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자료

'꼭두각시의 영혼'~ 내면의 자유!

[중산] 2017. 3. 15. 08:43

 

 

 <진달래,산수유>

 

꼭두가시는 억지로 꾸미는 능력이 없습니다. 줄을 조종하는 사람이 통제하는 단 하나의 지점 말고는 다른 중심점이 없기 때문에 인형의 팔다리는 모두 그것들이 존재해야 하는 대로 존재합니다. 죽은 채로, 단지 중력의 법칙에만 복종하면서 흔들거리는 것이지요.

 

현대사회에서 자유는 대개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서 행사되는 자유를 뜻한다. 이런 의미의 자유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다른 이의 방해 없이 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하기도 한다(소극적 자유). 클라이스트 같은 사상가들은 자유가 단지 인간 대 인간의 관계만을 말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들에게 자유는, 무엇보다도 영혼이 갈등을 벗어난 상태를 의미했다.

 

고대 유럽의 스토아학파는 자기분열을 겪는 주인보다 노예가 더 자유로운 존재일 수 있다고 여겼다. 중국의 도교는 여러 가지 대안들의 경중이나 유 불리를 고려하지 않고 그저 되어 가는 대로 세상사의 흐름에 반응하는 현자를 상상했다. 이와 비슷하게 일신교 신자들도 신의 의지를 믿고 따르는 것이 자유라고 보았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열망하는 것은 선택의 자유가 아니라 선택으로부터의 자유였다.

 

반면, 내면의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내면으로 침잠하는 것을 정부가 막지 않는 한 어떤 종류의 정부가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이기적인 태도로 보이지만, 만성적으로 불안정한 시기에는 매우 합리적인 태도이기도 하다. 정치체제가 영구히 존재하리라고 기대 할 수 없는 상황 말이다. 유럽의 고대 말기가 그런 시가였다. 이때는 기독교가 그리스-로마 철학 및 신비주의 신앙들과 대립했다. 그런 시기를 또 하나 꼽으라면 오늘날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날에는 정치적 신념들이 약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종교적 신념이 되살아나 과학의 신념과 대립하고 있다.

 

과학이 말해 주지 않는 것

기계가 지난 1천 년간 이룬 발전은 얼마나 놀라운가? 우리는 의식적인 기계를 보면서 영혼 없는 기계가 그저 인간의 의식을 잘 모방하고 있을 뿐이라고 여기게 될까? 아니면 우리는 그것들이 우리의 자아인식과 비슷한 것을 가진 존재라고 인정하게 될까?

 

오늘날 과학보다 권위 있는 것은 없다. 과학은 탐구의 방법이지, 세계관이 아니다. 지식은 가속적으로 성장하지만, 과학이 진보한다고 해서 물질주의가 진리인지 거짓인지,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를 설명해 줄 수는 없다. 세계가 물질로 구성돼 있다는 믿음은 형이상학적 가정이지, 검증가능한 이론이 아니다. 과학의 성공은 과학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우주 중 카오스가 아닌 극히 일부에 살고 있기 때문 아마도 실재를 더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은 인간 정신의 무질서일 것이다.

 

 

인간만이 자기의식을 갖는 존재라는 데는 근거가 없다. 침팬지는 소중한 상대가 죽으면 인간처럼 슬퍼한다. 이 동물들은 자신이 어떤 종류의 생명체이며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지 못한다고 반론을 펼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점에서 인간이라고 다른가? 의식을 신비한 것이라고 보는 개념은 유일신교에서 전해진 편견이다.

 

 

17세기 초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는 인간 이외의 동물은 감각 없는 기계라고 여겼다. 이는 인간만이 영혼을 갖는다고 본 기독교적 합리주의를 반영한다. 데카르트는 자신의 이론을 증명하기 하기 위해 창밖으로 동물을 던지고서 그 반응을 관찰했다고 한다. 이런 행동을 보면, 지각없는 기계라고 볼 수 있는 쪽은 인간이 아닐까. 데카르트는 인간만이 정신을 가진다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 정신이 자신의 행동을 항상 인지하고 있다고 믿었다. 인간에게서도 의식은 그런 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삶의 대부분은 수면 상태로 지나가며, 깨어 있을 때도 우리는 잊힌 꿈들에 반쯤 사로잡혀 살아간다. 늘 자신의 행동을 인지하고 있기는커녕, 정신은 자신이 하는 일의 대부분을 알지 못한다. 신비한 것은 의식이 아니라 지각하는 모든 존재가 경험하는 감각이다. 자아의식이 있는 존재든 아니든 간에, 어느 생명체든 어느 정도는 자신이 창조해 낸 세상에 살고 있다.

