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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문명인의 실종!

[중산] 2021. 7. 9. 15:48

어느 문명인의 실종

 

처음으로 인도 대륙을 여행할 무렵,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서 며칠 동안 식사다운 식사를 하지 못했다. 음식마다 뿌려진 강렬한 향료는 식욕을 달아나게 했고, 싸구려 식당의 불결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배가 고파 식당으로 들어갔다가도 몇 숟가락 뜨다 마는 게 고작이었다.

 

게다가 식당 주인은 바닥을 닦던 걸레로 테이블도 닦고 그릇까지 닦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매번 그것을 나무랄 수도 없었다. 그랬다간 또 무슨 훈계를 들을지 모를 일이었다. 

 

인도에서 불교를 전공하던 어느 한국인 교수가 가정부에게 행주와 걸레를 구분해서 쓰라고 충고했더니, 그 인도인 가정부는 “더러움과 깨끗함을 차별하는 마음도 버리지 못하면서 어떻게 불교를 전공한다고 할 수 있느냐?”고 교수에게 되레 큰소리쳤다고 한다.

 

또 인도인들은 오늘날에도 대부분 손으로 밥을 먹는다. 왜 스푼을 사용하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먹느냐고 했다가 나는 된통 설교를 들어야만 했다. 누구의 입으로 들어갔는지도 모르는 스푼으로 먹는 것보다 자기 손으로 먹는 게 훨씬 위생적이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기들은 손가락으로 음식 맛을 감별하는 능력을 지녔다고 주장했다.

 

입맛이 떨어진 나는 물로만 배를 채웠다. 하지만 열흘쯤 지나자 배가 고파 견딜 수가 없었다. 이대로 가다간 허기에 지쳐 쓰러질 판이었다. 뭐든지 먹어야만 했다. 이튿날 아침 일찍 게스트하우스를 나선 나는 비교적 깨끗한 식당으로 들어가 맛을 따지지 않고 이것저것 시켜 먹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여행을 계속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아침밥을 먹고 나서 장거리 시외버스에 올라탔는데, 당장 배탈이 나고 만 것이다. 버스는 온갖 종류의 인도인들을 빼곡히 싣고 18시간 거리에 있는 비하르 지방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드넓은 지대를 두 시간쯤 달렸을 때, 아랫배가 쌀쌀 아프더니 급기야 장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자극적인 인도 음식을 내 소화기관이 견디지 못하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달리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도중에 버스를 내릴 수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동안 배운 지식을 동원해 손가락과 손바닥을 마구 지압했다. 그리고 재빨리 장약 몇 알을 삼켰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상태는 더 나빠졌다. 아랫배가 부글거리고, 금방이라도 바지에다 설사를 할 것만 같았다.

 

그렇게 반시간 쯤 참았을 때 나는 마침내 인내의 한계에 이르렀다. 더 이상 참다가는 더 걷잡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게 분명했다. 나는 손을 번쩍 들고 운전사를 향해 소리쳤다. “잠깐 차를 세워 주세요. 배탈이 나서 견딜 수 없어요. 얼른요.”

 

그 순간 북인도 평원을 달리던 낡은 시외버스는 그 안에 탄 유일한 외국 여행자 때문에 잠시 소동이 일어났다. 내가 쥐어짜는 목소리로 버스를 세우라고 요구하자 차 안에 탄 인도인들 시선이 전부 내게로 쏠렸다. 그러나 창피한 게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애원하듯이 소리를 쳤다. “빨리 차를 세워요! 잠깐 내렸다 탑시다!” 운전사는 영어를 못 알아듣는지 조금 더 달리다가 한 인도인 남자의 통역을 받고는 끼익! 하고 버스를 세웠다. 하도 급작스럽게 차를 세워서 승객들 모두가 와락 앞으로 쏠렸다가 겨우 중심을 잡았다.

 

나는 황급히 문으로 달려갔다. 그때 일말의 불안감이 밀려왔다. 내가 내린 사이에 버스가 떠나 버리기라도 하면 큰 낭패였다. 마을조차 없는 허허벌판의 무인 지대에 혼자 남겨질 순 없는 일이었다. 나는 운전사에게 내가 돌아 올 때까지 떠나지 말고 기다릴 것을 강력히 지시했다.

 

그래도 미심쩍어 나는 버스를 내리다 말고 도로 올라가 배낭을 들고 내렸다. 버스에 내린 나는 배낭을 들쳐 안고 무의식적으로 도로 옆 들판을 향해 10여 미터 달려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언덕하나 없는 들판 지대는 평지에다 나무들조차 구경하기 어렵다. 몸을 가릴 만한 장소가 한군데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렇다고 문명국가에서 온 내가 아무 데서나 바지를 내리고 일을 치룰 순 없었다.

 

나는 당황한 나머지 고개를 돌려 버스를 쳐다보았다. 차 안에 탄 인도인들 모두가 일제히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한참 무료하던 판에 이게 웬 구경거린가 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는 사이 배탈은 더욱 심해져 조금만 지체하다간 영락없이 바지를 적실 판이었다. 마침내 나는 배낭을 끌어안고 스무 걸음 정도로 더 뛰어가 전방에 외롭게 서 있는 나무 뒤로 돌아섰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나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굵기가 팔뚝 정도에 불과해 내 몸을 전혀 가려 주지도 못했다. 그러자니 더 우스운 꼴이 되고 말았다. 덩치가 크고 장발을 한 사람이 지팡이만 한 나무 뒤에 몸을 숨긴 셈이 되었다. 바지를 내리고 그 나무 뒤에 쪼그리고 앉아 일을 보기 시작했지만, 버스에 탄 인도인들은 볼 것을 다 보고 있었다.

