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 개념에서 키에르케고어는 겉보기에 일상적인 인간적 현존의 가장자리에 있는 현상, “만약 당신 자신이 스스로 내일에게 당신의 힘을 부여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내일은 무력한 무(無)일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미래가 우리를 불안으로 채운다고 말한다. 하지만 또한 불안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우리 자신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미래는 (아직)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정하고 근심하는 미래는, 미래에 관한 우리 생각의 생각들로 가득 차 있는데, 바로 이 생각들이 아마도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만들고 있을 것이다.
키에르케고어는 불안이 어떤 사람을 ‘엄습하는’ 것, ‘옥죄는 것’ 불안이 포괄적이면서도 불확정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에 주목한다. 불안 속에 있는 사람이 “자기 자신과 분투하고 있다”는 사실도 덧붙인다.
불안은 한낱 비일상적인 현상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모든 인간적인 삶에 속해 있는 요소이다. 불안의 결정적인 특징을 명확히 하기 위해, 키에르케고어는 불안과 두려움을 구별한다. 두려움은 어떤 특정한 것에 관계하고 있는 반면, 불안은 특정한 대상을 갖고 있지 않다. 불안의 대상이 ‘무’라고 해서 불안이 어떤 상황과도 관계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불안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상황과 관계하고 있다. 불안은 미래를 향해 있다. 두려움도 물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미래는 불안 속에서 보다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프란츠 카프카는 여행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여행에 대해 끔찍할 정도로 불안하다. 이번 여행에 대해서만 아니다. 나는 여행은 물론, 일체의 변화에 대해 불안해한다.” 변화가 크면 클수록 불안도 커진다. 하지만 이것도 단지 비교적으로 얘기해서만 그렇다. 만약 나 자신을 극도로 작은 변화에 집중하여 국한시킨다면--물론 삶이 이를 허용하지 않겠지만---, 내 방안의 책상을 옮기는 일도 결국에는 여행 못지않게 경악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최종적인 근거 혹은 바로 그 직전에 있는 근거를 두고 볼 때, 그것은 진정 죽음에 대한 불안일 뿐일 것이다.
불안은 시간을 어떻게 체험하는가와 연관되어 있다. 시간의 변화에 대한 대표적인 예로, 나이 들어 늙어 가는 일을 들 수 있다. 만약 나이가 들고 나서 어린 시절에 보낸 장소들을 다시 찾는 다면, 우리는 묘한 경험을 하게 된다. 우리자신은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리는 동안, 그 장소들 또한 변한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부모의 죽음이나 친구의 우정이 끊어지는 것과 같은 결별을 겪으면 우리 삶이 바뀌게 된다. 한 사람이 살면서 겪을 수 있는 또 다른 변화는 자식들이 커가는 것을 보는 일이다. 자식들은 성장하면서 자기 나름의 삶을 찾게 되고, 부모는 이를 지켜보면서 이들의 삶에 동참하고픈 희망을 갖게 된다.
성장하여 어른이 되는 것과 늙어가는 것, 이들은 우리 자신이 변화하는 것에 따라, 우리가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 두 가지 방식이라 할 것이다. 바로 이곳이 불안이 나타날 수 있는 지점이다. 키에르케고어는 시간의 변화라는 것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상실하게 될”정도의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불안속에서 우리는 세계로부터 떨어져 나오면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우리 자신과 연관되어 있는 세계가 친숙함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불안을 통해 드러난 사실은, 우리가 저절로 우리 자신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자신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한 인간은 과거와 미래 사이의 관계가 갖고 있는 긴장 속에 놓여 있다. 인간의 근본적인 과제는, 시간이 부분들로 분리시키고 있는 자신의 삶이 하나의 연관성을 이루도록 만드는 일이다. 따라서 이때의 종합이란 바로 시간 안에서의 종합이다. 관계는 언제든 실패한 관계가 될 수 있다. 미래가 완전히 닫혀버릴 만큼 과거의 부담이 커질 수 있으며, 아니면 반대로 인간이 자신을 위한 것으로 떠올리는 가능성이 일체 아무런 현실적 무게가 없는 것, 즉 “환상적인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키에르케고어는 이렇게 말한다. “불안은 가능성을 위한 가능성으로서의 자유의 현실성이다”
불안은 자유의 가능성이 드러나는 경험이다. 달리 말하면, 불안 속에서 한 인간은 자기 자신의 자유를 가능성으로서 발견하게 된다.
