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식 있는 인사가 완력을 기르고, 어깨통을 넓히고, 폐활량을 늘리는 데 몰두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고 어울리지 않는 일이 아닌가? 식이요법에 성공하고 근육이 늘어난다 해도, 체력과 몸무게가 1등급인 소를 당해내지는 못하네.
또 신체의 부하가 커지면 영혼과 충돌하여 영혼의 움직임이 둔해진다네. 그래서 가능한 한 신체를 줄여서 영혼에게 편히 쉴 여지를 주게. 우선 운동을 하면 거기에 들인 노력만큼 생기가 마르게 되어, 마음을 많이 먹으면 섬세함이 방해가 되네.
오늘 하루를 만족스럽게 보냈다고 생각하는 것은, 좋은 땀을 흘린 뒤, 땀을 흘린 대신 그만큼의 음료수를 - 목이 마른만큼 구석구석 스며들도록- 보급했을 때라네. 운동에는 짧은 시간에 끝나는 간단한 것도 있네.
몸을 금방 피로하게 하는 동시에 시간도 절약할 수 있다네. 이를테면 달리기, 뜀뛰기 등이네. 하는 것은 쉽고 간단하지만 즉각 육체에서 영혼으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하네.
영혼은 그야말로 밤낮없이 단련하게. 영혼의 수양은 적절한 노력으로 가능하네. 이 영혼의 운동은 추위도 더위, 그리고 늙음조차 방해할 수 없다네. 나이 먹을수록 좋은 점이 많은 것에 마음을 기울이게.
노년이란 힘이 쇠약한 나이를 나타낸 말로, 산산이 파괴된 나이는 아니기 때문이네. 영혼은 생기가 넘치고, 몸과 그다지 상관없이 사는 것을 기뻐하고 있다네. 영혼은 지금이 자신의 절정기라고 말하네. 그 말을 우리는 믿어야 하네.
영혼에게 영혼의 좋은 열매를 누릴 수 있게 해 주세나. 영혼은 사색을 하라고 명령하고 있네. 나에게 무엇이 불가능한지, 또 무엇을 원하지 않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라고 명령하고 있다네. 실제로 한탄할 것이 무엇이 있을까? 어떤 지장이 있는 것인가?
사라져야 할 것이 모두 힘을 다했을 뿐인데, 자네는 말하겠지. “소모되고 노화하여, 있는 그대로 말하자면 녹아서 없어지는 것이 가장 큰 지장 아닙니까? 우리는 어느 날 갑자기 타격을 받아서 쓰러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하루 조금씩 파 먹히며 힘을 빼앗기고 있는 겁니다.”
탐욕과 삶의 질
친애하는 루킬리우스에게
자네 편지에서, 철학자 메트로니쿠스*의 죽음을 탄식하며, 그는 더 오래 살 수 있었다느니 오래 살아야 했다느니 하는 말을 했네. 자네에게 묻겠네만, 자네가 자연을 따르는 것과 자연이 자네를 따르는 것 가운데 어느 쪽이 더 공정하다고 생각하나?
어차피 떠나지 않으면 안 되는 곳에서 얼마나 빨리 떠나는가 하는 것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 고려해야 하는 것은, 얼마나 오래 사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충실하게 사는가 하는 것이네.
오래 살기 위해서는 숙명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충실한 인생이 의지하는 것은 영혼이기 때문이네. 충족감을 느낀다면 그 인생은 긴 것이네. 그리고 인생이 충족되는 것은 영혼이 본래의 선을 자신에게 되돌려주고 자신을 지배하는 힘을 자신에게 이관했을 때이네.
무위 속에 지냈다면 80년의 수명도 그 사람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런 사람은 산 것이 아니라 인생에 오래 머문 것이며, 죽은 것이 늦은 것이 아니라 죽는데 시간이 걸린 것이네.
