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시미즘의 논쟁
쇼펜하우어는 삶의 손해가 이익보다 훨씬 크고 우리가 결코 우리의 초기 투자를 회복하지 못하는 나쁜 투기적 사업에 비교한다. 만약 우리가 엄격하게 우리의 이익에 따라 결정하는 순수하게 이성적 존재라면, 우리는 단적으로 삶이 즐거움보다 더 많은 괴로움을 창조한다는 이유에서 존재보다 무를 선호할 것이다.
그는 인간의 본질이 의지 또는 추구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의지 또는 추구는 무언가 결핍이나 결여가 느껴진 것인 욕망이나 욕구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결핍이나 결여를 감지할 때, 우리는 괴로움을 느끼는데, 이것으로 그가 의미하는 육체의 아픔(통증, 따가움, 쓰라림)이 아니라 불안과 불만 또는 불쾌함이다. 우리는 불안과 불만 또는 불편함이 그치도록 이러한(요컨대 음식이나 섹스에 대한)욕구들을 충족하기를 추구한다. 그것들을 충족하는 데서 가지는 즐거움은 결코 그리 오랫동안 지속되지 않고 순간적인 완화 형식을 취한다. 문제는 욕구들의 재생이며, 따라서 불안과 불만 또는 불쾌함이 다시 일어난다는 것이다. 욕구들이 항상적이자 고통의 원천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들을 충족하는 즐거움이 매우 짧기 때문에, 삶은 즐거움보다 괴로움에, 행복보다 고통에 존재한다.
삶의 고통은 단순히 결핍에서만, 즉 오로지 욕구의 감정으로부터만 발생하지 않는다고 쇼펜하우어는 주장한다. 또 다른 강력한 원천, 즉 권태로부터도 온다. 욕구가 활동의 과도함, 즉 추구의 수고와 곤란함을 낳는다면, 권태는 활동하지 않음의 과도함, 즉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의 불안과 불만으로부터 온다. 권태는 욕구만큼이나 고통의 원천이라고 쇼펜하우어는 주장한다. 권태로울 때 우리는 절망한다. 우리는 어떻게 지내야 할지 알지 못한다. 우리의 바로 그 현존재가 짐이다.
욕망의 분석은 우리의 삶이 욕구와 권태 사이에서 동요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우리가 어느 쪽을 느끼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욕구를 얼마나 느리게 또는 얼마나 빠르게 충족하는가에 달려 있다. 만약 우리가 욕구를 너무 느리게 충족한다면, 우리는 결핍의 느낌을 연장한다. 그러나 그것을 너무 빠르게 충족한다면, 우리는 권태를 겪는다. 어느 경우든 우리는 너무 많은 활동의, 아니면 너무 적은 활동의 고통을 겪는다. 이러한 끔찍한 상태들은 서로를 잡아먹는다. 권태로울 때 우리는 간절히 우리 욕망의 대상들을 추적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빠르게 우리를 소진시키는 그러한 추적의 한가운데서 우리는 안식을 갈망하는데, 그러한 안식은 즉각적으로 또다시 권태를 낳는다.
우리는 욕구를 느낀 후 우리의 정상적 조건으로 되돌아올 때만 즐거움을 느낀다. 하지만 일단 그러한 정상적 조건에 있게 되면, 우리는 즐거움의 어떠한 특수한 감정도 지니지 못한다. 우리는 오직 우리가 지니는 것을 상실할 때만 그것을 높이 평가 한다. 그래서 삶의 비용과 이익의 계산에서는 오로지 끊임없이 더해지는 괴로움만이 생기는데, 왜냐하면 오로지 괴로움만이 적극적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즐거움은 영과 같다.
욕망의 삶에 완전히 새로운 차원을 덧붙이는데, 쇼펜하우어의 예는 야망이다. 우리는 아주 적은 인정에는 만족하지 않는다. 우리는 명성을 획득하기까지 더욱더 많은 인정을 요구한다. 그리고 일단 조금 유명해지게 되면, 우리는 더 유명해지기를 원한다. 쇼펜하우어는 스토아 전통과 에피쿠로스 전통이 좋아하는 표적이었던 돈이나 권력에 대해서도 같은 예를 들었다. 이것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것을 더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더 많은 것을 원하며, 우리가 얼마나 많이 원하는가 하는 것에는 한계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것을 충족시키는 것은 더 어려워지며 따라서 불만의 느낌이 더욱 커질 뿐이다.
쇼펜하우어는 성이 인간 본성에서 가장 강력한 충동, 즉 사람들이 종종 사랑과 아이들을 위해 스스로 희생하는 것을 고려하면 자기 보존보다 훨씬 더 강력한 충동이라는 것을 명확히 한다. 이 성 충동은 맹목적이고 비이성적이며, 우리가 전혀 저항할 수 없는 끝없는 고통의 원천이다. 우리는 비록 그것이 우리에 대해 파괴적일지라도, 그리고 그것의 충족이 덧없고 순간적일지라도 그것에 굴복한다. 우리는 사랑이 우리에게 즐거움들 가운데 커다란 것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 욕구를 충족하자마자 환멸이 시작된다. 우리는 어떤 가르침을 배우기보다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고집하는데, 왜냐하면 우리의 욕망이 다시 생겨나고 우리는 그것들에 저항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 스스로가 사랑에 대한 추구 배후의 행위자들이라고 생각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실제로는 다만 우리를 통제하고 우리를 자기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더 고차적인 힘의 도구일 뿐이다. 이러한 더 고차적인 힘은 삶에의 의지다. 그리고 그 목적은 다름 아닌 현존재 그 자체, 삶의 단순한 계속이다.
