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3,00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인류가 인식하는 노년기의 시작은 늘 60세 혹은 70세 즈음이었다. 그러던 1935년, 미국에서 사회보장 프로그램의 창설을 기해 65세가 중년과 노년을 구분하는 기준 연령으로 공식화 된다.
이 프로그램을 만든 대통령 직속 경제보장위원회가 경계선을 65세로 정한 이유는 통계적으로 가장 많은 미국인이 이 나이에 은퇴한다는 것과 주정부 재량으로 이미 시행 중인 연금제도의 기준 연령이 주 절반에서 이 나이라는 것이었다.
1930년대 이후 은퇴개념, 평균수명, 보험통계치가 급변하고 있음에도, 65세는 장년이 노년기로 넘어가는 절대 기준으로 모든 이의 무의식에 말뚝처럼 박혀 있다.
사람들은 흔히 인생의 초년기, 중년기, 노년기가 칼로 자르듯 확연하게 갈린다고 여긴다. 현대인에게 신체적 퇴화와 기회 제한은 노년을 정의하는 기본 요소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특징이 확연하게 뚜렷해지기 전에는 본인이 늙었다고 자각하지 못한다.
젊은 사람의 눈에 그들은 이미 더 없이 분명한 노인인데 말이다. 그러다 자신이 비로소 전형적인 노인의 이미지와 비슷해지면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낯설어한다. 그렇지만 스무 살을 넘기면 누구에게나 시작되는 것이 바로 노화다. 그렇게 모두가 수십 년에 걸쳐 늙어가는 것이다. 변화는 긍정적 방향과 부정적 방향 모두로 일어나지만 우리는 후자에만 신경을 쓰고 있다.
10대를 거쳐 어엿한 청년이 되기까지 성장 단계별로 인간을 정의하는 특징적 변화들이 20대부터는 정체된 것처럼 보이게 된다. 하지만 변화는 숨이 붙어 있는 한 평생 계속된다. 신체구조, 기능, 내면 심리 등 모든 면에서 말이다.
그러다 한참 뒤 중년의 울타리를 넘어가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는 노화가 머지않은 현실임을 깨닫는다. 내적 발전은 반길 만하다. 노년기에는 자아를 더 편안하게 받아들이며 자신감이 한껏 높아지고 열심히 살아온 과거와 그렇게 이룬 현재에 어느 때보다도 큰 안정감을 느낀단다.
그러나 한편으론 걱정도 이만저만 아니다. 몸뚱이 여기저기가 하나 둘씩 녹슬고 고장 난 것이다. 그게 일정 수준 넘어가면 삶 자체가 고되고 궁핍해질 게 틀림없다. 한 인간의 정체성 자체가 흔들릴 수도 있다는 소리다.
요즘 날 가장 괴롭히는 것은 관절이다. 하나는 제멋대로 굴 때도 있지만 대개는 양쪽 다 삐걱거리는데, 굽혔다 폈다 할 때마다 아주 요란법석을 떤다. 눈도 시원찮다. 평소에 나는 다 초점렌즈를 끼운 안경 세 개를 번갈아 사용하는데, 용도가 각각 다르다. 내게는 암 병력이 있으며, 살가죽에 훈장처럼 새겨진 수술 자국은 총 일곱 개다. 현재는 꼭 필요한 건 아닌 장기 몇 개를 남들보다 너무 일찍 떼어 내어 아쉬워하는 중이다.
요즘 나는 몸의 이상을 느낄 때면 그저 이걸 어떻게 고칠까만 생각하지 않는다. 단순히 혹 하나 더 붙이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이 일로 골칫거리가 산사태처럼 불어나는 것 아닌지 등등 온갖 상상을 다 한다.
내가 노년기에 확실히 들어가기에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은 편이지만, 나는 이미 노년기의 문화와 관습에 상당히 친숙한 편이어서 두려움보다는 내심 기대가 크다. 바라건데 운이 따라서 노년기에 대부분 동안 그래 주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더라도 최소한 초반에는, 높은 자존감과 주체성 같은 중년의 장점 대부분을 그대로 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정서는 내 개인적 소회가 아니라 인구 고령화가 일으킨 전 지구적 변화의 바람이다.
성인과 노인 사이는 경계가 애매한 편이다. 신체 건강하고 사는 형편이 넉넉한 사람은 최소 70대 후반 되어야 본인이 노인임을 겨우 인정한다. 대조적으로 노숙, 가난, 수감 상태 같은 환경은 강력한 스트레스 요인으로 작용해 노화를 가속시킨다.
이런 환경에 있는 사람들은 세포 나이 자체가 다르다. 그래서 50대만 되어도 액면가만으로 벌써 할아버지, 할머니 소리를 듣는다.
‘일흔은 두 번째 쉰’은 새롭게 뜨는 유행이다. 어쩌면 노년층에게 생의 의지를 부추기는 데에도 꽤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표현에 전적으로 동의 할 수가 없다. 이 표어가 실은 노인을 우대하는 게 아니라 비꼬는 것이다.
“만약 내가 자신이 마흔다섯이라고 믿는 나이 아흔의 꼬부랑 할머니라면 목욕하고 혼자 욕조를 빠져 나오는 데에만 한나절은 걸릴 것이다.” “사람은 딱 자기가 늙었다고 생각하는 것만큼만 늙는다는 얘기를 정말로 늙은 사람 앞에 할 때 사람들은 그게 얼마나 멍청한 짓이며 나아가 당사자에게는 어떤 상처가 되는지 짐작도 못한다.” 르 귄은 유쾌한 방식으로 반박한다.
