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역사와 자유!
20세계 초 유럽의 힘은 정점에 도달해 있었다. 유럽인들은 전세계에서 식민지를 분할해 가졌다. 19세기 초처럼 곤궁하게 살지는 않았다.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여러민족들은 정치적으로는 부자연스러웠지만, 유럽에서 1900년경만큼 민족들이 잘살았던 적은 없었다.
이 유럽이 45년 후에는 폐허더미가 되었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폐허에 약 7천명의 사망자가 누워 있었다. 숨막힐 정도로 경솔하게 정치가들은 전쟁이라는 개의 줄을 풀어주어 자멸의 비틀거림을 유발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페스트(흑사병)가 돌던 때, 또는 30년전쟁이 있었지만, 1914년부터 1945년까지의 30년전쟁만큼 대량살육이 있던 적은 없었다(물론 중간의 휴전기간을 제외한다면) 확실한 것은 집단적광기가 독일에서 출발했고, 이 나라가 스스로 정신병원이 되었으며, 여기에서 한 광인이 명령권을 넘겨받아 문명 자체에 선전포고를 했다는 점이다. 제1차 세계대전은 20세기 파국의 근원이었다. 그후 몇 십 년동안 이어진 모든 폭정과 대량학살의 충격적인 야만행위가 거기에서 비롯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승자들이 베르사유에 모여 독일의 처벌과 배상금징수의 근거를 마련했다. 그 다음 2차 세계대전 후에 이 두 번째 전쟁이 명백히 히틀러에 의해서 유발되었다는 것이 확인되었을 때도 독일인들은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했고 그 책임론을 부인했다.
자세한 전쟁사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914년 6월28일 세르비아 테르리스는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부처가 헝가리 사라예보를 방문했을 때 그들을 권총으로 암살했다. 독일 정부는 군사적으로 해결할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여 오스트리아에게 공격적으로 신속하게 대응하라고 재촉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는 수용하기 어려운 최후통첩을 세르비아로 보냈다. 저격사건 후 한달만에 선전포고가 내려져 동맹조약에 따라 독일에 동원령이 내려졌고 군부가 지휘권을 넘겨 받았다. 전쟁의 발발이 독일과 오스트리아 사람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고갔다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들다. 전쟁은 공업사회에서 쳇바퀴 돌 듯 단조로운 생활을 하면서 생겨난 정신적 짐을 벗겨주는 축제같이 받아들여졌으며 마치 전국민이 그 속에서 융합되는 듯했다.
또한 사람들은 아직도 전쟁을 과거의 여느 전쟁과 비슷할 것이라고 낭만적으로 생각하고 있었을 뿐, 발달된 무기기술이 초래할 결과에 대해서는 상상조차 못했다. 1870년~71년의 독일이 영국을 끌어들여 벌인 전쟁에서는 기관총의 등장으로 1천망명의 어린병사들이 목숨을 잃은 적도 있었고 그 들 중에는 자원병인 히틀러도 있었다. 그는 남자들간의 공동체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전쟁을 사랑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은 독일에 대해 해상봉쇄령을 내려 독일은 무제한 잠수함 전쟁을 선포했고 미국 상선까지 격침시켰다. 이것은 윌슨 대통령이 1917년 4월에 선전포고하는 계기가 되었다.
