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를 생각하며 / 이해인
우울한 날은
장미 한 송이 보고 싶네
장미 앞에서
소리내어 울면
나의 눈물에도 향기가 묻어날까
감당 못할 사랑의 기쁨으로
내내 앓고 있을 때
나의 눈을 환히 밝혀주던 장미를
잊지 못하네
내가 물 주고 가꾼 시간들이
겹겹의 무늬로 익어 있는 꽃잎들 사이로
길이 열리네
가시에 찔려 더욱 향기로웠던
나의 삶이
암호처럼 찍혀 있는
아름다운 장미 한 송이
'살아야 해, 살아야 해'
오늘도 내 마음에
불을 붙이네
장미차를 마시며 / 정끝별
시 쓰는 후배가 인도에서 사왔다며 건넨 장미차
보랏빛 마른 장미들이 오글오글 도사리고 있다
잔뜩 오므린 봉오리를 감싸고 있는 건 연두 꽃판이다
아홉 번을 다녀갔어도 후배의 연애는 봉오리째
차마 열리지 못했는데, 그게 늘 쓴맛이었는데
찻물에 마른 장미를 아홉 송이를 띄운다
여름 직전 처음 꽃봉오리가 품었던 목마름은
따뜻한 물에도 좀체 녹아들지 못하고
보라 꽃잎에서 우러나온 첫 물은 연둣빛이다
피워보지 못한 저 무궁무진한 숨결
첫 물은 그 향기만을 마신다
어쩌다 아홉에 한 송이쯤은 활짝
오랜 물에서 꽃 피기도 하는데
인도밖에 갈 곳이 없었던 후배의 안간힘도
그렇게 무연히 피어났으면 싶었는데
붉게 피려던 순간 봉오리째 봉인해버린
보랏빛마저 다 우려내고도 결코 열리지 않는
물먹은 꽃봉오리들
입에 넣고 적막히 씹어본다
보랏빛 멍을 향기로 남기는 제 몸 맛처럼
안으로 말린 모든 꽃은 쓰리라
채 피우지 못한 꽃일수록 그리 떫으리라
장미 / 노천명
맘 속 붉은 장미를 우지직끈 꺽어 보내 놓고
그날부터 내 안에선 번뇌가 자라다
늬 수정같은 맘에
나
한 점 티 되어 무겁게 자리하면 어찌하랴
차라리 얼음같이 얼어버리련다
하늘보며 나무모양 우뚝 서버리련다
아니
낙엽처럼 섧게 날아가버리련다.
내 가슴에 장미를 / 노천명
더불어 누구와 얘기할 것인가
거리에서 나는 사슴모양 어색하다
나더러 어떻게 노래를 하라느냐
시인은 카나리아가 아니다
제멋대로 내버려두어다오
노래를 잊어버렸다고 할 것이냐
밤이면 우는 나는 두견!
내 가음속에도 들장미를 피워다오
장미 축제 / 배용제
날카로운 가시 줄기에서 뛰쳐나온 꽃들,
온갖 색의 속을 뒤집어 짙은 입술을 토해냈다
드디어 때는 왔다
마음껏 즐겨다오, 이 화사한 정열의 정원에서
가진 힘을 아낌없이 쏟아부어라
이 아름다운 때에, 신선하고 매끄러운 살갗에 장미의 색을 입혀
가시의 정액을 잉태하라
장미의 면류관이 여기선 계급의 척도가 될 것이다
내 안에서 인내의 최면에 걸려 잠자던 공포들아,
머리를 높이 쳐들고 노래하라, 가시의 날카로운 힘을 얻은 꽃들이 솟아나리니,
축제의 향기가 세상을 덮게 되리라
추억이란 박제된 환상의 표본실이거나 모든 죽음의 창고일 뿐,
짧은 장미의 나날을 재생시킬 수 없으므로
몸 속 깊이 가시의 독을 품어 익혀야 한다
생은 한 번의 꽃피움으로 족한 것,
나는 온 힘을 다해 축제의 중심을 향해 돌진한다
내 지닌 힘을 일순간에 내동댕이치듯이,
옷을 벗어던지자 빛나는 육체는 축제의 이정표가 된다
피로 맺힌 가시의 즙액이 봉우리를 이루고
봉우리가 열릴 때마다 짜릿한 향기가 퍼진다
가시가 스치는 살갗에서 붉은 장미가 피어나고, 그때마다
몸은 탄성을 지르며 나뒹군다
나는 그 놀라운 체험을 기억하기 위해 연거푸 사진을 찍는다
더 이상 내게 놀라움이란 존재하지 않을 거라 확신하면서, 장미의 정원을 탐식한다
환상의 꽃들이 피어난 살갗에선 다시 가시가 돋아난다. 꽃으로 뒤덮인다
장미의 향기에 중독된 나는 더욱더 짜릿함을 맛보기 위해
엉금엉금 기어다닌다.
