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에 맞서는 여행자
- 나의 목표는 시간을 따라 잡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무심해지는 것이다.
어떤 외부의 힘이 시계추처럼 규칙적으로 나를 땅으로 데려간다. 한 번은 동쪽으로 또 한 번은 서쪽으로. 유라시아 대륙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2년 전 나는 고독을 친구 삼아 말을 타고 황량한 고비 사막을 지나간 일이 있었다. 그때 분(分)은 수년의 시간과 날들만큼의 가치를 지녔었다.
기어코 가닿겠다는 그의 시도를 단호하게 피해 가는 지평선만큼 그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몽골과 카자흐스탄 그리고 하늘 아래 잘 다져진 평원에서 지평선 끝을 향해 가는 이 광적인 추격은 여러 날 동안 이어질 수 있다. 여정의 끝에 이르러 지도 위에서 자신이 달려온 센티미터를 측정해보는 것보다 더 큰 만족감은 없을 것이다.
티베트 고원에서 나는 내 앞을 기어가는 사람을 지나치게 되었다. 그는 앞치마처럼 생긴 무릎보호대를 하고 손에는 고정한 나무 덧창을 대고 있었다. 이마에는 엎드릴 때마다 땅에 닿아서 생긴 혹이 하나 튀어나와 있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라싸요.” “하루에 몇 킬로미터를 가십니까?” “6킬로미터.” “얼마나 걸립니까?” “여덟 달.” “왜 걸어가지 않습니까?” “신들이 내가 편리함에 굴복했다고 비난할 것이기 때문이오.”
사기가 꺾인 채 나는 그를 떠났다. 나는 그동안 내가 고대의 마지막 떠돌이 광대 중 하나이고 천상의 방랑자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막 언제나 나보다 철저한 사람이 있다는 생생한 증거를 마주쳤던 것이다. 여섯 달 걸린 우랄알타이 지방의 기마여행에서 그리고 여덟 달에 걸친 유라시아 여행길과의 싸움을 끝내고 돌아오면서 나는 인생을 다 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10년에 걸쳐 네 번의 장거리 여행을 한 뒤, 나는 네 가지의 고유한 삶을 알게 되었다.
시간을 죽이기 위해서는 결국 길을 떠나야 한다. 하지만 아무렇게나 떠나서는 안 된다. 이 세상에서 우리의 영혼이 시계에 맞서 힘겹게 이어가고 있는 달리기에서 벗어나려면 느릿느릿, 한 걸음 한 걸음 몸을 움직여 이동해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여행은 항상 엔진 없이, 내 힘이 허용하는 한도 이상으로 더 빨리 이동하는 수단 없이 자연과 대등한 조건에서 자연에 그대로 맡기는 여행이다.
내가 주로 신발의 밑창을 이동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고통을 즐기는 취향 때문이 아니라 느림이 속도에 가려진 사물들의 모습을 드러내 보여주기 때문이다. 기차나 자동차의 유리창 뒤로 풍경을 흘러 보내면서 풍경의 베일을 벗길 수는 없다. 걸어서 길을 가는 여행자는 사람들이 많이 다닌 길을 버리고 잘 조성된 말하자면 덜 훼손된 오솔길을 택해볼 수 있다. 초원에 깊게 파인 길이 보이면 그는 초원과 공조할 것이다.
권태의 해독제
-얼마나 많은 나의 원정들이 길에서 태어났던가? 산다는 것, 그것은 자신의 꿈을 추억으로 만드는 것이다.
나의 육체는 결코 쉬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다. 마치 절대 만족할 줄 모르며 끊임없이 돌보고 신경 써야 하는 아이처럼 행동한다. 내 육체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말하며 지시할 때 나는 육체를 진정시키기 위해 이렇게 대답한다.
“떠나라!” 내면의 분화구를 식히려면 길을 떠나라. 여행은 시간의 질주에 제동을 걸 뿐만 아니라 넘치는 에너지의 압박에 시달리는 체질을 진정시킨다. 제자리만 뱅뱅 돌까봐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해결책은 앞으로 곧장 내달아 모험에 몸을 던지고 길을 휘젓고 다니면서 평화를 발견하는 것이다.
