태 뿌리에 은연중에 들어 있던 것을 그는 몰랐다.
단 한번이라도 좋아! 그를 꼭 만나 볼 수가 없을까? 선비는 돌아누우며 한숨을 푹 쉬었다. 그의 뜨거운 숨결은 그의 볼에 따끈따끈하게 부딪쳤다. 그때 그는 씩씩하며 자기를 껴안아 주던 덕호가 떠올랐다. 그는 진저리를 쳤다. 그리고 자기는 첫째를 만나볼 그 무엇을 잃은 듯했다. 그는 안타까웠다. 분했다. 이십 년이나 고이 싸두었던 그의 정조를 늙은 호박통 같이 생긴 덕호에게 빼앗긴 생각을 하니 그는 생각할수록 분했다. 그때 자기는 정신이 나가서 분한 것도 아무 것도 몰랐으나 지금 이렇게 누워서 눈감고 생각허나 그때에 자기는 덕호에게 일생을 망쳤다. 여기까지 생각한 선비는 얼굴이 화끈 달았다. 그리고 첫째의 얼굴을 다시 그려보았다.
이런 생각으로 밤잠을 설치던 선비는 기숙사에 뿌려진 격문 전단 때문에 감독의 추궁을 받게 됐다. 감독은 선비를 추궁하면서 간난이와 가까이 지내지 말 것을, 그리고 문제를 일으키지 말 것을 당부했다. 감독에게서 풀려나온 선비는 간난이가 더 이상 이 공장에서 일할 수 없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선비의 죽음을 통해 영원한 인간문제를 풀 주역이 자기 자신임을 깨닫는 첫째
마침내 첫째와 그의 동료들은 노동쟁의를 준비했다. 그러던 중에 첫째는 신철이가 검거되었다는 사실과 부두노동쟁의는 딴 동무들이 맡아보기로 했다는 사실을 낯선 사내에게서 듣게 됐다. 한편 간난이는 선비에게 “xx의 지령에 의하여 모든 것을 너에게 인계하고 나는 오늘 밤 이 공장을 벗어나야 하겠구나” 라고 말하며, 공장을 떠났다.
선비는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으나 몸이 오슬오슬 추우면서 이마에는 땀이 척척하게 흐르곤 하였다. 그러나 선비에게는 주어진 사명이 있었다. 선비는 간난이가 가르쳐주던 공장 내부 조직 방침, 밖의 동지들과 민첩하게 연락을 취할 것, 그리고 밖에서 들어오는 문서며 삐라 등을 교묘하게 배부할 것 등을 떠올렸다.
그리고 다시 첫째를 떠올렸다. 선비는 첫째를 꼭 만나보고 싶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먼저 그에게 계급의식에 관해 알려 주고 싶었다. 그러면 그는 누구보다도 튼튼한, 그리고 무서운 투사가 될 것 같았다. 그것은 선비가 확실하게는 모르나 그의 과거 생활이 자신의 과거에 비해 볼 때 못하지 않은 쓰라린 현실에 부대끼었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는 아직도 도적질을 하는가? 지금 생각하니 어째서 그가 매음부의 자식으로서 도적질을 하게 되었는지 깨달았다. 선비는 어서 바삐 첫째를 만나서 그런 개인적인 행동에 그치지 말고 좀더 대중적으로 싸워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싶었다. 선비는 어느 순간 자기의 병이 심상하지 않음을 알게 됐다. 기침할 때마다 침에 섞여 나오는 붉은 실같은 피도 역시 심상치 않았다.
한편 첫째는 신철이 사상 전환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그 자리에서 낙심하는 첫째에게 철수는 “동무! 신철이가 전향했다는 것이 그리 놀랄 것이 아닙니다. 소위 지식계급이란 그렇지요. 신철이는 나오자 M국에 취직하고 더욱 돈 많은 계집을 얻고 했다우.” 라고 말했다.
그때 갑자기 간난이가 뛰어들었다. 어제밤 대동방적공장에서 여성 동무 하나가 폐병으로 해고되었는데, 상태가 위독하다는 것이었다. 첫째도 철수와 같이 간난이의 집으로 향하였다. 간난의 집에 도착한 첫째는 이미 싸늘한 시체로 누워있는 선비를 발견하게 됐다. 그리고 첫째는 생각했다. 그렇다! 신철이는 그만한 여유가 있었다. 그 여유가 그로 하여금 전향을 하게 한 게다. 그러나 자신은 어떤가? 과거와 같이, 그리고 눈 앞에 나타난 현재와 같이 아무런 여유도 없지 않은가! 그러나 신철이는 길이 많다. 신철이와 나와 다른 것이란 여기 있었구나! 여기까지 생각한 첫째의 눈에서는 불덩이가 펄펄 나는 듯하였다. 그리고 다시 한번 선비의 시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생각했다.
