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우리의 정서적 태도가 뭔지 아세요?
신은 내가 보지는 못하지만 나를 보는 존재예요. 그러니 도처에 있다는 느낌이 드는 거죠. 골목을 가다가 누가 나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있죠? 이게 신이예요. 사실 시선이라는 메커니즘 때문에 신이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발생하는 거예요. 보는 자는 강한 자, 보이는 자는 약한 열등한 자 예요. 산길을 가거나 골목길을 걸을 때 무섭죠? 누군가 여러분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죠? 거기에서 인간의 약함이 시작되는 거죠.
신앙이라는 걸 계속 가지신다면 본인이 유아적이라는 의미예요. 기도한다는 건 잘못을 비는 거잖아요. 어린아이는 ‘잘못 했어요’라고 하죠. 인문학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걸하지 않아요. “신은 죽었다.”라는 니체의 정신이나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여라.“라는 임제의 정신을 관통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에게는 인문정신이 없다고 할 수도 있어요. 구태여 기도를 한다면 인문학자 내 자신이나 타인, 그러니까 인간에게만 하지요.
종교를 극복하자는 것은 부모로부터의 독립이면서 동시에 신앙으로부터의 독립이기도 해요. 동시에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기도 해요. 계속 기도하면 계속 힘드실 거예요. 신에게 기도하는 행위 자체가 나 스스로 주인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니까요.
종교를 극복하려는 사람들은 현재를 사랑해야 돼요. 아니 거꾸로 말해도 돼요. 현재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종교를 믿지 않을 거라고. 미래에 대한 공포 속에 종교와 자본주의는 항상 같이 살아요. 그래서 짐멜이나 벤야민은 자본주의를 세속화된 기독교라고 정의 내렸던 거예요.
저는 죽음을 1인칭,2인칭,3인칭의 죽음으로 나누어 분석합니다. 1인칭의 죽음은 ‘나’의 죽음이에요. ‘너’의 죽음이 2인칭의 죽음이고요. ‘그들’의 죽음이 3인칭의 죽음입니다. 저는 1인칭의 죽음은 힘들지 않다고 말해요. 내가 죽으면 고통이 없으니까요. 우리는 살아 있기 때문에 고통을 느끼는 거잖아요. 죽으면 고통이 없죠. 그러니 나의 죽음은 고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2인칭의 죽음은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우리가 ‘너’라고 부르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아요. 우리는 사랑을 할 때 그 사람을 ‘너’라고 불러요. 어머니, 아버지라도 ‘너’로 안 보일수도 있어요. 3인칭은 '그들‘인데 나와 무관하다는 느낌이 드는 사람들이 에요.
우리는 ‘너’인 사람이 죽을 때 제일 아파요. 내가 사랑하는 남편, 사랑하는 애인, 사랑하는 아이가 사라졌을 때 우리는 죽음이 주는 큰 고통을 느껴요.
그러니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아무도 사랑하지 마세요. ‘너’를 만들지 마세요. 애완견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상관없어요. 그런데 애완견을 사랑했기 때문에 애완견의 죽음의 고통스러운 거죠. 사랑을 해야 그 사랑하는 대상의 부재에 고통을 느끼니까요. 사랑하기 때문에 부재의 고통이 생기는 거죠.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떠나면 아픈 거에요. 그런데 그 아픔만 제거 할 수 있을까요. 없어요. 같이 가는 거에요. 사랑하기로 작정한 사람은 그로부터 받을 고통도 기꺼이 감당하기로 작정한 사람이기도 해요.
방종이라는 건 권력자가 우리의 자유를 저주할 때 사용하는 단어예요. 선생님이 학생에게, 혹은 권위적인 아버지가 자식에게 그렇게 말하는 거죠. 하지만 우리가 밑에서 보면 알아요. 자기만 자유를 구가하려고 선생, 독재자, 아버지가 만든 용어가 바로 방종이라는 사실을요. 자기가 하면 자유고 남이하면 방종이라는 식이지요. 그래서 우리 시인 김수영도 말하지 않던가요. ‘우리들의 사회에서는 백이면 백이 거의 다, 사랑을 갖지 않는 사람의 자유가, 사랑을 가진 사람들의 자유를 방종이라고 탓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사랑해서 자기만족에 이르세요. 자유와 사랑은 같은 거예요. 내가 자유로워야 누구를 사랑하죠.
키르케고르는 ‘사랑이란 나 자신에 대해서는 객관적이고, 타인에 대해서는 주관적인 것’이라고 했다.
나 자신에 대해 객관적이라는 것은 타인의 입장에서 나 자신을 본다는 것이고요. 타인에 대해 주관적이라는 것은 내가 마치 그 타인 본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본다는 거잖아요. 그래야 사랑이라고요. 같이 있어 주는 게 중요한 건 아니 예요. ‘나는 이만큼 해 준다’ 이게 중요한 게 아니 예요. 진짜 상대를 좋아한다면 상대가 어떻게 느낄지를 마치 그 사람인 것처럼 ‘주관적으로’생각해야 돼요.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처럼 ‘주관적’으로 생각해야 돼요. 또 한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이해 해 줄 수가 있고, 그랬을 때 그 사람도 과거보다 행복을 느낄 가능성이 더 많을 거예요.<“강신주의 다상담3”에서 극히 일부 부분 요약 발췌, 강신주박사 지음,동녘출판>
'독서 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 (0) | 2014.11.12 |
---|---|
자기중심에서 벗어나 타자와 마주칠 수 있는 존재가 되려면~? (0) | 2014.08.27 |
일에 대하여! (0) | 2014.07.29 |
느리게 더 느리게! (0) | 2014.07.21 |
헤르만 헤세의 '작은 기쁨'! (0) | 2014.07.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