 

어쨌든 위기는 면했다. 바지에 실례를 하지 않은 것만도 천만다행이었다. 내가 올라타자 버스는 서둘러 먼지를 날리며 출발했다. 중간 목적지 고락푸르까지는 먼 여정이었다. 또다시 배탈이 날지 모르지만 어쨌든 한결 속이 편해졌다.

 

좌석으로 돌아온 나는 느긋하게 기대앉아 옆자리 승객들에게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인도인들은 왜 화장실을 이용하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들판이나 철둑길이나 강변에 마구 볼일을 보니 더럽기 짝이 없잖아요. 화장실을 더 많이 지으면 한결 깨끗한 나라가 되지 않을까요?”

 

그러자 건너편에 앉은 50대 남자가 내 영어를 알아듣고 금방 받아쳤다. “자연 속에서 자연적인 일을 처리하는데 뭐가 나쁘다는 겁니까? 왜 당신들 외국인들은 성냥갑만 한 공간 속에 숨어 냄새를 맡아 가며 똥 위에 똥을 누고 있지요? 우린 아침마다 대자연 속에 앉아 바람과 구름을 바라보며 볼일을 봅니다. 그것이 우리에겐 최고의 명상이지요.”

 

다른 청년이 말을 받았다. “우리처럼 물로 닦지 않고 화장지를 사용해야 문명 생활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어디 정말 그런가요. 강은 더 더러워졌어요.” 그 옆에 남자도 한탄했다. “세상은 점점 위선적이 되어 버렸어요. 무엇으로든 자신을 가려야만 문명인이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의 말을 조용히 경청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자연스러운 볼일을 보는 데도 지팡이만 한 어린 나무에 몸을 가리려고 허둥대던 나 자신이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그 와중에서도 배낭을 잃어버릴까 봐 잔뜩 끌어안고서.

 

버스는 창피함으로 얼굴이 붉어진 한 외국인 여행자와 묵묵히 흰 두건 쓴 시크교 노인, 이마에 점을 찍은 처녀, 그리고 옆 사람의 호주머니를 훔쳐보는 손이 시커먼 소매치기를 싣고 광활한 북인도 대륙을 달려갔다. 나를 숨겨 줄 아무런 은폐물도 없는 들판 지대가 야속하긴 했지만, 한편으론 저 따사로운 평원의 햇살과 툭 트인 바람 속에서 내 온 존재를 마음껏 드러낸 채로 평생을 살아가고 싶었다.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P256 중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류시화시인 지음, 열린원출판>

* 류시화시인 : 25년째 매년 인도와 네팔을 여행해 왔다. 시집<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등, 잠언시집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등을 엮었다. 산문집<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를 발표했으며,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달라이 라마의 행복론>등 명상서적들을 번역했다.

 

** 시인은 여러 해 동안 여행하며 인도인들로부터 들은 인상적인 말들을 모아 <인디어 어록>을 기록해 두었다. 많은 어록 중에 몇 개 만 소개하겠다.

 

- 주는 행복 : “때로는 주고 싶을 때 줄 수 있는 것도 큰 행복이다. 나는 주고 싶어도 줄 게 없다.” 내가 한 푼 줄까 말까 망설이고 있자 바라나시의 여자 걸인이 그렇게 충고했다.

 

- 기다림 : 북인도 자아푸르에서 만난 한 노인은 나더러 자기를 바라나시의 갠지스강까지 데려다 달라고 하소연했다. 내가 이번에는 시간이 없다고 하자 그는 말했다. “그럼 여기서 기다리겠소. 내년에 당신이 다시 올 때까지 말이오. 내년에 다시 이곳으로 와서 나를 꼭 데려가 주시오.”

 

- 노 프라블럼(문제없어!) 명상 : 인도 여행 중에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말이 바로 ‘노 프라블럼’이다. 돈이 없어도 노 프라블럼이고 자전거가 펑크나도 노 프라블럼이며, 죽을 뻔하다가 살아났어도 이미 살아났으니 노 프라블럼이다. 기차가 무한정 연착을 해도 노 프라블럼이다.

 

여권을 분실하여 당황한 나에게 가장 많이 해 준 충고가 ‘노 프라블럼’이었다. 노 프라블럼 명상법 결론적으로 이것이다.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로 결코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면서 ‘노 프라블럼’을 열 번씩 외친다. 이것을 가장 신성한 만트라로 여기고, 잠자기 전에도 거울을 보면서 ‘노 프라블럼’이라고 큰 소리로 열 번 외친다.

 

인도의 영적 스승 사티야 사이 바바는 말했다. “사람들은 곧잘 아는 것이 힘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문제를 초월하는 자세가 더 큰 힘이다.”

 

*** 우리가 진정한 여행, 젊음의 유일한 원천, 그것은 새로운 세상을 찾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갖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눈, 다른 100인의 눈으로 세계를 보는 것이다. 그들 각자를 보고, 그들 각자가 지닌 100개의 세계를 보는 것이다. - 마르셀 프루스트.

 

비비추
아직도 장미가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접시꽃
수련
연꽃

비온 후 개울물이 시원스레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