이 시커먼 뭉치! 이 뭉치는 점점 크게 확대되어 가지고 그의 앞을 캄캄하게 하였다. 아니, 인간이 걸어가는 앞길에 가로질리는 이 뭉치, 시커먼 뭉치, 이 뭉치야말로 인간 문제가 아니고 무엇일까? 이 인간 문제! 무엇보다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인간은 이 문제를 위하여 몇천만 년을 두고 싸워왔다. 그러나 아직 이 문제는 풀리지 않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 앞으로 이 당면한 큰 문제를 풀어 나갈 인간이 누굴까?
▣ 더재미있게읽기위하여
역사의 주체는 노동자임을 확인
강경애의『인간문제』는 이기영의『고향』과 한설야의『황혼』과 함께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류만은『조선문학사』에서 강경애의『인간문제』가 "해방 전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대표작의 하나이며 우리 나라에서 사회주의 사실주의 문학발전의 면모를 보여주는 의의 있는 작품이다."고 지적할 만큼 이 소설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이 소설은 노동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장편소설이라는 문학사적 의의를 획득하고 있는 작품이다.
『인간문제』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작품을 통해 풀고자 하는 주된 문제는 역사의 주체가 과연 누구인가라는 문제다.『인간문제』의 마지막 장면은 이 점을 의문의 형태로 제기하고 있지만, 주동 인물들의 체험을 통해 형상화되었기에 깊은 울림을 갖는다.
시커먼 뭉치란 선비의 주검을 의미하는 것이고 결국 선비의 죽음은 노동의 착취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와 자본가의 모순, 착취와 피착취의 관계가 ‘인간문제’를 야기하는 주된 원인이며, 이러한 보편적인 ‘인간문제’를 해결해야 할 책임이 ‘첫째’(노동자)에게 주어져 있음을 제시한다. 역사의 주체가 노동자에게 각인되는 순간이 선비의 죽음을 통해 비장하게 그려지고 있다.
역사의 주체에 대한 확인 과정은 두 단계로 형상화되고 있는데, 전반부가 농민분해과정과 임노동자의 창출을 그리고 있다면, 후반부는 노동운동을 통한 계급의식의 성숙을 그리고 있다. 전반부는 ‘용연동네’라는 농촌을 중심으로 원시적인 자본축적과정에서 토지에 관한 모든 권리를 잃어버린 빈농이 농촌을 이탈하는 과정을 형상화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농민분해과정은 ‘빈농화과정’과 ‘탈농화과정’으로 구성되는데, 특히『인간문제』는 후자의 형상화에 집중되어 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악랄한 지주의 횡포를 제시함으로써 탈농의 필연성을 형상화한다. 이를 토대로 후반부는 농촌에서 이탈한 ‘첫째’와 ‘선비’가 각성한 노동자로 성장하는 과정이 형상화되고 있으며, 그들의 성장은 실천을 통해 매개되고 있으므로 현실적인 구체성을 획득하게 된다.
이 소설의 특징은 소설의 앞머리에 ‘용연 동네’에 있는 ‘원소’(怨沼)라는 못의 전설을 에필로그 형식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전설의 도입은 전반부와 후반부의 괴리를 극복하게 해 준다. 즉, 마을 사람들의 눈물이 장자첨지네 기와집을 잠기게 하는 것처럼 억압받는 노동자가 억압과 착취를 뚫고 끝내는 승리로 이어지라는 믿음이 소설의 구조에 일관성을 부여한다.
소설의 표면적 내용은 ‘선비’의 죽음이라는 비극으로 처리되고 있지만, 표면적 내용의 이면에는 선비의 죽음을 통해 ‘첫째’가 각성된 노동자로 성장하고, 나아가 지배와 착취라는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역사적 주체로 성장할 것임을 원소(怨沼) 전설은 이미 암시하고 있다.