절망은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지 못하는데 있다. 키에르케고어는 절망의 세 가지 기본 유형을 구분하고 있다. 첫 번째는 자신이 절망하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무지 상태의 절망이다. 두 번째는 절망하고 있으면서, 자기 자신이 되려고 하지 않는 방식의 절망이다. 세 번째는 절망하고 있으면서, 자기 자신이 되려고 하는 방식의 절망이다. 절망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가지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하는데 있다는“(죽음에 이르는 병,8) 데에 있다.
우리는 우울함을 간접적으로 마음의 균열된 상태라 묘사할 수 있다.
인간은 선을 원하고 있다. 하지만 전적으로가 아니라 유보적으로 원하고 있다. 키에르케고어는 마음의 균열된 상태가 취하게 되는 여러 가지 유형을 구분한다.
첫째로 인간은 자신에게 결과로 나타나게 될 것을 위해서 선을 원할 수 있다. 가령 어떤 보상을 위해서 원할 수 있다.
둘째로 인간은 어떤 처벌의 두려움으로 인해 선을 원할 수 있다.
셋째로 인간은 자기 자신을 통해서 선이 승리하게 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선을 원할 수 있다. 이 경우 선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유지하고 내세우는 데 사용되는 것이다.
네 번째는 바로 일정 정도까지만 선을 원하는 것이다. 마음의 균열된 상태는 선을 전적으로 원하지 않고 일정 정도까지만 원하는 것이다. 이러한 균열 상태는, 예컨대 세속적인 분주함 속에서 드러날 수 있다. 세속적인 분주함 속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집중하기 위한 시간과 평온함을 가질 수 없다. 인간은 아마도 자기 자신이 이러한 분주함의 희생물이라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럼에도 스스로 이러한 분주함을 찾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세속적 분주함이란 바로, 인간이 자기 실존의 과제를 삶으로부터 멀리 떼어놓은 한 가지 형식이 될 수 있다. 떠 다른 예로, 균열 상태는 선에 대한 감정을 통해서도 드러날 수 있다.
키에르케고어는 균열 상태 내지 변덕스러움을 절망과 동일시하고 있다. 어쩌면 절망한다는 것은 다름 아닌 두 개의 의지를 갖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종교적 강화⌟36) 거꾸로 말해서, 이것이 인간이 균열 상태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자유롭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지 못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우리는 균열 상태에 대한 묘사를 확장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마음의 균열 상태는--인간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 선을 행해야하는 것이어서--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사랑이 그 자신 안에서 변모되면서, 사랑은 증오가 된다. 증오 안에서도 사랑의 열정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기는 하다. 불안에 가득찬 상태에서, 증오에서처럼 사랑이 내적으로 변화하게 되면, 사랑은 질투가 된다. 반면에 사랑이 익숙한 습관이 되면, 사랑은 변화하면서 이를테면 자기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오게 된다. 습관이 되면서, 사랑의 열정은 사라진다.
불안은 뭔가에 의해 사로잡힌 상태의 자유일 뿐 아니라 일종의 부자유이기도 하다. ‘자기 자신을 획득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상실할 용기를 갖고 있어야 한다(죽음에 이르는 병,67) 불안과 절망의 부자유 속에는 인간이 자기인식에 대해 저항하고 있다는 사실이 함축되어 있다.
한 인간이란 대체 어떤 존재인가? 한 인간은 바로 인간으로서 “참으로 실존하고 있는 상태”에 있는 존재이다. 확실히 인간은 상이한 방식으로 실존할 수 있다. 따라서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진정으로 실존할 수 있는가이다. 인간이 실존한다는 당연한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 어떤 것이 있음에 틀림없다. 그 어떤 것이란 바로 우리가 실존하고 있음을 망각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실존하는 개별자에게는 전체적으로 두 가지 길이 놓여 있다. 한편으로 개별자는 자신이 실존하고 있다는 것을 망각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일 수 있다. 그가 이를 통해 도달하는 것은 스스로가 우스꽝스럽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이 아닌 것이 되길 원하는 것은 인간이 새가 되길 원하는 것만큼이나 웃기는 일이다. 마치 경우에 따라 실존하는 양 말이다. 그가 잊은 것은 자신의 이름이라기 보다 자신의 고유한 본질일 것이다. 실존이란 특이한 본성을 갖고 있는바, 실존하는 자는 스스로 원하건 원하지 않건 실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개별자는 자신이 모든 주의력을 자신이 실존하고 있는 상태에 있다는 사실 자체에 집중할 수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풍부한 지식에 힘입어’ 잊어버렸다. 실존의 문제는 주어진 과제 속에, 즉 실존함이 실존하는 개별자 자신에게 부과하는 과제 속에 놓여 있다.
