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자료

엘리자베스 1세

[중산] 2011. 8. 29. 12:39

 

오직 한 순간 동안만 나의 것이었던 그 모든 것들 ‘엘리자베스 1세’

나는 영예로운 여왕의 권한에 끌린 것이 아니라 신의 진리와 영광을 지키는 수단이 된 것이다. 이 말은 영국을 위대한 나라로 만든 엘리자베스 1세가 자신의 왕위에 대하여 한 말이다. 엘리자베스 1세는 빛나는 치적과 함께 끝까지 품위와 권위를 잃지 않은 여왕이다. 그래서 세실 경은 그녀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그녀가 부인하면 왕국의 누구도 여섯 단어 이상을 써서 주장할 수 없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여섯 명의 왕비를 맞은 것으로 유명한 헨리 8세와 그의 두 번째 왕비인 앤 블린 사이에서 태어났다. 앤 블린은 황실을 자주 출입하는 상인의 딸로서, 1522년 열 여섯 살 때 캐더린 왕비의 시녀로 처음 궁정에 들어왔다. 그녀는 키가 작고 몸집이 마르긴 했지만 까무잡잡한 피부와 반짝이는 검은 눈을 가진 매력적인 여자였다.

 

당시 헨리 8세의 왕비였던 캐더린은 여섯 차례에 걸쳐 임신했으나, 모두 사산과 유산으로 정상 출산을 하지 못하였고, 유일하게 낳은 자신은 메리 공주 하나뿐이었다. 이러한 불행에 대하여 헨리 8세는 자신이 형수와 결혼한 불륜 때문이라고 단정해 버리고 괴로워했다. 그런데 바로 그 무렵, 그의 눈에 뜨인 매력적인 앤 블린은 왕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아 버렸다.

 

 

이윽고 헨리 8세는 앤 블린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녀에게 푹 빠져버렸다. 하지만 앤 블린은 선뜻 국왕의 사랑에 응하지 않고 애를 태웠다. 헨리 8세는 캔터베리 대주교의 힘을 빌려 그녀를 설득한 다음. 1533년 1월 자신과 앤 블린의 결혼식을 서둘러 거행했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앤 블린을 왕비에 봉해버렸다. 이것은 이미 임신 4개월째인 앤 블린을 위한 배려였다. 이로써 헨리 8세는 캐더린과의 이혼을 매듭 짓지 않은 상태에서 중혼한 꼴이 되고 말았다.

 

결국 교황의 노여움을 사게 된 헨리 8세는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파문을 당했다. 게다가 앤 블린은 그 해 9월 왕자가 아닌 공주를 낳은 낳아 국왕에게 실망을 안겨 주었다. 하지만 국왕은 캐더린 왕비에게서 낳은 메리를 사생아로, 앤 블린에게서 낳은 엘리자베스를 왕위 계승자로 지명하였다. 그리고 이 결정을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그러나 국왕은 얼마 후부터 앤 블린에게 싫증과 권태를 느껴 다시 다른 여자에게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1535년 12월 앤 블린이 두 번째로 임신한 아이가 유산된 것에 크게 실망한 국왕은 이번에는 형제가 많아 왕자를 낳아 줄 확률이 높은 시녀 제인 시모어를 총애하기 시작했다. 그는 새 애인과 결혼하기 위해 앤 블린에게 불륜을 저질렀다는 누명과 함께 역모 죄까지 뒤집어 씌워 처형시켜 버렸다. 그녀의 나이 겨우 30세 되던 해의 일이다. 어머니 앤 블린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후, 엘리자베스 공주도 한때 왕위 계승권을 박탈당했으나 가까스로 25세에 이복 언니 메리 1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니 그녀가 바로 엘리자베스 1세이다. 부왕의 파행적 결혼 생활과 모후의 비운에도 불구하고 왕위에 오른 엘리자베스 1세는 탁월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여 그녀의 치세 기간 중 영국 절대왕정은 최고 전성기를 누렸다.

 

 

그리고 그녀는 여러 번 결혼할 기회가 있었으나 정치적, 종교적, 개인적 이유로 끝까지 독신으로 지냈다. 그녀는 의회의 권한을 축소하고 추밀원 중심의 정치를 펴는 한편, 지방의 명망 있는 사람들을 치안판사로 임명하여 지방행정을 맡게 하였다. 사회, 경제면에서는 그레샴의 제안에 의한 통화개혁, 도제 조례의 발포, 구빈법의 제정, 각종 공업 독점권 부여 등 중상주의 정책을 펴 나갔다. 또 무역 정책에서는 모직물 공업을 발전시켜 상인의 해외 진출을 촉진하였고, 모험상인조합에 독점적인 면허장을 교부하여 보호하였다. 또 스페인의 구교에 대하여는 단호한 태도를 취하는 한편 영국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1588년에는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시켜 해상권을 완전히 장악함으로써 영국이 일개 섬나라에서 세계적인 해상제국으로 발전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엘리자베스 시대에는 문화면에 있어서도 영국의 르네상스라 불리는 국민문학의 황금시대가 도래하여 셰익스피어, 베이컨 등이 배출되는가 하면, 그녀는 국민들로부터 훌륭한 여왕이라 불리며 존경을 한 몸에 받아 영국 영광의 상징이 되었다.

 

1602년, 69세의 나이에도 엘리자베스 1세는 10마일 가량 승마를 즐긴 후 사냥을 나갈 만큼 활동적이었다. 그러나 건강은 급속도로 나빠졌다. 불면증과 류머티즘이 악화되었고 기력이 떨어졌다. 그렇지만 그녀는 의사들이 권하는 약을 거부했다. 그녀 스스로가 자신의 건강 상태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603년 3월 22일, 엘리자베스 1세는 스코틀랜드의 제임스를 왕위 계승자로 지명한 다음 이틀 동안 침대에 누워 있다가 마침내 70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죽음에 대하여 대주교는 이렇게 말했다. 여왕은 잘 익은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그리고 순한 양처럼 눈을 감았다.

 

이와 같이 어린 시절의 시련을 극복하고 45년이라는 긴 재위 기간 중 빛나는 치적으로 전성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아온 훌륭한 여왕이기에, 마땅히 그에 걸맞은 무덤과 묘비명이 남아야 하겠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묘비에는 다만 그녀의 뜻에 따라 다음과 같은 짤막하지만 의미심장한 말이 새겨졌다.

 

 

오직 한 순간 동안만 나의 것이었던 그 모든 것들!

 

모든 것을 영원히 소유하려 했던 진시황은 긴 오명(汚名)을 남기고 빈손으로 떠났지만, 오직 한 순간 동안만 모든 것을 소유하려 했던 엘리자베스 1세는 긴 선명(善名)을 남기고 역사에 살아남았다. 신의 진리와 영광이 오래도록 그녀의 묘비명과 함께 할 것이다.<“인생 열전”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박영만 지음, 프리윌>

 

저자 박영만

충북 제천에서 출생했으며, 오랜 수련과 출판계 활동을 거쳐 현재는 프리윌출판사, 드림북코리아 대표로 있다. 지은 책으로 『깨달음의 중심에 너를 세워라』, 『에피소드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다이제스트』, 『우리의 삶에 행복을 채우는 시 138편』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칼릴 지브란의 『사람의 아들 예수』, O.헨리 단편집 『도시는 아득히 먼 곳에 있었다』가 있다.

                                                                                                      엘리자베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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