전설의 도입은 이 소설에서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이라는 단순한 틀에 인물들의 다양하게 변화되어 가는 모습을 제시함으로 더욱 흥미를 갖게 한다. 선비와 첫째는 계급의식이 뚜렷한 인물이 아니었지만 이들은 순이와 신철을 만남으로 자신이 싸워야할 대상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알아 간다. 결국 이 두 인물은 수동자적인 입장에서 개선자적인 인물로 변화된다.
욕망과 사랑을 매개로 구체화되는 각 계급의 사회적 존재 방식과 역할
『인간문제』가 기존의 노동자와 자본가의 이분법적 대립이라는 틀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첫째를 노동운동으로 이끄는 신철이라는 지식인 계급의 역할과 한계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했기 때문이다. 신철의 지식인 계급으로서의 이중적 성격은 선비를 두고 벌이는 ‘정덕호’와 ‘신철’ 그리고 ‘첫째’의 욕망과 사랑을 매개로 구체화된다.
먼저, 정덕호의 탐욕은 소작인의 딸인 간난이와 선비를 유린하는 성적 방종으로 제시되고 있으며, 이러한 정덕호의 만족할 줄 모르는 성욕에 대한 집착은 소작인에 대한 착취가 영구적일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이는 간난이와 선비의 탈농이 정덕호의 성적 유린에 의한 것이고, 첫째의 탈농이 정덕호의 끝없는 착취에 의한 것이라는, 다시 말해 그의 성적 탐욕과 소작인 착취가 지주 계급의 탐욕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둘째, 신철은 선비에게 연민과 흠모를 가지고 서울로 유학시킬 방법을 궁리하지만, 현실적으로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는 인물로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지식인 계급의 무기력함은 신철 자신의 반성처럼 ‘봉건적 영웅심리에서 나온 야욕과 가면을 몇 겹씩 쓰고 회색적 행동을 하고 앉은, 그야말로 고리타분하고 얄미운 소부르주아지의 근성’ 때문이다. 그러나 신철의 자기 반성은 철저하지 못했으며, 반성의 불철저함은 결국 자신의 양심을 저버리고 전향하는 것으로 귀결되고 만다.
셋째, ‘첫째’는 가장 순수하게 선비를 사랑하였으며, 마지막 죽음의 순간을 지키는 인물로 제시되고 있다. 선비는 현실의 고통을 이겨낼 아무런 힘도 갖지 못한 나약하고 불행한 존재였지만, 죽음의 순간에 첫째에게 ‘인간문제’를 해결할 주체가 바로 노동자 자신임을 일깨워주는 존재다. 결국 선비에 대한 첫째의 한없는 사랑과 그 순결한 사랑의 방법은 노동자 계급의 도덕성과 운명을 역설적으로 일깨워주는 긍정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 작품은 선비를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각 계급을 대표하는 세 사람의 사랑의 방식을 통해서 구체화된다. 그들의 사랑의 방식은 정덕호로 대표되는 지주계급의 성적착취, 신철로 대표되는 지식인 계급의 우유부단함, 첫째로 대표되는 노동자의 순수함 등이 그들이 사회와 관련되는 양상과 맞물려 형상화되고 있다.
이 소설이 기존의 노동소설들이 보여준 관념성과 추상성을 넘어설 수 있었던 것도 당대를 대표할 수 있는 전형적 인물들의 사랑의 방식과 구체적인 일상을 섬세하게 포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주목할 점은 강경애의『인간문제』가 남한의 문학사와 북한의 문학사가 동시에 그 성과를 인정하고 있는 소설이라는 점이다. 물론 양쪽이 주목하는 지점은 다소간의 차이가 있지만, 강경애의『인간문제』는 이러한 차이를 극복하고 양측이 공히 인정할 수 있는 합리적인 통일문학사를 위한 시금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문제”에서 일부 요약 발췌, 강경애 지음>
▣ 저 자 강경애(1907∼1943)
경제적 궁핍과 왜곡된 가족사를 극복한 불굴의 여인
“내가 학교 일학년 때 일이다. 내일 학기시험을 치르는데 종이 붓이 없구나, 그래서 생각다 못해 나는 옆의 동무의 것을 훔치었다가 선생님한테 얼마나 꾸지람을 받았겠니. 그러구 애들한테서는 얘! 도적년 하는 놀림을 얼마나 받았겠니. 더구나 선생님은 그 큰 눈을 부라리면서 놀 시간에도 나가 놀지 못하게 하고 벌을 세우지 않았겠니.”(강경애,「나의 유년시절」중에서)
강경애의 어린시절에 대한 기억은 가난이 전부다. 종이와 붓이 없어 시험을 치르지 못해, 결국은 친구의 학용품을 훔치고, 아이들로부터 ‘도둑년’이라는 놀림을 받으며 자라났다. 누구나 가난했던 시절이었지만 그녀는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잃어 특별히 생활이 어려웠다. 항상 가난했기 때문에 하루 두 끼조차도 먹지 못했다. 실컷 배부르게 먹어보는 것이 가족의 유일한 소망이었다. 갈수록 생활이 어려워지자 그녀의 어머니는 장차 의지할 아들도 없고 어린 강경애하나만믿고살아갈수는없었다.
