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추한 옷을 입고 춤을 추든
걱정으로 마음이 짓무르든
그대는 매일 새롭게 기적을 경험할지니
생명의 불꽃이 그대 안에서 꺼지지 않고 빛나리라.
어떤 이들은 황홀한 순간에 취해
불꽃을 마구 타오르게 하며 낭비해버리지.
어떤 이들은 세심하고 평온하게
자녀와 손주들에게 불꽃을 전달한다네.
하지만 답답하고 흐리멍덩하게 인생길을 걷는 자
그날의 괴로움으로 배를 불리는 자
생의 불꽃을 결코 느끼지 못하는 자,
이런 이들의 날들은 잃어버린 것이라네.
-헤르만 헤세, 1910년에서
불교에서는 욕심이나 분노, 시기 질투 등을 번뇌라고 하며, 번뇌에 눈, 코를 붙인 것 같은 것이 인간이라고 설하고 있다. 인간은 백팔 번뇌의 집합체고, 번뇌만으로 되어 있는 것이 인간이다.
질투하는 마음도 많고, 끊임없이, 임종의 순간까지 결코 멈추지 않고, 사라지지 않고, 그치지 않는다. “탐욕과 애욕과 분노와 미움의 운무는 항상 진실한 신심의 하늘을 덮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 그 고백이다.
나 자신의 일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너 자신을 알라.”고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말해왔듯이, 가장 모르는 것이 자기 자신이지 않을까? 아득히 먼 우주의 모습은 알아도, 소립자의 세계가 해명되어도, 30억 명의 유전자가 해독되어도, 여전히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나 자신이다.
어떤 분별없는 자의 짓인지, 등에 화살이 꽂힌 애처로운 오리 영상을 TV에서 보고 시청자들이 측은히 여긴 사건이 있었다. 마침 그 시각 식당에서 화살이 꽂힌 오리의 영상을 TV로 보며, ‘정말 저런 끔찍한 일을 어떻게…’라고 얼굴을 찌푸린 채 오리전골을 먹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사람은 자기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는 모르는군.’ 하며 반성한 적이 있다.
이런 모순들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옛날의 닭은 반드시 새벽에 울어 때를 알려주었는데.” “지금은 닭까지도 게으름뱅이가 돼서 문제라니까.” 나이 들어 귀가 잘 안 들리게 된 것을 깨닫지 못한 어느 시골 노부부의 대화를 듣고 쓴웃음을 지은 적이 있다.
동서고금에는 자기 자신을 모르는 것을 비유한 이야기들이 많은데, 그만큼 알 수 없는 것이 자기 자신이기도 할 것이다. ‘참 나’란 무엇인가? 자기 자신에 대한 일이므로 이보다 더 중대한 일은 없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중대한 일은 자신을 아는 일이다”라고 몽테뉴(1533~1592)는 말했다.
모든 사상이 고정된, 움직일 수 없는 중심 과제는 명백하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것이라고 독일 철학자 카시러(1874~1945)도 단언했다.
초인이란 자기실현을 넘어 자기초월을 이룬 사람, 베다 철학에서 말하는 사트바의 평화를 넘어선 브라흐만의 단계다. 나는 그 단계가 어떠하다고 당신에게 확신을 주며 말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은 이들이 초인으로 불릴 수 있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우리 자신을 뛰어넘어 매일 진화해갈 때 우리도 초인이 될지 모른다. - 신란(親鸞)성인의 말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