넝쿨장미 / 류제희
급소에 내리 꽂히는 햇살
일방통행이다. 그대 품속까지
경계선도, 붉은 가시철망도
보이지 않는다.
장미는 왜 붉게 피는지 / 김용화
이 번 여름에
사랑을 하고 싶다
야한 티 하나 사 입고
낯선 여자와 낯선 거리에서
낯설지 않은 사랑을 하고 싶다
장미는 왜
붉게 피는지
낯선 거리에서 묻고 싶다
장미 / 김광섭
못다 피고 질까봐
너의 고향에서
네 바람을 보내어
지루한 장마를 밀어내고
너를 피우니
갑자기 천지가 변하면서
물거품에서
비너스가 나던 날이 돌아왔다
오 사랑의 날이여
장미의 의미 / 전봉건
薔薇는 나에게도
피었느냐고 당신의
편지가 왔을 때
오월에...... 나는 보았다. 彈痕에
이슬이 아롱지었다.
그리고
빛나는 태양.
흙은 헤치었다.
무수한 자욱 무수한 자욱 무수한
軍靴자욱을 헤치며 흙은
綠色을
새 수목과 꽃과 새들의 녹색을 키우고
그
가장자리엔 구름이 있었다.
구름이......
구름에서
들려온 소리.
나는 들었다.
그것은 푸른 나의 발자국 소리.
그것은
총격이 계속하는
바람에 나부끼는
대만해협이 젖은 나의 발자국 소리.
알제리아의 모래알도 묻은 발자국 소리.
그리고 그것은 수목과
에메랄드처럼
푸른 나의 발자국 소리
一九五五年. 그리고
나는 믿었다.
지금 전쟁의 베트남의 불붙는
다릿목에서 뿌려진 인간의 핏방울을
떨치며 일어서는 한 잎
반짝인 풀잎사귀의
녹색을.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나는 알았다.
삼천만의 꽃과 열매와 가지 또 뿌리가
흩어진 一五五 마일의
철조망의 밤과 검은 나의 裸身과
가슴을 서광처럼 물들이며
뜩운 당신의
볼의 이유를. - 기도인가 감겨진 당신의
속눈썹은 떨이리고. 그때
그렇다. 무한한 기적같이 푸른 하늘과
바다를 닮아 둥근 당신의 가슴의
흰 부드러움 속에서 나의 두 손은
녹색의 사랑
녹색의 희망이었다.
五月에
장미는 나에게도
피었느냐고 당신의
편지가 왔을 때
五月에...... 나는 아름다웠다.
장미 / 모윤숙
이 마음 한켠
호젓한 그늘에
장미가 핀다
밤음 어둡지않고
별은 멀지 않다
장미는 밤에도 자지 않는다
숲 없는 벌
하늘 틔지 않은 길
바람 오지 않는 동산
장미는 검은 강가에 서 있다
너의 뿌리는 내 생명에 의지 하였으매
내 눈이 감기기 전 너는 길이 못가리
너는 내 안에서만 필 수 있다
봄 없고,비 없고, 하늘 없는 곳
불행한 내 마음에서만 피여간다
밤은 어둡지않고
별은 멀지않다
너는 밤에도 자지 않는다.
장미의 영혼 / 오길순
입춘부터 상강까지 속을 태웠던 너는
업이 무엇이니?
간절한 저 하늘 마음만 앓다가
무서리 한 점에
삭아내린 정열
언젠가는 태양이 되고팠던
내 슬픔을 나는 내 안으로 운다.
사발꽃을 아느냐?
흰점이 얽혀서 사발이 되었더라.
얇은 슬픔을 엇놓아 높이 다가가려한 너는
사발도 되지 못해 장미로 우는
가여운 내 넋이 아닌가.
새 봄사 다시 울어 핏빛으로 지는
네 업은 눈물이 아니었겠니?
언젠가는 태양이 되고 싶던
네 슬픔을
나는 내 안으로 운다.
사발도 되지 못해 장미로 우는
너는 해마다
내 영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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