우리의 하루 대부분 동안 우리는 욕구를 충족하고, 권태를 피하며, 또는 성적 욕구를 진정시키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다만 우리가 내일도 우리의 노력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발견할 뿐이다. 우리는 우리가 고뇌의 순환에 사로잡혀 있음을 안다. 그러나 우리는 불가능하지는 않다 할지라도 그로부터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을 발견하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궁지에 빠트리는 바로 그것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가 표현하듯이 그것은 흡사 우리가 “익시온의 회전하는 수레바퀴 위에 놓여 있고 ~ 다나이데스의 체로 물을 긷고 있는” 것과도 같다.
삶의 가치에 대한 뒤링의 견해
뒤링에 있어 실증주의자는 무엇보다도 우선 존재, 즉 “사실성” 또는 “실증성”에 대해 긍정적 태도를 지닌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증주의자는 이 삶의 사실들을 궁극적 현실로서, 존재의 유일한 형식으로 서 바라보며, 그래서 우 는 안 된다. 우리는 오로지 이 삶에서만 구원을 추구해야 하며, 우리는 우리의 유일무이한 삶인 지상에서의 삶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최고선은 지금 여기서 추구되어야 한다. 뒤링은 삶을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한 전략으로 간주했다. 낙관주의자가 삶의 어두운 측면에 눈을 감는데 반해, 그리고 페시미스트가 삶의 단념을 충고하는데 반해 오로지 실증주의자만은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그것을 정복하기 위해 스스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하며, 그래서 우리는 더 나은 세계에서 살 수 있다.
뒤링은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가장 중요한 감정들이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회적 감정들 중에서 두 가지, 즉 명예와 사랑이 삶에 가치를 주는데서 특히 중요하다고 뒤링은 생각한다. 명예는 타인들의 인정에 의존하는 우리의 자존감이다. 명예는 부당함의 원천, 타인들을 능가하고자하는 경쟁의 형식 또는 자기애가 아니라 다만 정의에 대한 자아의 주장, 자기가 마땅히 받아야 할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요구일 뿐이다. 누군가가 위대한 성취로 고무되는 것은 오직 자기의 힘과 자존감을 느끼고 싶어하는 욕구에 의해서일 뿐이다.
사랑은 삶의 가치를 주는 데서 명예 못지않게 중요하며, 그것도 역시 재평가를 필요로 한다고 뒤링은 주장한다. 쇼펜하우어는 마치 성적인 욕망이 고통의 원인이라는 듯이 사랑의 괴로움을 과장했다. 그러나 사랑은 주로 괴로움이나 심지어는 즐거움과 괴로움의 혼합물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즐거움에 존재한다고 뒤링은 논증한다. 사랑의 유일한 괴로움은 “가벼운 불안의 부드러운 틈새바람” 자연은 사랑의 갈망을 우리가 그 안에 포함된 괴로움의 요소를 거의 감지하지 못하는 그러한 강렬한 즐거움으로 만들었다.
만약 삶이 대부분의 사람에게 있어 비참한 일이라면, 그것은 쇼펜하우어가 생각했듯이 욕망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소유와 생산의 역사적 체계 때문이다. 따라서 존재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정치적 행동에 놓여 있다.
실러와 괴테, 헤르더와 낭만주의자들에 있어 자연과의 접촉은 인간을 재생시키고 영감을 불어 넣는다. 자연에 의지함으로써 우리는 문화의 산물인 삶의 고된 일과 절망에서 벗어난다. 문화가 우리를 나누는 데 반해, 자연은 우리를 회복하며 우리를 다시 전체로 만든다.
타우베르트는 하르트만이 삶의 즐거움을 계산하는 데서 우리가 자연으로부터 끌어내는 것들을 고려하지 못했다는 것을 참이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그 경우 그는 또한 자연에 의해 야기된 고통, 즉 화산, 지진, 허리케인, 홍수 등도 언급하지 않는다고 그녀는 덧붙였다. 자연은 단지 우리를 치유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은 우리를 파괴하기도 한다.
타우베르트는 계속해서 만약 우리가 자연을 아름다운 것으로 발견한다면, 그것은 다만 우리가 우리의 감정과 목적을 그 안에 넣어 읽기 때문일 뿐이라고 말했다. 자연의 평화와 고요함 그리고 조화는 실제로는 다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진정시키고 사로잡기 위해 창조하는 환상일 뿐이다.“웃음 짓는 초원”은 “도시의 고뇌”만큼 많은 고통을 숨기고 있으며, “밤의 평화”는 포식자가 먹이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다. 멀리서 보이는 숲의 경관은 아름답고 행복감을 줄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 사는 생물들이 도시의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환상이다. 숲에는 도시에서와 마찬가지로 공포의 욕구 그리고 투쟁이 존재한다.
타우베르트는 자연에서의 즐거움을 허구로 간주했는데, 왜냐하면 그녀가 보기에 그것은 자연적 감정이라기보다는 문화적 구성물이기 때문이다. 자연에서의 즐거움은 매우 근대적인 현상, 즉 낭만주의 세대와 근대 문화에 대한 루소의 반란의 산물이라고 그녀는 지적했다.우리가 자연으로부터 즐거움을 끌어내는 것은 오직 우리가 그것에로 되돌아가길 원할 때뿐이다. <“헤겔이후“ 독일 철학 1840~1900, 헤겔총서 6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프레드릭 바이저 지음,이선철님 옮김, 도서출판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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