역사상 위대했던 여행자들도 숲 속 아름드리나무들을 잘라내기라도 할 기세로 성큼성큼 여정을 헤쳐 나가 지평선을 먹어치우는 탐식가나 길 위를 도망치듯 달려가는 소인배와 마찬가지로 오로지 자기 내면의 불길을 잠재우려 노력한 것이 틀림없다.
알렉산드로스, 마르코, 칭기스칸 그리고 그들의 모든 후예들은 널리 알려진 발견자들이든 익명의 순례자들이든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자기 영혼을 진정시키려 한 소방관이다. 나쓰메 소세끼는 방랑에 관한 그의 시에서 '완전한 인간이란 무심코 강가에서 휴식을 취하며 미동도 없이 부드러운 바람을 만끽하고, 은은한 꽃향기를 마음껏 즐기면서도 조금의 변화도 보이지 않는 대나무와 같다'고 묘사했다.
세상사는 그를 휘지 못하고 그냥 스쳐 지나간다. 흐르는 시간은 그의 몸을 적시지도 못한 채 들오리의 깃털 위로 물이 미끄러지듯 그의 위로 미끄러진다. 평정심에 충실했던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행복한 사람들이 이미 가진 것을 욕망하는 것”이라고 설교했다.
요컨대 영원히 앉아 있을 수 있는 참나무 한 그루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치명적인 사고에 조금도 구애받지 않는다. 나무를 만나면 나는 나무의 밑동에 가부좌를 틀고 앉는 대신 그 나무를 타고 올라갈 것이다. 나무의 꼭대기는 가장 아름다운 장루다. 그 높은 곳에서 들판 구석구석을 굽어보며 프랑스의 작가이자 외교관인 폴 모랑이 말한 것처럼 “다른 곳은 내일보다 더 아름다운 단어”여서 더 멀리 가고 싶은 간절한 욕구를 품을 것이다.
어느 나무 아래 앉아 그곳에 아예 뿌리를 내리는 것도 분명 가능한 방법이다. 그 길을 선택한 사람에게는 이것이 ‘역사의 궁극‘이고 도에 이르는 길이다. 그들은 나무둥치 주변 도토리를 사이에서 휴식을 취하고 평정심을 얻는다. 그렇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나무를 찾아야만 한다. 나는 지금으로서는 숲을 활보하는 것이 더 좋다.
육체의 생명기운이 원활하게 돌지 못할 때 갑갑함을 느끼는 것은 그 기운이 정신을 평화롭게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소나무에서 진액이 방울방울 떨어지듯이, 에너지가 존재를 넘쳐흐른다. 그런데 에너지는 비축되는 것이 아니므로 즉시 소비되어야 하고, 행동이라는 작업대 위에서 소진되어야 한다.
육체에 임무를 부여하는 것, 이것이 그의 격정을 정화하는 방법이다. 오랫동안 먼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자신의 육체에게 2000미터 높이의 정상에 오를 것을 요구하고, 석공은 육체에게 거친 돌덩어리를 다듬어 갈무리할 것을, 선원은 육체에게 새벽까지 깨어 있을 것을, 등반가는 육체에게 200미터 절벽을 정복할 것을, 대상(隊商)은 육체에게 묵묵히 끝까지 여정을 이어갈 것을 요구하게 된다.
일단 임무를 수행하고 고통스러운 규율을 지키면서 정해진 목표에 가까워지면 육체는 비로소 정신을 평온한 상태로 내버려두고 더 이상 자극하지 않을 것이다. 그제야 해방된 정신은 지금껏 달려온 그 땅에서 평온하게 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2000년이 되기 직전 말을 타고 텐산 산맥에서, 최근에는 도보로 아프간의 바다흐샨 주에서, 티베트 창탕 고원동쪽에서, 또는 쿤룬 산맥의 남쪽에서 오랜 시간 홀로 외로이, 하루 종일 아무 변화 없는 단조로운 땅을 50킬로미터를 줄곧 걸었던 날들을 기억하고 있다.