1918년의 독일의 총공격은 실패했으며 영국이 최초로 탱크를 투입했을 때 연합군은 독일 전선을 돌파했다. 이에 베를린정부는 10월 3일 휴전을 제의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독일의 전선과 각 가정은 큰 충격을 받았다. 독일 전선도 붕괴하지 않았고 국토도 점령당하지 않았지만 유대인과 볼세비키들이 독일인들을 등뒤에서 단감으로 찔렀다는 이른바“단검공격‘전설이 생겨나게 했다. 이 허구적인 이야기에는 그럴듯한 사이비근거들이 있었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독일에게 거액의 배상금이 부과되었고 도처에 새로운 갈등의 싹들이 숨어 있었고 국경이 잘못 그어져 수 많은 소수민족의 섬들이 생겨났다. 독인은 사지가 절단되었고 유죄선고로 굴욕을 느꼈으며 연합국에 대한 증오심을 부채질했다. 동시에 세계경제를 파멸로 몰아넣었다. 함스부르크왕국은 해체되어 권력이 갑자기 좌파의 손으로 넘어간 독일의 권력은 소비에트 연방처럼 소비에트국가가 될 것인지, 또는 서구모델에 따라 의회민주주의를 택할 것인지 분열상을 보이다가 사회민주주의자들과 군 수뇌부가 힘을 합쳐 의회민주주의 쪽으로 결정이 내려졌다. 그 결과 정부는 사회민주주의자와 공산주의자로 분열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좌파와 우파로 나뉘어 극한 대립을 했다. 히틀러는 민족의 위대함에 대한 신념과 연극적 시뮬레이션으로 개인과 민족의 동반추락 사이에 존재하는 매우기 힘든 괴리에 다리를 놓아 연결해주었다. 그는 항상 현실을 꿈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가 인격체라기보다는 집단의 교활한 화신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사회적으로 몰락한 사람들과 실업자들을 군복 속에 숨겨준다는 천재적인 착상을 하고 있었다. 오페레타 공연같은 생각으로 그는 수 많은 목표를 동시에 도달할 수 있었다. 군복을 입은 사람들은 다시 자부심을 얻었고 과거의 고립에서 벗어나 집단에 대한 소속감을 느꼈다. 그는 과거의 전선체험을 다시 살려냈으며 전쟁의 패배를 상상 속에서 없던 일로 되돌려 놓았다.
독일인들은 적을 발견했으며 자신들의 패배를 프랑스나 영국보다도 바로 이 적에게 돌렸다. 그들은 다른 무기를 가지고 몰래 숨어서 싸우는 기생충, 교란자, 즉 영원한 유대인이라고 보았다. 유대인은 독일인이자 외국인이며, 기독교를 받아들여 동화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정교를 믿으며, 민족의 몸 내부에 있으면서도 외국을 위해 일하는 자들이었다.
1929년 10월에 뉴욕의 주식시장이 와해되면서 경제 대공황이 시작되었다. 원인은 미국의 과잉생산과 독일에 대한 과도한 배상금 요구가 겹쳐진 데 있었다. 독일에서는 기업들이 도산했고 실직자 수가 6백만 명으로 증가했다. 민주주의 정당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재정상태의 불투명성은 세인의 관심을 이른바 돈의 국외유출자, 즉 유대인에게 집중시켰다. 1932년 봄에 대통령을 선출하는데 히틀러가 힌덴부르크와 맞붙어 패했다. 그 후 의사당화재를 빌미로 긴급법률을 발동해 기본권을 무효화시켰고 의회로 진출하여 4년동안 의회없이 혼자서 통치할 수 있는 전권위임 법안을 의회에 제출하여 합법적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1936년에 모로코의 파시스트 장군 프랑코가 부대를 이끌고 쿠테타를 일으켰다. 독일과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은 그는 스페인으로 건너가 국토의 절반을 점령했으며 이 때 소련이 공화국을 위해 개입했고 전쟁은 독일 및 이탈리아의 무기지원을 받은 프랑코의 승리로 끝났지만 이때 개입한 독일은 수백만배로 당하게 되는 공포의 서곡이 되었다.