누구도 이 창조의 과정이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알지는 못한다. 앞으로 누군가 알게 되리라고 볼 근거도 없다.

 

사람들은 자유의지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인간만이 가질 수 있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자유의지가 우리에게만 존재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도그마의 또 다른 사례일 뿐이다. 이런 도그마는 과학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 세계와 분리되어 있다고 보는 종교에서 나온 것이다.

 

 

인간의 특성은 의식이나 자유의지가 아니라 내면의 갈등이다. 상충하는 충동들이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분열시킨다. 다른 동물들은 욕망의 만족을 추구하면서 그와 동시에 욕망을 악이라고 저주하지 않는다.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자신의 이미지를 보존하기 위해 죽을 준비가 돼 있는 동물도 인간뿐이다. 꿈을 위해 동족을 죽이는 것도 인간뿐이다.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자아의식이 아니라 자아분열이다. 이런 분열이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지는 불분명하다. 이에 대해 설득력 있게 설명해주는 과학 이론은 없다. 가장 좋은 설명은 여전히 창세기다.

 

꼭두각시를 위한 윤리

 

꼭두각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꼭두각시는 이런 선택을 내릴 수 없다고 여겨질지 모른다. 하지만 위버-마리오네트(진화의 결과로 자기인식을 갖게 된 꼭두각시 같은 존재)는 마치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결정하는 듯이 살 수밖에 없다. 이들은, 때로는 관조의 상태로 전환해 자신의 삶을 그저 주어진 것으로 바라볼 수도 있겠지만, 행동을 할 때는 반드시 자신이 자유롭다고 느끼게 된다. 위버-마리오네트(진화의 결과로 자기인식을 갖게 된 꼭두각시 같은 존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하나로 환원할 수 없는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이 생각하는 꼭두각시들은 어느 면에서 보면 모두 똑 같기 때문에, 어떤 가치들은 보편적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도덕은 삶의 기술이었다. 그들에 따르면, 번성하려면 인간에게는 미덕이 필요하다. 정신과 성정의 상태가 나쁘면 좋은 삶을 영위하는데 방해가 된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의 사고에 ‘악’의 개념 은 없었다. 소크라테스는 자연의 속성을 아는 사람이라면 선하게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인간이 좋은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무지하기 때문이라는 믿음은 현대에도 되살아났다. 과학 지식이 증가하면 인간의 선함도 증가할 것이라는 믿음 말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에게 이 믿음, 즉 지식에 구원의 힘이 있다는 믿음은 형이상학적인 것이었다. 현명한 사람이 선할 수밖에 없다면, 이는 그 사람이 감각의 영역보다 상위에 있는 완벽한 질서에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이었다. 이성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믿음은 진리와 선을 동일시하는 기묘한 개념을 바닥에 깔고 있었다. 기원은 잊혔거나 억압된 채로, 이 개념은 서구 합리주의의 기초가 되었다.

 

인간의 가치가 인간세계가 아닌 데서 왔다고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인간을 있는 그대로, 그러니까 영속적으로 투쟁하는 도덕을 가진 존재로 받아들여야 한다.

 

인간이 인간 내재적인 한계들을 결코 극복할 수 없으리라는 점을 이해했다는 데서 이 옛 도덕들은 현대의 도덕보다 우월하다. 인간이 자신을 잠재적인 신으로 여기게 된 것은 매우 최근이다. 고대의 사상가들은 더 현명했을 뿐 아니라 더 정직하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스토아주의적인 윤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은 수백 년 동안 로마를 다스린 황제들의 생각을 기록하고 있는데, 스토아 철학이 많이 담겨있다. 아우렐리우스도 우리가 문명이 이기라는 희망은 가지지 않은 채로 야만에 맞서 문명을 단호하게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독교가 승리하기 전에 살았던 아우구스투스와 아우렐리우스는 역사가 세상 전반을 아우르는 의미를 가진다고는 상상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건들의 경로 기저에 숨겨진 구원의 길이나 향상의 길이 놓여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가장 급진적으로 종교를 비판한 니체는 유일신이 미친 막대한 악영향을 한탄하면서도 그 자신이 유일신교의 악영향을 드러냈다. 워버멘슈(초인)라는 불합리한 인물은 역사가 인간의 의지의 힘으로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다는 환상을 구현한다. 초기 작품에서 비극의 감각을 되살리려 했던 니체는, 인간종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또 하나의 근대 프로젝트로 귀결됐다.