이런 절망스러운 지리(사막, 넓은 평원, 고원)에서의 여행은, 인생을 두루 둘러보는 일은 소홀히 했을 유클리드의 평면을 침묵 속에 관통하는 것과도 같다. 한 치의 땅도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텅 빈 스텝지대를 횡단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서서히 미쳐가다 권태 때문에 정신을 잃고 싶지 않다면, 자신의 사고에 계속해서 자양분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걷고 있으면 뇌라는 두개골 상자, 여행자에게 가장 소중한 짐인 이 기록 보관 상자 속에 차곡차곡 쌓인 추억의 단층들이 기억의 표면 위로 떠오른다. 그 속을 헤집어서 추억을 추려낸다. 갑자기 번개라도 번쩍이면 이제는 거의 잊고 있는 즐거웠던 순간이 떠오르면서 웃음이 터져 나온다.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그는 우리를 미치광이 취급할 것이다. 그 사람은 우리 내면에 있는 도서관의 책장을 둘러보며 자기 자신과 행복한 순간을 보내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은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테니.
추억 속에 그런 시간이 없다면 눈을 밖으로 돌리면 된다. 자연주의자인 그의 눈이 아주 미세한 삶의 흔적도 찾아낼 것이다. 그의 영혼은 아무리 상황이 열악해도 그것을 초월할 줄 아는 능력도 지녔을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조약돌 하나를 보고 산을 상상했다.
소로는 귀뚜라미의 노랫소리에서 신의 음성을 들었다. 반 고흐는 전원에서 풍경의 역선(力線)들을 보았다. 프랑스 시인 네르발은 파리의 길들과 자기 영혼의 미로를 혼동했다. 위고는 산사나무의 향이 별자리와 무관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여행자는 풀잎에서 우주로 미끄러져 들어갈 수 있어야 하고, 머리 위로 지나가는 구름을 보고 평면구형도를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그의 정신이 모래알 하나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다면, 사막의 모래 언덕에 던져진 그가 느낄 수 있는 행복은 얼마나 무한하겠는가!
정글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그곳에는 권태라는 암의 위협은 없다. 온갖 다양한 생명의 표출만으로도 넋을 잃을 정도다. 이미지들을 낚으려면 그물을 던지듯 눈길을 주기만 하면 된다. 나무 그루터기의 움푹 파인 곳에서는 박쥐 한 쌍이 다투고 있고, 나무뿌리들 사이에서는 사슴벌레가 큰 턱으로 위협하며 딱정벌레에게 약한 존재가 치러야 할 대가를 가르쳐준다. 권태가 끼어들 틈이 없다. 혐오감, 구역질, 그렇다! 결코 지겨움은 아니다.
아무런 변화 없는 단조로운 길에서 추억도 관찰도 유랑자에게 도움이 되어주지 않을 때 그에게는 언제나 몽상 속에서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황야를 떠도는 얼마나 많은 방랑자가 늘 주변에 환영 조각들을 거느리고, 숨 쉬듯 꿈을 꾸면서 길을 갔던가.
황량한 장소의 단조로움은 상상력을 발휘하여 ‘경이로운 플로리다’를 향해 날아오르도록 부추긴다. 강행군 끝에 이르러 느끼는 약간의 피로 때문에 몽상은 환상적인 빛깔로 물이 든다. 그리고 사람들은 미래의 여행을 계획한다. 얼마나 많은 나의 원정들이 길에서 태어났던가? 산다는 것, 그것은 자신의 꿈을 추억으로 만드는 것이다. 권태의 해독제를 이렇게 빠르게 검토하다보니 한 가지를 빠뜨렸다!