1939년 9월1일 독일군대는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을 시작했다. 그 일이 가능했던 것은 스탈린이 히틀러와 상호불가침조약을 맺었고 폴란드를 히틀러에게 나누어 주었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깡패처럼 전쟁을 시작했다. 1941년 6월22일까지 히틀러는 서부유럽과 북부유럽전체(스위스와 스웨덴,스페인제외) 그리고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를 공격했다. 그리고 소련 모스크바를 침공하였지만 추운겨울이 닥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왜냐하면 1941년 12월 7일에 일본이 태평양 진주만의 미국함대를 기습공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흘 후에 히틀러는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로써 전쟁은 세계대전이 되었다. 1942년 독일이 러시아 공격을 재개했으나 사투를 벌이다가 전멸했다. 1943년 7월10일에 영국군과 미국군이 이탈리아에 상륙했으며 1944년 6월6일 노르망디 상륙전의 D데이였다. 독일의 패망은 이미 오래전에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고급장성들 중에 히틀러를 체포하고 전쟁을 종식시켜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병사들을 계속 희생시켰으며 병사들의 목숨보다 히틀러에 대한 자신의 충성맹세가 더 중요하다고 믿었다. 4월30일에 히틀러는 자신의 벙커에서 자살했다. 독일인들은 마지막까지 히틀러와 한마음이었으며 그의 몰락 때까지 따라갔다. 독일의 통치자 중 히틀러만큼 인기있던 사람은 없었다. 문명화된 인간의 역사에서 독일인처럼 야만적으로 전쟁을 치른 민족은 결코 없었다.
- 동부전선에서 기계화부대들이 인간사냥에 나서서 정복한 지역의 모든 유대인끌어내 대형구덩이 앞에 세우고 약 200만명
을 모조리 사살되었다
- 사로잡힌 공산당원들이 모조리 사살되었다.
- 러시아 야전군의 수백만명 포로들이 굶어 죽었다. 폴란드에서는 나치가 폴란드 엘리트들 수백만 명을 죽였다.
- 또한 게릴라 토벌작전에서 무고한 양민들을 죽였다.
-앵글로 계열의 미국인들은 폭격기를 동원해 독일도시민을 무차별로 죽였다.
- 연합군은 독일을 침공해 대량겁탈한 후 동프로이센, 보페론등에서 수백만 명 피난민들을 죽였다.
독일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폐허로 변했지만 일본인들은 그때까지 계속해서 싸우고 있었다. 미국인들은 그들에게서 하나씩 점령지를 빼앗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 본토에의 상륙은 아직도 수많은 미국 청년들의 목숨을 대가로 지불해야 할 형편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발발하기직전에 오토 한과 프리츠 슈트라스만은 핵을 분열시켜 엄청난 에너지를 얻어내는 방법을 발견했다. 그들은 거의 전쟁전에 괴팅겐에서 연구를 하던 동료들로써 오토 한, 바이츠제커, 페르미, 보어, 아인슈타인,오펜하이머, 텔러 등이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 때 보어는 코펜하겐에서 바이츠제커와 환담하던 중 독일 물리학자들이 히틀러에게 폭탄을 만들어주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 이야기를 텔러가 전해듣고 아인슈타인을 만나서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미국이 독일보다 선수를 처야 한다는 말을 전하도록 했다. 아인슈타인은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고 대통령은 폭탄을 제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히틀러 공격용 원자폭탄을 제조했다. 이들은 거의 파시즘국가에서 망명온 사람들이었다. 독일출신은 프랑크, 보른, 펄스, 베테, 위그너, 이탈리아출신은 페르미, 폰테코르보, 헝가리출신은 실라르드, 텔러, 폰 노이만이었다.
폭탄은 독일이 항복한 직후에 만들었다. 루스밸트 후계자인 트루먼 대통령은이 일본의 즉각적인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하늘에서 거대한 섬광이 번쩍였고, 두 도시는 녹아 내렸다. 며칠 후(8월15일) 일본은 항복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더불어 지구 전체에 대한 유럽의 지배도 지나갔고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이 그 유산을 나누어 가졌다.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교양“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디트리히 슈바니츠 지음, 인성기박사,윤순식교수 등 옮김, 들녘>디트리히 슈바니츠; 함부르크 대학 영어영문학과 교수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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