어머니의 개가 이후의 생활은 어린 강경애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의붓아버지에게는 전처 소생의 아들과 딸이 있었는데 그들은 다섯 살 밖에 안된 어린 강경애를몹시미워했다. 때리고 꼬집는 것은 거의 매일의 일과였고 머리를 뜯어서 보기 흉한 꼴이 되면 집밖으로 쫓아내곤 했다. 또한 의붓아버지는 돈은 있었으나 환갑이 지난 늙은 불구자로 강경애의어머니를괴롭히며거의몸종처럼부렸다. 유년시절 이런 충격적 경험은 오랜 동안 그녀에게 정신적 외상으로 남아있게 됐다. 강경애의소설의구석구석에는이런흔적들이남아있다.
무애 양주동과의운명적인만남
“선생님 나 영어 좀 가르쳐 줘요! 그리고 시도, 문학도, 전 중학교 3년 생, 아무 것도 아직 몰라요.” “그러나 문학적 소질은 담뿍 가졌으니 좀 길러 주세요” ‘나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그녀는 이어 자기 가정과 소질과 포부를 도도히 요설로 재깔여 나가는데, 그 똑똑하고, 야무지고, 앙큼한 품이 몹시 귀엽다. 그 참새같이 작은 몸, 빛나는 눈, 훤칠한 이마, 낭랑한 목소리-나는 일견 그녀가 ‘재원‘이상의 문학적 천부의 소질이 충분히 있음을 간파했다.’
양주동이 강경애의 학생시절의 모습을 그리며 쓴 글이다. 양주동은당시일본와세다대학영문과유학생으로천재라고소문날만큼박식한사람이었다. 16살에 숭의여학교에서 퇴학당한(동맹휴학 주도) 강경애의돌연하고당돌한행동에그는적지않게놀랐지만, 그녀의 빛나는 눈빛은 젊은 양주동의 마음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둘은 함께 서울에서 동거생활을 시작했다. 이 무렵 양주동은스승으로강경애는제자로『근대문학 10강』,『근대사상 16강』을 공부했고 또 『자본론』과 『맹자』등 종류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책을 섭렵했다. 강경애는 양주동의제자이자, 애인이며 동반자가 됐다.
그러나 양주동과의 동거는 1년만에 끝이 났다. 그 이유는 서로의 기질 탓이라고 했다. 양주동은“어떤 뜻 아니한 불행한 일에 의하여 서로 갈라졌다"고만 밝히고 있다. 다만 절충주의적 부르주아 지식인에 머물러 있던 양주동의 태도에 대한 반발과 강경애의강경한사고방식이충돌했으리라는추측이있을뿐이다.
강경애는 식민지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문학사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이는 강경애의소설이뛰어났음에도불구하고당시참여문학을내세웠던‘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KAPF)’의 작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녀가 중앙문단에서 멀리 떨어진 ‘간도’에서 주로 창작활동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렇듯 잊혀진 작가로 있던 강경애에대한관심이본격적으로진행된것은 40년이라는 세월을 훌쩍 뛰어넘은 80년 후반이다.
일제 강점기하에서의 여성의 지위는 이중으로 억압받는 형국이었다. 자본주의하의 계급적 억압과 가부장적 질서에 의한 성적 억압이 그것이다. 대부분의 남성 작가들이 계급적 억압만을 부르짖었지만, 강경애는계급적억압과가부장적질서에의한성적억압을동시에소설로형상화했다. 이는 우리 문학사에 미지의 영역을 개척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글쓴이 류찬열
중앙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석·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석사 논문 「윤동주 시 연구」가 있으며 그 밖에 「70,80년대 비평사 연구」「김용택 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