보도여행 길에서 텅 빈 공간과 싸우려면 시가 있어야 한다! 방랑자는 한없이 시를 암송할 수 있다. 시는 텅 빈 시간들을 채워준다. 시는 정신을 붙잡아주고 영혼을 확장시킨다. 시는 음악이 되는 리듬이다. 시는 행군에 박자를 붙여주고 주위 환경과의 조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 나는 평탄한 벌판에서는 페기를, 늪지대에서는 위고를, 고지에서는 아폴 리네르를, 폭풍 속에서는 셰익스피어를, 영혼이 충만할 때는 벨기에 시인 노르주를 암송한다.
나는 두려움을 느낄 때만 기도를 올린다. 곰과 마주쳤을 때나 암벽들 틈에 끼었을 때, 흔들리는 하켄 위에서 암벽의 붙잡을 곳이 마땅히 손에 잡히지 않을 때, 그럴 때만 아드레날린이 밀려오며 신앙심이 되살아난다. 기도, 관찰, 명상, 암송, 추억 이것들은 긴 여정을 걸어가는 자가 세계의 암담한 거대함 속에서 자신이 마치 잃어버린 머리핀 장식처럼 느껴질 때 밀려오는 불안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련하는 전략이다.
길 위에서 얻는 행복
유랑자는 여행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구속들에 어쩔 수 없이 복종하는 데서 일종의 쾌락을 느낄 수 있으며, 자신의 방랑생활의 규율을 철저하게 지키는 데서 행복감을 느낀다. 메마른 아시아의 고원지대에서는 하루 종일 머릿속에 갈증을 해소하고 싶다는 강한 욕구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당시 나는 우물을 찾는 데 몸과 마음을 전부 바쳤다.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의 아무리 사소한 부분이라도 놓치지 않으려 신경을 잔뜩 곤두세운 채 여행하는 것을 좋아한다. 거대한 숲의 울창한 잡목이야말로 나에게 최고의 환락을 제공한다. 그 쾌락을 충분히 맛보고 나면 나는 이내 활력을 되찾아주는 공기, 니체가 말한 ‘위대한 건강’에 합당한 스티븐슨의 ‘위대한 바깥’의 공기를 되찾고 싶어진다. 헤세의 크눌프는 따뜻한 병원에서 평화롭게 생을 마감하는 대신 죽을 때까지 숲 속에서 돌아다니기를 더 좋아한다.
나는 자기연민이 완전히 없어지는 상태에 도달하는 것을 좋아한다. 유랑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지나친 배려를 허용하지 않는다.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참호 속에서 저항을 계속하고 육체가 보내는 경고 신호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 이를 통해서 인간의 육체는 깨끗해질 수 있다.
강행군은 증류기와도 같아서 피를 돌게 하고 해독작용을 한다. 시베리아에서 나는 연일 보드카를 마시며 며칠 밤을 보낸 이후에도 매일 40~50킬로미터를 행군하면서 나 자신을 씻어냈다. 쉬고 싶은 욕구에 굴복하지 않으려면 규율이 필요하다.
바이칼 호수의 모래사장에서 산책을 했을 때 나의 고독은 일종의 스펙트럼이 되었고 그 스펙트럼을 통해 호수는 내가 유쾌한 기분으로 그곳에 다시 갔던 다음 해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드러냈다. 혼자서 길을 떠난 방랑자는 혹독한 지리를 통해 생명의 힘들이 자신의 악보를 연주하는 세상을 마음껏 즐긴다. 특히 누군가가 “산과 바다와 평원을 다른 의지에 따라” 다시 창조하는 것도 필요하지 않다.
혼자 있는 법을 배우는 것은 더욱 밀도 높은 삶을 살기 위해서다. 또한 고독한 낭만적 방랑자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한다. 셰익스피어는 “이 세상에는 우리가 꿈에서 볼수 있는 것 이상으로 경이로운 것들이 널려 있다”라고 확신했다. 그런 확신으로 다시 생기를 얻은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줄 아는 것, 신들을 만나보기 위해 숲 속으로 떠나는 것, 자기의 상상력으로 말고삐를 늦추는 것, 이것들만 있으면 다시 마법을 걸기에 충분하다.