 

신이라는 개념을 거부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인류’(역사에서 구원을 추구하는 보현주체)또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은 고대의 윤리가 되돌아 올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다.

 

문명은 힘의 사용에 대한 제약을 의미한다. 하지만 고상하게 들리는 목적을 위해 쓰일 때 폭력은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진다. 아즈텍 사람들처럼 현대의 인류도 살육과 단단히 결합돼 있다.

합리주의자들은 계몽이 미신과 반동의 사악한 힘 때문에 꺾이고 있다고 본다. 여기에서 우리는 어떤 유형을 볼 수 있다. 정신에서 신비를 몰아내려고 하면, 필립 닥이 그랬듯이, 악마에 둘러싸인 망상증적 우주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인간 대 인간 사이에서의 자유는 인간의 자연적 조건에 맞지 않는다. 그 자유는 인간이 서로에게 불간섭을 실천해야 하는데, 이 기술을 배우는데 매우 오래 걸리고, 배웠다 해도 매우 빠르게 잊힌다. 오늘날 불간섭을 구현할 수 있는 제도(인신 보호 영장, 공개 법정, 법치 등)는 훼손되거나 버려지고 있다. 

 

인간이 자유를 발견할 수 있다면, 고대 사상가들이 높이 샀던 내면의 자유뿐일 것이다. 미래에 역사가 다시 반전하면 인간 대 인간 사이의 자유가 되돌아 올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로서,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도, 현실적으로 가능한 유일한 자유는 인간 각자의 내면에서만 이뤄질 수 있다.

 

그런데 내면의 자유는 오늘날의 시대정신에 가장 맞지 않을 법한 개념이다. 인간세계가 향상되고 있다는 일반적인 믿음에 의문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위안을 주는 이 믿음이 없다면 분명코 많은 이들이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가장 좋은 경로는 그들이 잠에 빠져 있게 두는 것이다. 하지만 용기 있게 정신의 반전을 기해 보려는 사람에게라면, 오늘날 내면의 자유가 무엇을 의미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는 것이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중력과 추락

 

영지주의는 기독교에 의해 궤멸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세상을 정복했다. 지식의 해방적 힘을 믿는 것은 현대 인류를 지배하는 환상이 되었다. 대부분 의 사람들은 그들이 겪는 모순과 갈등을 꿰어 주는 설명이 있으면 거기에서 구원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기인식과 자기 분열은 뗄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창세기 신화에도 나오는 진실이다. 인간의(에덴동산으로부터의)추락은 역사의 시작점에 발생한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자기인식적인 존재가 갖는 내재적인 조건이다.

 

인간처럼 오류가 있고 무지한 생명체만이 인간이 자유로운 방식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 우리는 물질이 어떻게 해서 우리의 세계를 꿈꿀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 꿈이 끝나서 우리가 죽고 나면 그 다음에 무엇이 올지 모른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니게 만들어 줄 지식을 열망 한다. 하지만 왜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려 하는가? 알지 못하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영지주의자들이 추구한 것과는 매우 다른 종류의 내면의 자유가 가능해진다. 이러한 소극적 수용 능력을 갖게 되면 더 높은 형태의 의식을 원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일상적인 정신만으로도 필요한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삶에 의미를 부여하려 애쓰지 않을 것이고, 의미가 왔다가 사라지게 두는 것에 만족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비틀거리지 않는 꼭두각시가 되는 대신 인간세계에 발부리를 부딪혀 가면서 길을 낼 수 있을 것이다. 위버-마리오네트(진화의 결과로 자기인식을 갖게 된 꼭두각시 같은 존재)는 자유로워지기 위해 꼭 날 수 있게 될 때를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하늘에 비상하기를 추구하지 않으면 땅으로 떨어지는 데서도 자유를 찾을 수 있다.

 

<인간의 자유에 대한 소고 ‘꼭두각시의 영혼’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존그레이(옥스퍼드대, 하버드대, 예일대 교수, 런던정경대학 유럽사상 교수로 재직), 김승진 님 옮김, 이후 출판>

 

                                                                                                          체리꽃

 

                                                                                                           바이오체리 꽃

                                                                                                              명자나무 꽃

                                                                                                 

'독서 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월든 호숫가에서의 삶~!  (0) 2017.05.24
여행에 대하여~!  (0) 2017.05.23
'인간의 굴레∥'대사 중에서~!   (0) 2017.01.06
신성의 재 발명  (0) 2016.06.02
삶의 가치  (0) 2016.0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