인간의 실존함은 두 가지 근본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로 인간은 실존하는 자로서 진행되는 과정 속에, 생성과정 속에 있다. 둘째로 인간은 스스로 실존하는 과정 속에서 하나의 문제 혹은 과거에 직면해 있는 셈인데. 이는 인간이 늘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맺음 속에 놓여 있음을 말한다. 이 두 가지 근본적인 특징이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과제 속에 결합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실존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답변, 인간이 이 답변을 찾는 길은 오로지 인간 자신이 실존함에 놓여 있는 문제와 어려움을 스스로 이해하는 길뿐이다.
불안은 뭔가에 의해 사로잡힌 상태의 자유일 뿐 아니라 일종의 부자유이기도 하다. 자유가 갖고 있는 첫 번째 의미는 부자유를 지양하는 데에 있다.
진정한 긍정적 자유를 규정하기 어려운 것은 이러한 긍정적 자유가 부자유의 경험에 대한 응답이라는 점과 관련되어 있다. 자기 자신을 자유롭지 못하게 만드는 경험에 대한 응답이라는 점과 관련되어 있다. 진정한 자유는 이러한 부자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를 반드시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두 번째로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상실‘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기 자신은 그 자신이 되기 위해서 부서지지 않으면 안 된다“(죽음에 이르는 병,65) ‘자기 자신을 획득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상실할 용기를 갖고 있어야 한다(죽음에 이르는 병,67) 불안과 절망의 부자유 속에는 인간이 자기인식에 대해 저항하고 있다는 사실이 함축되어 있다. 이러한 저항이 겉에 명백히 드러나 있을 필요는 없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인정하지 않고 있을 때, 이 상태는 종종 자신이 누구인지를 안다고 여기는, 바로 그 생각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다.
인간은 정상적인 것의 확실함이나 반항하는 태도 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또 이를 믿고 있을 수 있다. 후자인 반항하는 태도의 경우, 인간은 자기가 생각하는대로 자기 자신을 소유하고자 한다. “자기 자신을 마음대로 지배하고자”하며,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죽음에 이르는 병,68 이하)
이에 따라 자신이 “부셔져 버렸다”는 것은 인간이 자신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이 붕괴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려지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은, 인간이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상상한, 그러한 ‘자기 자신을 상실할 것’을 요구한다.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는 일을 요구한다. 인간은 우선적으로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것, 자신을 재 인식하는 일을 배워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자기 상실이 요구되는 것일까? 인간이 자신을 상실한다고 말할 때, 두 가지 의미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첫 째로 인간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 더 이상 자기 자신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두 번째로 인간은 스스로 자유롭지 못하게 만들면서 ‘자기 자신을 상실할 수 있다.’ 이 때 인간은 자신이 스스로 행하는 일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간이 자기가 되고자 하는 관념 속에 매몰되어 자신을 상실하게 될 때가 그러한 경우이다. 또한 “다른 사람들처럼 되기 위해”자기 자신을 망각할 때도 그렇다.
두 번째 의미에서 ‘자기 자신을 상실하였고’. 동시에 이러한 상실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면, 인간은 자기 자신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인정해야 한다.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과 결합하여 함께 성장한다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을 재인식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서는 첫 번째 의미에서 인간이 ‘자기 자신을 상실하는’일이 요구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자기 자신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점, 바로 자기 스스로 행한 바에 의해서 자기 자신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상실한다는 이 엄청난 위험은 이 세상에서 마치 전혀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아무런 기척 없이 진행될 수 있다. 가령 아내를 상실하는 일은 당연히 분명하게 느껴지지만 말이다."(죽음에 이르는 병,29)
자기 자신을 상실하는 일은 가장 큰 위험이자 대단히 경악스러운 일이다.
키에르케고어는 자주 ⌜마태복음⌟16장26절을 인용한다..“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영혼에 손상을 입는다면, 도대체 무엇이 유익하리요.” 자기 자신을 상실하는 것은 자신의 영혼이 손상을 입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용기와 희망을 포기할 정도로 자기 자신을 딱딱하게 굳어지게 만드는 것을 뜻한다. 키에르케고어는 이러한 자신에 대한 포기가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 “온 세상을 얻는 것”과 은밀하게 함께 진행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심지어 그는 세상에서 성공하는 일이 어쩌면 바로 자신을 포기하는 대가일 것이라고 말한다.
<"키에르케고어의 인간학" '불안과 함께 살아가기‘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아르네 그뤤지음, 하선규님 옮김, 도서출판b>
<사과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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