“그 사람(메트로니쿠스)은 아직 젊은 나이에 죽었습니다.” 그러나 좋은 시민으로서 좋은 벗, 좋은 아들로서의 의무를 다했네. 어떤 점에서도 헤이해진 적이 없었네. 그는 천수를 다하지는 못했지만 인생은 완수했네.
“아무개는 80년을 살았다.“
아니네, 80년 동안 이 세상 있었을 뿐이네. 루킬리우스여, 귀중한 물건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생도 그 분량이 아니라 무게가 나가도록 하는 데 유의하게나. 인생을 시간이 아니라 활동에 의해 계산하게.
수명은 인간의 힘의 범위 밖에 있는 것의 하나이네. 자네는 가장 풍요로운 넓이를 가진 인생이란 어떤 것이냐고 묻는 건가. 지혜에 이를 때까지의 인생이네. 그곳에 이른 사람은 가장 먼 목표가 아니라 가장 위대한 목표에 이른 것이라네.
그 사람은 대담하게 자랑해도 상관없네. 그리고 신들에게 감사하고, 신들과 아울러 자기 자신에게도 감사하는 것이 좋네. 그리고 자신이 존재하는 것에 대해 자연계에 생색을 내는 것도 당연한 일이네. 그는 자연계에 받은 삶보다 훨씬 선한 삶을 돌려준 것이므로, 그는 선한 사람의 모범을 만들었네.
<‘세네카인생론’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세네카지음, 김천운님 옮김, 동서출판>
세네카 : 로마 제정 초기를 그의 생애의 운명으로 삼은 철학자이다. 그의 철학은 키케로의 철학과는 달리 매우 대화적이다.키케로의 <국가에 대해여>가 정치철학의 금바탑이면, 세네카는 정치철학이 무엇인가를 깊이 새겨 표현한다. 그는 네로가 의제를 죽이자 <관용에 대하여>를 네로에게 바친다. 로마 황제에게 군주라도 폭군같이 되면 못쓴다고 차분하게 설명한다. AD1 에스파냐 코르바도에서 태어 남. 2~3세에 로마로 이주, 14세에 철학을 배우기 시작, 34세에 재무관이 됨,49세에 네로의 스승이 됨. 50세 법무관이 됨. 56세 집정관이 됨. 68세에 네로의 퇴위할 위기에 처하자 자살 함. <은헤에 대하여>,<자연연구>,<루킬리우스에게 보낸 도덕 서한>, <관용에 대하여>,<호박이 된 임금님>,<삶의 짧음에 대하여>, <윤리서간집><분노에 대하여>등 집필.
*스토아파 철학자, 세네카도 그의 강의를 들은 적 있다.
외로움과 고독
외롭다, 고독하다는 건 말 그대로 ‘혼자’라는 뜻이다. 반면 소외감은 주위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거나 동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할 때 느끼는 감정이다. 외로움과 마찬가지로, 혼자라서 느끼는 감정이므로 비슷해 보일지 모른다.
외롭고 혼자라 할지라도 소외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소외감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외로움’이 곧 소외감을 낳는 것은 아니다. 당연한 듯하지만 의외로 중요한 지점이다.
‘난 혼자다’라고 생각해도 그 사실을 부끄럽게 여기거나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 주변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는다면 소외감 때문에 힘들어할 이유가 없다. 자신이 처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외로운 건 외로운 대로 장점이 있어, 나답게 살아가기 위해서 고독은 필연적이야 어느 정도는 감수할 수밖에 라는 달관의 경지에 이른다. 그 결과 자기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자신의 고독에 대해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혼자라는 사실 때문에 소외감을 느낀다면, 누구든 자신의 외로움을 외면하고 싶어질 것이다. 고독으로부터 도망치거나 숨고 싶어질 테다. 세상의 기준에 따라 살면서 자신을 방어하려고 할 수도 있다.
