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분을 떠나보내면서~!
알을 깨뜨려 광활한 세상을 훨훨 날아 보지도 못하고 신에게로 날아갔습니다.
삼일 남짓 작별의 시간을 갖고 훌쩍 떠나갔습니다.
인간세상을 끝으로 신들께 아뢰는 평토제를 뒤로하고
무거운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함께 살아가는 삶의 공동체에 강한 충격파가 와 닿았습니다.
알에서 깨어나 비상하는 것은 자신의 몫이라지만, 곁에서
자유의지대로 훨훨 나는데 방해와 걸림돌이 되지 않았는지 안타까움과 비통함을 토로해봅니다.
부디 그 곳에서 편안히 영면하시길 기원합니다.
일곱 살 때였다.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어느 날, 엄마가 식탁에 앉아 오후 내내 울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이라고 아빠가 내게 말해주었지만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할아버지를 좋아했다.
어른이 된 후 나는 죽음을 명쾌하게 보려고 노력해왔다. 어쩌면 오래전 할아버지의 실종 미스터리에 대한 반발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선불교 스승인 다이닌 가타기리선사는 책에서 우리 인생은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다고 설파했다. 취약하기 때문에 더 소중히 다뤄야 한다는 것이다. “사기그릇은 언제나 깨지기 때문에 아름답다....사기그릇의 생명력은 늘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다.”
위태로운 아름다움. 우리의 고충은 여기에 있다. 죽음은 결코 피할 없다. 우리는 사라지기 때문에 아름답고 영원할 수 없어 고귀하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실을 늘 잊고 산다.
“당신의 삶은 앞으로 30년이 남아 있는가? 아니면 단 며칠만 남아 있는가?” 우리는 플랫폼에 서서 수시로 시계를 확인하며 멀리서 다가오는 기차를 기다리듯 죽음을 기다리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갑자기 헤드라이트 불빛을 맞닥뜨리듯 순식간에 죽음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그리스의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인간이 고통을 겪는 근본 원인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존재할 때는 죽음이 오지 않았고 죽음이 왔을 때는 우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는 전립선염으로 오랫동안 극심한 통증에 시달리다 72세에 사망했다. 그는 고통과 두려움을 철학적 명상으로 이겨냈다.
기력이 서서히 떨어지는 사람들 중엔 의식적으로 식음료를 끊겠다고 선택하는 이들도 있다. 이를 수의탈수증이라고 한다. 여러 문화권에서 금식을 종교 수행으로 인정하고 있다. 정신을 집중하는 방법이자 죽음을 준비하는 방법인 것이다.
환자가 죽음의 문턱에서 서성일 땐 주변 사람도 두 발로 굳건히 서 있기도 힘들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흔들릴 때가 있는가 하면, 우물 바닥처럼 잔잔할 때도 있다.
가족이라는 거미집의 한가운데 죽음이 찾아들기 전까진, 가족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 간병이 무엇을 뜻하는지, 상실감과 비통함 너머에 어떤 혼란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닥치기 전까진 어떤 크고 작은 일을 감당하게 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
그콧니어링은 평화주의자이자 작가이자 급진적 경제주의자인데, 자연으로 돌아가 검소하게 살면서 타락한 인간성을 회복하자고 주장했다. 평소에 아흔아홉까지 살다 죽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는데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죽음은 한순간에 이뤄지지 않는다. 오히려 오랜 순간에 걸쳐서 이뤄지고,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된다. 오랜 병마에 시달린 후에 찾아오는 죽음은 호흡을 통해 알 수 있다.
"펫, 죽지마. 이대로 가면 안돼." 아버지는 의식도 없는 아내를 자꾸만 붙잡았다.
나는 아버지 성품을 잘 알기에 도저히 말릴 수 없었다. 어머니를 옆으로 돌아 눕혀야 한다는 핑계를 댔지만 실은 아버지를 병실에서 내보내려는 목적이었다. 어머니는 숨을 한 번 깊이 마셨다 내쉬고 그대로 가셨다.
죽어가는 사람이 영적 경험을 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는데, 이를 '임종현상'이라고 한다. 환자는 손을 흔들거나 보이지 않는 물건을 잡거나 물건을 정리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때로는 요리를 하거나 바느질을 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이런 동작은 어쩌면 단순한 생리적 반응이거나 기억을 재현하거나 꿈을 꾸는 것일 수 있다.
우리는 매 순간 죽고, 매 순간 새로운 자아로 거듭난다. 내가 두려워할 때는 이 제한된 자아, 즉 육체와 정신의 혼합체인 자아,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자아가 두려움에 떠는 것이다.
시인 마리 하우는 죽음의 순간을 어떤 것의 종료나 중단이 아닌 완성으로 여긴다. 삶의 총 결산인 셈이다.
“마침내/누군가가 당신의 구두끈을 절대로 풀리지 않게 묶어주었다.”
도자기는 결국 깨지기 때문에 아름답고 ,우리는 영원히 살지 못하기 때문에 사랑한다. 그걸 익히 알고 있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는 그저 상상할 수밖에 없다. "죽음에 이를 수 있는 것을 사랑하다니, 참으로 두렵도다." 우리는 내심 상처받을까 두려워 선뜻 다가가지 못한다. 사랑을 자제하고 이기적으로 행동한다. 하지만 죽으면 더 이상 두려워할게 없다.
가장 지키고 싶어한 것을 결국엔, 결국엔 잃고 만다. 그러면 더 이상 잃을게 없다. 그동안 우리를 힘들게 했던 인간적 두려움, 즉 남들의 시선에 대한 우려, 우리의 자존심, 체면 따위가 실은 별게 아닌 것으로 드러난다. 우리가 잃게 될 것을 떠올리는 순간, 우리의 심장은 더 이상 자제하거나 주저하지 않는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p337중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샐리 티스데일지음,박미경님 옮김,빙출판>
* 샐리 티스데일: 푸시카트 문학상을 비롯, 다양한 작품을 저술했다. 완화의료 분야에 오랫동안 종사하고 있다. 오리건주 포틀랜드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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