40세 이상 구직자들이 받는 차별은 대부분 고용 시장에서 공연한 비밀이다. 우리는 늙지 않은 척하면서 사회의 지배 이념에 아무 저항 없이 순종한다. 백발은 영화로운 면류관이라는 성경 구절도 있지만, 시대가 변해도 너무 변했다. 나는 염색을 끊으려고 노력 중이다. 우리 사회에서 머리 색깔과 스타일은 종종 정치와 사교의 도구로 쓰인다.
나는 매일 외모 때문에 고민하면서 한 살이라도 어려 보이려고 아까운 시간과 돈을 퍼붓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그럴 여유가 있다면 모두가 생긴 그대로의 모습으로 더욱 행복하게 지내는 세상을 만드는데 쓰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면서도 의구심이 든다. 나는 용감한 걸까 아니면 멍청한 걸까 하고 말이다.
번아웃 증후군으로 진단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기준을 반드시 충족해야 한다.
첫째는 정서적 탈진이다. 정서적으로 탈진한 사람은 하루 일과를 마치고 쉬어도 충분히 회복되지 않는다.나도 그랬다. 언제부턴지 누군가 잡아끌어 주지 않으면 뭔가 생산적인 일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우울증은 분명 아니었다. 퇴근해도 업무는 끝난게 아니다.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파묻혀도 품에는 차트를 정리할 노트북 컴퓨터를 껴안은 채다.
두 번째 기준은 비인격화이다. 비인격화는 냉소주의나 업무에 대한 부정적 태도로 표출되곤 한다. 세 번째는 성취감 상실이다. 무슨 일에도 보람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내 경우는 환자들을 보러 다니고, 의대 수업 커리큘럼을 재차 보완하고, 연구비를 따낸 촉망받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이 죄다 무의미해 보였다. 어느 순간 내게는 모든 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만큼이나 헛된 짓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일찍 과부가 된 지인이 한 분 있다. 그분은 실제 나이인 70대 보다 훨씬 젊어 보인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그녀는 명석하고, 유머감각도 좋고, 옷도 잘 입고, 부지런해서 즐겁게 잘 살고 있다. 그럼에도 더 이상 남자들은 그녀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그녀는 그런 현실을 몹시 못마땅해 한다.
가장 최근에 만났을 때 그녀는 인터넷 소개팅 사이트에서 겪은 흥미진진한 얘기를 내게 들려주었다. 그때 그녀가 내린 결론은 이랬다.
“나는 간호사나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아. 그런데 그런 역할을 해줄 여자를 찾는 남자들만 내게 말을 걸더라고.”
100세를 넘긴 세이디 딜레이니는 어느 인터뷰에서 말했다.
“이 나이가 되면, 당장 내일 아침에 눈을 못 뜨더라도 전혀 이상할 게 없어요. 그래도 나는 죽는 게 무섭지 않다우. 이미 초월했거든.” “사랑하는 사람이 땅에 묻히는 걸 지겹도록 봤어. 너무 오래 살면 그런 게 힘들지. 이제는 지인 대부분이 한 줌 흙으로 변해 버린 지 오래야.”
미국과 서유럽만 살펴보면 예순 전후 인구 대부분이 20대 연령층과 비슷한 수준으로 자신의 삶에 만족한다고 응답하는데, 놀랍게도 이 비율은 예순부터 꾸준히 오름세를 보였다.
미국에서 수행된 한 대규모 연구에 의하면, 삶에 대한 만족도가 가장 낮은 시기는 바로 중년기라고 한다. 그러다 예순을 전환점으로 그래프는 다시 상승 곡선을 그리기 시작한다.
이처럼 노년기에 삶의 만족도가 다시 높아지는 현상은 막상 노년기에 들어서면 부정적 인식은 줄어들고 긍정적 인식은 늘어나는 복합적 결과로 여겨진다.
“늙는다는 것을 절대로 두려워할 일이 아니다. 늙음이 선사하는 절대자유가 얼마나 놀랍고 감동적인지 아는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개의치 말라. 투명인간이 되는 순간 - 이때는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더 빨리 찾아온다 - 눈앞에는 무한한 자유의 세상이 펼쳐진다.
내게 이래라저래라 할 만한 인물들은 다 사라진지 오래다. 부모님도 이미 돌아가셨다. 부모의 죽음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해방의 결정적 계기이기도 하다. 60대 후반 내지 70대 초반부터는 스트레스를 받거나 우울, 불안, 분노할 일은 거의 없고 즐거움, 행복 만족감은 배가 된다.
플라톤이 쓴 국가론의 시작 부분에서 세팔루스는 소크라테스에게 말한다.
"내 동년배 몇몇은 늙은 탓에 이래 괴롭고 저래 괴롭다며 늘 울상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그건....엉뚱한 데 가서 화풀이 하는 거네. 만약 나이가 많다는 사실만으로 비난받아 마땅하다면 나도 지금 그들만큼 힘들어야 하고 다른 노인들도 다 그래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겪어 본 바로는 완전히 다른 생각을 가진 친구들이 오히 더 많았다네."~
<‘나이 듦에 관하여’ P843중 극히 일부 요약 발췌, 루이즈 애런슨 지음, 최가영님 옮김,뱅 출판>
* 루이즈 애런슨 : 노인의학전문의이자 캘리포니아 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이다.
울주 진하해수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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