그러한 삶이 계속되면 부지불식간에 ‘나 자신’을 잃는 것은 물론이다. 고독을 피하려다 정체성을 잃는 악순환에 빠지는 것이다. ‘자기다움’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우선 고독과 제대로 마주할 수 있을 만큼의 강인함을 길러야 한다.
외로움에 대한 편견은 분명 존재한다.
외로움은 양날의 칼과 같다. 외로움 속에서 자신을 성찰하면 몰랐던 자신을 발견하고, 숨겨진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낼 수 있다. 반면 외로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휩쓸려 버리면 중독이나 은둔 같은 수렁에 빠져버릴 수 있다.
외로움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외로움에 휩쓸리지 않는 강인함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외로움에 관한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 사회에는 고독을 부정적으로 보는 정서가 팽배하다. ‘외로운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아요.’ ‘혼자라는 사실이 슬프고 우울하다며 병원을 찾는 사람을 보면, 혼자 잇는 상태를 즐기거나 그 사건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드물다. 혼자라는 걸 들키고 싶지 않기에 외출도 꺼린다.
굳이 우울증 환자까지 갈 필요가 없다. 주변을 돌아보면 식사를 갈 때도, 술 한잔 하는 것도, 여행이나 쇼핑도 모두 누군가와 함께가 아니면 싫다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무리에 끼지 못하면 미움 받는 사람이 된 것 같이 불안하다.
무리의 성향이 자신과 맞지 않으면, 가면을 써서라도 끼고 싶어 한다. 반대로 무리에 끼지 못한 사람을 별종 취급하고, 자신이 그 같은 외톨이가 아닌 것에 안도한다. 이런 사회 정서 때문에 이슈가 된 것이 ‘화장실 혼밥’이나 ‘점심친구 증후군’이다.
학교나 직장에서 점심을 함께할 사람이 없는 사실이 부끄러워 화장실이아 도서관에 숨어서 도시락을 먹는 현상을 말한다.
고독을 바라보는 자기당착적인 시선에서 벗어나라.
이런 부정적인 시선은 사람들의 인식이 사회 변화 속도를 미처 따라가지 못한 결과이다. 알다시피 전통 사회에서 튀는 존재는 환영받지 못했다. 훌륭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으려면 남들과 같은 공동체에 속하는 것이 필수 조건이었고, 남들과 동일한 공동체에 속하지 못하면 무시당하고 천대받았다.
사회적 이동성이 적은 전통 사회에서 공동체로부터 배제당하는 것은 무엇보다 공포스러운 일이었다. 바야흐로 시대가 변했다. 창의력을 부르짖으며 독창서이 있는 인재를 찾는다. 그런데도 공동체에 귀속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습관은 여전하다.
시대에 맞지 않는 데다 자가당착까지 하다. 고루한 사고의 잔재일 뿐 현대사회에서는 근거도, 의미도 없는 편견이다. 이런 고정관념에 휘둘리지 말자.
고독은 나쁜 것이 아니다. 정말 잘 된 사람들은 하나같이 고독한 시간을 보냈다는 자신감을 가지자. 지금 외롭다면 혼자만의 시간을 누리고 잇는 것이며, 충분히 생각할 기회를 얻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무리 속하기 위해 노력하지 마라. 남에게 맞추기 위해 애쓸 시간에 자신을 기쁘게 할 방법을 생각하라. 자신에게 충실한 삶을 사는 것, 그것이 당신이라는 ‘단 하나의 존재’가 세상에 나온 이유이다.
<‘혼자 행복해지는 연습’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와다 히테키지음, 박선영님 옮김, 예문출판> * 와다 히데키 : 1960년 오사카출생, 도쿄대 의학부를 졸업, 도쿄대 의학부 정신신경과 조교수 역임, 히토츠바시 대학 경제학부 겸임교수 역임, 현재 ‘와다 히데키 몸과 마음의 클리닉‘원장이다. <수험의 신데렐라>로 모나코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 2012년에는 <나의 인생>으로 모나코국제영화제에서 4관왕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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