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적인 마음의 철학을 창시한 것은 데카르트였다.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을 의심해 보았지만, 결국 자신이 의심한다는 사실만큼은 의심할 수 없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 한다”라는 말이 나왔다. 데카르트는 최초의 ‘이원론자‘였다. 데카르트 이후 400년 동안 의식논쟁이 이어졌다.
마음-뇌 동일론에 따르면, 즉 감각질이란 신경들이 취하는 특정 상태와 같다. 따라서 이 이론은 데카르트의 마음-몸 이원론을 배격하고, 부수 현상론도 배격한다. 마음과 뇌는 둘 다 실재하는 것이며 사실 같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한다. 철학자 조지 버클리 주교의 극단적 관념론에 따르면, 마음과 사상은 실재하는 것인 반면에 물질은 그저 하느님의 마음속 경험으로서만 ‘승인’된다. 버클리와 정반대 입장을 취한 것은 아우구스티누스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물질은 실재하는 것인 반면에 물질에 대한 인식은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교감에 의해서만 가능한 현상이라고 보았다. 이쯤 되면 철학자 존 설의 말이 옳은 것 같다. 그는 우리가 의식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의식이 무엇인지 아는 게 어떤 것인지 조차 모른다고 했다.
영혼을 믿는 사람들은 의식에 영혼이 들어있다고 생각하거나 아예 의식과 영혼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가톨릭교회가 최근 진화론을 수용한다고 선언하면서도 육체의 진화에 대해서만 인정한다고 조심스럽게 한계를 그은 것도 그 때문이다. 마음의 진화는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의식에 대한 정의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해석이 다르다.
생명은 우주에서 자연적으로 생겨난 현상이고, 아마도 여러 장소에서 생겨났을 것이다. 지구에서는 지각이 충분히 식혀서 액체형태의 물이 존재할 수 있게된 약 38억 년 전에 생명이 자발적으로 생겨난 것이 거의 분명하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가 우주의 신비로운 창조성에 기반하여 신성을 재 발명하려면, 우주에서 생명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자연적 원인으로 설명하는 일이 최우선 과제이다. 생명이 다중의 물리적 플랫폼으로 구현될 수 있다는 것은 거의 확실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생명은 어느 특정한 물리학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생명은 존재론으로 창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우주의 생명들에 두루 통용되는 보편 생물학이 존재하는듯하다는 사실은 참 경이롭다.
원자이상의 복잡성에는 늘 인접한 가능성으로 흘러들어가는 흐름이 생겨난다. 분자도, 종도, 기술도, 인류역사도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우리 삶에서 매일 다원주의적 전 적응과 유사한 현상들이 벌어지는 데도 우리에게 그것을 예측할 능력이 없다면, 우리는 이성의 역할을 재고해야 마땅하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향해 살아갈 때 이성만을 길잡이로 삼아서는 턱없이 부족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성은 신비로운 전체성을 띤 삶의 한 부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는 정말로 수수께끼 속으로 살아나간다. 그러므로 결국에는 우리자신도 우리가 재발명할 신성의 일부이다.
생물학이 물리학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또 다른 확실한 증거는 자연선택 그 자체이다. 다윈은 생식 생리학이나 변이를 수반한 유전의 근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오늘날 우리는 다윈보다 훨씬 많이 안다. 아마 앞으로 수백년동안 우리는 분자적 재생산을 재현하는 것은 물론, 생명 자체를 재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자들은 벌써 자기 재생산적 DNA계와 단백질 계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다윈주의 적 전 적응에 따른 생물권의 진화에서는 겔만(노벨물리학수상자)식의 법칙이 없다. 다윈의 ‘종의 기원’에는 수식이 하나도 없지만, 자연선택 법칙은 온전히 수학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생물학은 물리학에서 창발했다. 그리고 생명, 행위주체성, 가치, 의미, 의식 등은 생물권의 진화과정에서 창발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우주는 *환원주의로만 채색된 우주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뿐이다.
38억년의 진화 끝에 오늘날 살아있는 세포들이 얼마나 짜임새 있고 통합적인 복합성을 띠게 되었는지 생각해보라. 살아있는 세포는 창조주나 전지전능한 어떤 손길이 만들어 낸 게 아니라 진화하는 생물권이 독자적으로 진화시켜 낸 것이라는 해석이 더 멋지지 않은가? 우리가 신이라는 단어를 써야 할 필요는 없지만 삶의 길잡이가 되는 개념에 대해 그 단어를 쓰는 것이 현명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생명의 긴 역사를 통해서 수수께끼에 직면한 채로도 이럭저럭 살아가게 해 주는 여러 도구를 얻었다. 그런 도구들은 우리가 이제 신이라고 부르는 우주의 창조성이 우리에게 준 선물이다.
우리는 인간성을 새롭게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과정에서도 공통의 기반을 닦을 수 있다. 그런 노력을 통해서 모두가 의미, 공동체, 위안, 존경, 영성, 관용, 아량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은 인류의 문화적, 도덕적, 영적진화에서 다음단계라고 부를 만큼 방대한 작업이므로 여러 세대에 걸쳐서 해야 할 일이다.
우리는 함께 신성의 재 발명에 나서지 않으면, 온 세계가 원리주의로 후퇴하는 상황이 올 것이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신은 자연의 전개 그 자체로서의 신이다. 이 신은 스피노자의 신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스피노자와는 달리 우리는 자연법칙이 모든 것을 다스린다는 갈릴레오 식 믿음을 부분적으로 넘어서야 한다. 자연의 창조성은 부분적으로 법칙을 벗어난다. 그러나 법칙을 따르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 또한 자연의 창조성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의 개념을 더 넓혀야 할지도 모르겠다. 자연의 창조성만이 아니라 법칙을 따르는 부분과 부분적으로 법칙을 넘어서는 부분을 모두 아우르는 자연 전체를 뜻하도록 정의해야 할지 모르겠다.
우리는 부단한 삶과 문화를 창조하며 아직 형태가 모호한 전 지구적 문명을 향해 나아간다.
우리는 세상을 창조하고 있다. 우리 스스로의 발명품인 생산적인 문화의 창조성을 온전하게 인정하는 것, 이 또한 신성을 재발명하는 작업이다.
우리가 다함께 공통의 가치체계를 창조할 가능성이 열렸다. 우리가 스스로 지구윤리를 선택하고, 영성을 선택하고, 신성을 선택할 가능성이 열렸다. 그러니 주저 없이 나서자. 지구를 위해, 모든 생명을 위해서, 우리 자신을 위해서, 지구윤리를 찾아내고 신성을 재 발명하자!
*환원주의 : 사회는 사람들로, 사람은 기관들로, 기관은 세포들로, 세포는 생화학으로, 생화학은 화학으로, 화학은 물리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 물리학이 가장 기본적인 과학이고, 다른 모든 과학들은 궁극에는 물리학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생명의 기원’,‘저절로 생기는 질서’, ‘비에르고드적 우주’,‘경제의 진화’ 등은 요약 발췌생략)
<“다시 만들어진 신” ‘카우프만 신성의 재 발명을 제안하다’ 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카우프만(현, 버몬트대 생물 물리학 교수)지음. 김명남 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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