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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조건

[중산] 2020. 7. 9. 00:32

인간 실존의 조건들은 한마디로 말해서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전제조건들이다.

예컨대 인간이 실존하기 위해서는 첫째, 하나의 생명으로 살아 있어야 하며, 둘째,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는 자연의 필연성으로부터 벗어난 영속적인 자신의 세계가 있어야 하며, 셋째, 말과 행위를 통해 이 세계를 공유할 수 있는 다른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렌트는 생명 ∙ 세계성 ∙ 다원성을 인간실존의 세 조건이라고 명명한다.

 

생명으로 산다는 것은 신진대사를 통한 자연과의 소통을 의미하는 까닭에 노동은 생명의 조건에 부합하는 인간의 기초적 활동이다. 따라서 노동하는 동물로서 인간은 자연의 필연성에 예속되어 있다. 다음으로 인간에게 비교적 영속적인 세계를 제공하는 활동은 바로 직업이다.

 

행위는 노동의 필연성과 작업의 도구성, 그 어느 것도 절대화되지 않도록 하고 서로 유기적 관계를 맺도록 만드는 인간의 기초적 활동이다. 이렇게 노동의 활동은 생명의 조건에, 작업의 활동은 세계성의 조건에, 행위의 활동성은 다원성의 조건에 부합한다.

 

고대에서는 가장 낮은 단계에 속해 오직 노예들의 일로만 여겨졌던 노동이 근대에 들어와 보편적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근대사회가 비록 노동사회로 정의된다고 할지라도, 이 사회는 동시에 노동으로부터의 해방과 탈출을 추구한다. 과학과 기술을 비롯해 모든 종류의 사회적 발전은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직업의 활동은 종종 돈을 벌기 위한 활동으로만 이해된다. “우리는 노동을 할 때는 집에 있지 않다”는 칼 마르크스의 비유적 표현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오늘날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오직 자유 시간에 쓸 수 있는 돈을 벌기 위하여 노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근대의 유토피아적 이상이라고 할 수 있는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은 그것이 실현되면 결국 인간에게서 모든 행위의 가능성들, 즉 활동적 삶 자체를 박탈할 것이다. 왜냐하면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은 인간을 노동의 고통과 노고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 편의 수단의 끊임없는 생산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산의 자동화과정은 인간을 노동에서 해방시키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두 가지 활동, 즉 작업과 행위를 노동 차원으로 전락시킨다.

 

만약 노동 ∙ 작업 ∙ 행위가 모두 인간실존에 필수적인 조건을 구성한다면, 우리는 결코 노동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 없다. 노동은 인간이 자연의 다른 생명체와 유기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유일한 활동인 까닭에, 노동의 포기는 곧 생명의 포기를 의미한다.

 

활동적 삶이라는 개념은 인간의 세 가지 근본 활동, 즉 노동 ∙ 작업 ∙ 행위를 표현한다. 노동은 인간 신체의 생물학적 과정과 일치하는 활동이다. 신체의 자연발생적 성장, 신진대사와 부패는 노동에 의해 생산되어 삶의 과정에 투입된 생명 필수재에 묶여 있다. 노동의 인간적 조건은 삶 자체다.

 

작업은 인간의 실존에서 비자연적인 부분에 상응하는 활동이다. 작업은 모든 자연적 환경과는 분명하게 다른 ‘인공적’인 사물세계를 제공한다. 각각의 개별적 삶은 그 경계 안에 자리 잡고 있지만, 이 세계자체는 개별적 삶보다 더 오래 지속되고 이를 초월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다시 말해 작업의 인간적 조건은 세계성이다.

 

행위는 사물이나 물질의 매개 없이 인간들 사이에서 직접적으로 이루어지는 유일한 활동이다. 행위는 다수성이라는 인간의 조건, 즉 한 인간이 아니라 다수의 인간이 이 지구상에 살고 세계에 거주한다는 사실과 일치한다.

인간 조건의 모든 측면에서 어떤 식으로든 정치와 연관되기는 하지만, 이 다수성은 모든 정치적 삶의 ‘필요조건’일 뿐만 아니라 ‘가능조건’이라는 의미에서 절대적 조건이다.

 

어떤 누구도 지금까지 살았고 현재 살고 있으며 앞으로 살게 될 다른 누구와 동일하지 않다는 점에서만 모든 인간은 동일하다. 이 때문에 다수성은 인간 행위의 조건인 것이다.

인간의 조건은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여러 조건이라는 의미보다 더 큰 의미가 있다. 인간은 접촉하는 모든 것이 즉시 자신의 실존조건이 된다는 점에서 조건에 의해 제한된 존재라 할 수 있다. 활동적인 삶이 펼쳐지는 세계는 인간 활동의 산물로 이루어진다.

 

선이 공개적으로 드러나면, 조작된 자비나 유대성의 행위처럼 유용할지 모르나 더 이상 선은 아니다. 선은 오로지 남이 알지 못하거나 심지어 당사자도 알지 못할 때 존재 할 수 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은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한다,” 선의 이 부정적 성질, 예수가 인간은 누구도 선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가르친 이유임은 확실하다.

