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서양철학은 플라톤(B.C.428~B.C.348)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후예들은 플라톤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지요. 그들이 끝내 벗어날 수 없었던 플라톤의 그림자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상기설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상기설 자체가 이데아에 대한 형이상학적 논의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데아가 일종의 기억에 의해 발견된다는 점입니다.
결국 이데아에 대한 플라톤의 논의가 함축하는 기억이라는 테마가 중요한 것이지요. 이데아에 대한 상기는 어쨌든 기억이라는 사유 기능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서양철학이 자랑하는 주체의 투철한 자기반성도 사실 기억의 힘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이 점에서 칸트(1724~1804), 피히테(1762~1814), 그리고 헤겔로 이어지는 독일 관념론이 플라톤의 가장 훌륭한 계승자라고 해야 하겠군요. 그 중 피히테는 대상의 동일성이 결국 사유의 동일성에 기초한다는 기억의 테마를 반복적으로 강조합니다.
‘A가 A인 까닭은 A를 정립한 내가 그 속에서 그것이 정립된 나와 같기 때문이다.’ 어제 본 꽃이 지금 보는 꽃과 동일한 것이기 위해서,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같은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풀어보면, 나는 어제의 나뿐만 아니라 어제의 꽃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오직 이 경우에만 나는 꽃에 대해서도 혹은 나 자신에 대해서도 ‘같음’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동일성은, 그것이 존재의 동일성이든 혹은 주체의 동일성이든, 우리가 가진 ‘기억’ 능력에 의존한다는 것입니다.
현대에 이르러 서양철학은 마침내 ‘망각’을 하나의 문제로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서양철학이 중국철학과 대화할 수밖에 없는 지점을 직감하게 됩니다. 중국철학에는 ‘망각’을 단순한 기억력이 저하된 상태가 아니라, 긍정적인 마음의 역량으로 긍정하는 사유전통이 존재했기 때문이지요. 이 점에서 특히 중요한 사유전통은 장자와 혜능의 사유입니다.
니체는 “망각이 없다면, 행복도, 명랑함도, 희망도, 자부심도, 현재도 있을 수 없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을 끄는 것은 ‘망각이 없다면, 현재도 있을 수 없다“는 그의 생각입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기억은 현재를 극복되어야 할, 혹은 부정되어야 할 수단으로 만들어버립니다. 현재는 단지 약속이행의 과정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지요. 결국 약속이 체결되었던 과거나 약속이 이행 될 미래에 의해 우리의 현재는 조각나고 증발해버리고 맙니다.
일당을 받기 위해 해변가에 모래성을 만드는 젊은 노동자에게 ‘모래의 촉촉한 촉감과 밀려드는 파도의 윤무에 몸을 맡길 유쾌한 시간’은 결코 허용되지 않는 법입니다. 그것은 일체의 약속과 목적을 초월한 망각을 통해서만 가능해집니다. 모래와의 직접적 소통, 다시 말해서 타자에 대한 개방성에서 유래하는 즐거움은 망각의 힘에 의해 주체의 자기동일성이 해체되었을 때에만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레비나스(1906~1995)의 지적처럼 이 순간에서 우리는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의 삼각구조, 즉 기억과 기대를 통해서 기능하는 주체의 자의식을 넘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이 경우에만 우리는 타자와 소통할 수 있고, 나아가 우리에게 ‘진정한 미래’가 도래하겠지요.
선불교의 여섯 번째 스승, 혜능(638~713)은 ‘무념의 실천(無念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모순적인 표현입니까? 전통적으로 실천이란 기본적으로 주체, 나아가 의식을 전제해야만 가능하다고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혜능은 오히려 주체나 의식이 부재한 상태에서 실천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니체, 들뢰즈, 그리고 장자와 함께 힘들고 난해한 ‘망각’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무념의 철학적 위상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성급하게 세상으로부터의 초월을 연상하기 쉬울 것입니다. 이런 오해를 막기 위해서 우리는 ‘무념’보다는 ‘行’을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념’이 우리를 신비주의로 몰고 갈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지만, ‘행‘이란 개념은 무념이 새로운 실천을 위한 필요조건임을 분명히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무념’은 신비한 초월적 경지가 아니라, 세계와 새롭게 연결하기 위해서 의식의 동일성에 집착하지 않으려는 긍정적인 역량입니다. 그래서 혜능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무념이라는 불법은 일체의 모든 대상을 보면서도 그것들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집착은 대상의 동일성을 주체나 의식의 동일성에서 찾으려는 시도를 의미합니다. 하긴 대상에 대한 집착은 주체의 내적 무의식의 문제라고 이미 정신분석학도 지적하지 않았던가요?
결국 들뢰즈(니체의 적장자, 1925~1995)의 표현을 빌리자면 무념이 ‘의식운동’을 무력화시키는 운동이라면, 실천(行)은 망각이라는 능동적 힘을 통해 확보된 ‘감각-운동’의 활성화인 셈입니다.