숲 속 오두막, 방랑의 끝
- 오두막에 살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숲에 들어서면서 그 가장자리에 두려움을 내려놓는 것이다.
나는 숲 속 오두막에서 내 생을 마치고 싶다. 오두막은 지리를 뺀 유랑이다. 움직임 없는 자유, 신체를 제한함으로써 얻게 되는 영혼의 만개다. 일단 오두막이 세워지면 나는 길이 1미터의 널빤지를 네모나게 잘라 간이침대 위에 설치하고 그 가장자리에 ‘작은 유랑 도서관’을 만들어 서양 떠돌이 광대들의 유랑생활과 숲의 비호를 받는 성채를 찬양하는 책들이 놓일 것이다.
그곳에는 크눌프 때문에 헤세가 있을 것이다. 크눌프는 방랑생활이 만들어낼 수 있는 더 부드럽고 다정한 인물이다. 신체를 단련하고 영혼을 정화하며 자신을 ‘자연이 되게’하려고 노력하면서 월든에서 보낸 몇 년 때문에 소로가 있을 것이다. 또 트라번이 있을 것이다. 증오로 가득 찬 책들은 관료와도 같은 암을 치료하는 일종의 화학요법이다.
기도하면서 길을 걸어갔던 러시아의 순례자가 있을 것이다. 연기처럼 모호한 설교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활력을 되찾아주는 신인 ‘디오니소스 찬가’를 위해 니체가 있을 것이다. 삶의 생태학과 내면의 침묵을 위해 몽테뉴가 있을 것이다. 모두들 등지고 혼자되는 것을 괴로워하면서도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은 척하기 때문에 페르 귄트가 있을 것이다. 분명 펜을 사용할 줄 아는 만큼 도끼도 사용할 줄 안다고 느껴지는 이 작가의 작품을 읽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우리의 슬픔에 대한 해결책은 아마도 숲 속 은둔생활에 있을 것이다. 숲은 우리에게 나무를 내밀지 않는가! 숲에 의지하는 것, 그것은 현대의 추함에 등을 돌리는 것이다. 그들은 도스토옙스키가 말하는 “세상을 구원하는” 영원한 아름다움과 결혼한다. 그 아름다움은 매 순간 오두막의 창문을 통해 집 안으로 들어와 그 오두막들이 하는 일마다 그들과 함께한다.
우리는 삶의 첫날부터 지구를 빌린 것일 뿐이므로, 조금이라도 빚을 가볍게 하려면 마땅히 빚을 청산해야 할 것이다. 방랑자는 세상의 열매를 따 모으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즐기면서 생을 보냈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빚을 졌다. 나의 마지막 의지는 내 몸이 자양분이 되어 줄 어느 나무 아래 묻히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사면을 받는 방법일 것이다. 대신 나는 구더기들에게 내 몸을 내어줄 만큼 고기를 충분히 먹어둘 것이다. 화장은 불량 채무자의 무례한 방식이다. 일종의 횡령이다.~<‘여행의 기쁨, 느리게 걸을수록 세상은 커진다’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실뱅 태송 지음, 문경자님 옮김, 어크로스 출판> * 실뱅 태송 : 자유로운 유랑자‘반더러’의 영혼을 간직한 에세이스트.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나 지리학을 전공. 그는 매일매일 발길 닿는 대로 무작정 길을 간다. 사막을 걷고 초원을 달리고 숲을 헤매고 도시의 성벽을 오르면서 유체를 마음껏 움직이게 하고 정신을 자유롭게 풀어놓는다. 방랑의 끝에 숲 속 오두막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다고 말한 그는 2010년 바이칼 호수 연안의 오두막에서 6개월 동안 홀로 생활했다.<희망의 발견: 시베리아 숲에서>으로 프랑스 문학상인 메디처상 에세이 부문을 수상,<노숙인생>으로 콩쿠르상 중편 부문을 수상 했으며, 2014년 불의의 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깨어난 후 출간한 <완전한 실패>등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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