 

삶의 일관된 방식인 선은 공론 영역 안에서는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파괴적이다. 선행의 파괴적 성질을 날카롭게 의식한 사람은 마키아벨리다. 그가 인간에게 “선하게 되지 않는 방법”을 감히 가르치기도 한 구절도 있다. 물론 다른 이유에서지만 범죄 행위도 타인이 보거나 듣지 못하게 해야 한다. 마키아벨리가 생각하는 정치행위의 기준은 고대와 마찬가지로 명예다.

 

사악함은 선과 마찬가지로 명예롭게 빛날 수 없다. 그러므로 “명예가 아니라 권력을 얻고자 하는”모든 방법은 사악한 것이다. 은둔처에서 밖으로 나온 사악은 뻔뻔스러워져서 공동세계를 직접 파괴한다. 은둔처에서 밖으로 나와 공적 역할을 하고자 의도하는 선은 더 이상 선이 아니라, 타락하여 가는 곳마다 타락을 낳는다.

 

정치적이라는 것, 즉 폴리스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힘과 폭력이 아니라 말과 설득을 통하여 모든 것을 결정함을 의미한다. 가부장은 왕과 유사성을 지니지만 가장의 권력은 왕의 권력만큼 ‘완전하지’못하다. 가정영역의 뚜렷한 특징은 공동생활이 전적으로 필요와 욕구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 추진력은 삶 그 자체다.

 

근대세계가 필연성에 거둔 노동의 해방, 즉 노동하는 동물이 공론 영역을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노동하는 동물이 공론 영역을 가지는 한, 진정한 공론 영역은 존재할 수 없으며 단지 공개적으로 이루어지는 사적 활동만이 존재할 수 있다. 그 결과는 완곡하게 표현해서 ‘대중문화’다

 

엄밀히 말해서 인간사의 영역은 사람들이 함께 사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인간관계의 그물망으로 이루어진다. 말을 통한 ‘인격’의 현시와 행위를 통한 새로운 시작의 출발은 항상 기존의 그물망으로, 행위와 말의 직접적인 결과가 감지되는 그물망으로 귀속된다. 이미 존재하고 상충하는 수많은 의지와 의도를 가진 이 인간관계의 그물망 때문에 행위는 결코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플라톤은 행위의 산물인 인간사를 진지하게 취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행위는 무대 뒤의 보이지 않는 손에 조종되는 인형의 동작과 비슷하며, 인간의 일종의 신의 장난감처럼 여겨진다.

 

근대철학은 데카르트의 회의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회의하라는 명제, 곧 회의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한다. 데카르트의 회의는 단순히 인간의 오성(五性)이 모든 진리에 접근할 수 없고 인간의 시력이 모든 것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시력이 실재를 증명하지 못하듯이 오성의 지력도 진리를 증명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의심한다. 이 회의는 우선 진리가 도대체 존재하는지에 대해 의심한다.

 

데카르트의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나는 회의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 한다“의 단순한 일반화였다. 데카르트는 인간정신에서 진행되는 이 과정들이 그 자체 확실성을 가지고 또 자기반성의 탐구 대상이 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인간은 자기 안에 자신의 확실성, 자기 존재의 확실성을 가지고 다닌다.

 

권력은 공론 영역과 현상의 공간을 보존한다. 그러므로 권력은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세계의 생명줄이다. 인간의 세계는 말과 행위, 인간사회 관계들의 그물망 그리고 이것들의 산물인 이야기의 무대가 되지 못하면 그 궁극적인 존재의 근거를 갖지 못한다.

 

사람들이 그에 관해 말하고 거기에 거주하지 않는다면, 세계는 인간의 세계가 아니라 고립된 개인이 제멋대로 대상을 하나 더 보태는 무관한 사물들 더미에 불과할 것이다. 인간이 거주할 공간이 없다면 인간사는 유목민의 방랑만큼이나 유동적이고 무상하며 헛되다. <‘인간의 조건‘에서 P463 중 극히 일부 요약 발췌, 한나 아랜트 지음>

* 한나 아랜트 : 독일 생, 학창시절 하이데거의 철학에 매료, ⌜아우구스티누스에 나타난 사랑의 개념⌟이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음.

 

* 정치사상가인 아랜트에게 가장 인간적인 것은 다른 사람과 함께 무엇인가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정치적 능력이다. 모든 사람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자유가 바로 정치의 본질이라면, 정치와 자유의 가능성을 억압하는 것은 바로 우리에게서 가장 인간적인 것을 박탈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정치의 실종을 목도하고 있다. 정치의 가능성마저 파괴하려고 했던 전체주의가 끝난 지금도 여전히 자유와 정치는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위협이 아무리 무시무시할지라도, 우리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유일한 ‘인간조건’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아렌트가 말한 것처럼 ‘지구가 가장 핵심적인 인간조건’이라면, 우리는 생물학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노동’을 해야 하고 이 지상에 무엇인가 영속적인 것을 남기기 위해 ‘작업’을 해야 하며 또 우리의 삶을 더 좋은 삶으로 만들기 위해 무엇인가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시작하는 ‘행위’를 해야 한다. 아랜트의 ⌜인간의 조건⌟은 이러한 근본 사실을 철저하게 사유함으로써 자유의 행위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보여준다. 이진우님 옮김

 

살구
어린 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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