그래서 혜능은 “모든 것들을 마음에 두지 않으려면 생각을 끊어야 한다고 하지 마라”라고 충고했던 것입니다. 무념의 실천이란 ‘세계 속으로의 초월’이지 ‘세계 밖으로의 초월’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니체와 들뢰즈를 거치면서 우리는 플라톤을 극복하려는 그들의 노력이 결국 ‘기억’이라는 부정적 능력을 극복하고 ‘망각’이라는 능동적 역량을 복원시키려는데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비판의 대가들이 지적했던 것이 옳다면, 우리는 이제 ‘망각’을 사유해야만 합니다.
니체와 들뢰즈를 읽은 우리들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하나의 길이 니체와 들뢰즈를 무시하고 다시 한번 플라톤의 길을 회복하는 것이라면, 다른 길은 니체와 들뢰즈를 진지하게 숙고하면서 그들이 남겨 놓은 철학적 문제들을 해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자의 길을 선택한다면, 우리는 철학적 사유를 포기하고 종교적 사유로 회귀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사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우리는 용기를 내어 망각과 관련된 많은 철학적 쟁점들과 씨름해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는 망각이 삶의 긍정과 새로운 생성을 위해서 제안된 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망각을 사유한다는 것은 망각이 허무주의로 흐르지 않고,
삶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열도록 철학적 토대를 놓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장자와 그의 후배들, 그리고 불교의 대가들은 ‘망각’을 그 극한까지 그리고 오랜 시간에 걸쳐서 사유했기 때문이지요. 그것이 ‘망’이나 ‘허’라고 불리든, 아니면 ‘공’이나 ‘무념’이라고 불리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기억을 강조하는 사유는 망각을 일종의 무기력이라고, 혹은 수동이라고 폄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망각은 우리의 타자와의 소통을 방해하는 ‘의식의 자기동일성’만을 잊으려는 것이지, 삶 자체의 능동성을 잊으려는 것은 아닙니다. 이점에서 망각은 우리의 삶을 가장 높은 긍정의 상태로 고양시킬 수 있는 힘이라고 할 수 있지요.
망각이 가져다주는 삶의 긍정과 새로운 생성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서, 마르크스(1818~1883)의 표현을 빌리자면 “신비한 껍질 속에 들어 있는 합리적인 알맹이를 찾아내기 위해서” 우리는 망각과 관련된 동양의 사유전통에 끈덕지게 매달려야만 합니다. 만약 동양의 사유가 철학적 사유로서 음미될 가능성이 아직 남아 있다면, 그것은 오직 망각과 관련된 쟁점에서일 것입니다. 기억이나 사유의 동일성을 옹호하는 이들에게는 불행한 일이지만 말이죠.
장자에 대한 연구사 자체가 그의 철학을 일종의 초월적 형이상학이나 상대주의나 회의주의 혹은 허무주의로 오해했던 역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두 종류의 오해는 장자가 주목한 비움이나 망각의 작용이 결국 타자와 마주치기 위한 일종의 필요조건이었음을 간과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울 이야기’에 주목하려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이 이야기는 장자의 비움이 형이상학적 초월이나 허무주의로 귀결되지 않음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지요.
지인(至人)의 마음씀은 거울과 같아 일부러 보내지도 않고 일부러 맞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대로 응할 뿐 저장해 두려 하지도 않는다.至人之用心若鏡,不將不迎,應而不藏,<莊子,應帝王>
장자가 이야기하는 지인이란 바로 과거에 대한 기억, 그리고 그 기억의 작용에서 가능해지는 미래에 대한 기대를 비워버린 주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인이란 일체의 허구적 매개없이 혹은 미리 사변적으로 정립된 본질 없이 직접적으로 타자와 직면해서 조우해야하는 삶의 주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 메를로-퐁티(1908~1961)라면 장자의 지인을 ‘시작의 주체’라고 규정했겠지요.
거울은 나무를 앞에 두면 그 나무를, 사람을 앞에 두면 그 사람을 그대로 비춥니다.
우선 거울은 때가 끼었든 맑든 간에 항상 무엇을 비추고 있는 마음을 비유합니다.
다시 말해 거울은 우리 인간의 삶과 마음이 세계-내적임 혹은 타자와 소통하는 것임을 나타내는 비유입니다. 두 번째로 거울은 과거에 대한 기억이나 미래에 대한 기대를 갖지 않고, 철저하게 현재 마주친 타자를 자각하는 마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장자는 과거에 대한 기억이나 미래에 대한 기대가 현재의 지각을 왜곡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비움(虛)’이나 혹은 ‘망각(忘)’이라는 개념을 강조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장자가 권고하는 ‘비움’이나 ‘망각’이 앞으로 어떤 것도 비추지 않겠다는 허무주의적 의지로, 아니면 모든 것을 한꺼번에 비추겠다는 초월에의 의지로 독해해서는 안 됩니다. 장자는 우리에게 마음을 거울처럼 비워야 한다고 자주 말합니다.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가 삶에서 마주치는 타자와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집요할 정도로 자기중심적인 존재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결국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타자와 마주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느냐에 있다. 탈중심적 존재로서 지인이 되기 위하여 우리는 비움의 단계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고 하였다. 비움은 우리의 삶에 일종의 공백을 가져다 주는 것이라고 할 수있지요. 이런 공백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타자와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합니다. 이 점에서 공백은 타자를 담을 수 있는 열린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망각과 자유“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강신주박사지음,갈라파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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