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양면성
예전에는 혼외정사가 강압적 결혼에 대한 반항의 상징이었다면, 오늘날엔 일종의 심심풀이이자 가정에 싫증을 느낀 이들이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고 빠져드는 샛길이다. 영화나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수많은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 혼외정사가 유발하는 고통을 경험하고자 그 길에 들어서는 후보자들도 분명 많을 것이다. 두려움을 떨쳐 버리려고, 기분 전환삼아, 젊게 보이려고 은밀한 일을 추구하다 보니 이를 사랑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인류의 절반이 균등하게 공유하는 이러한 부정은 ‘호기심’ ‘자만심’ ‘자기도취’ ‘새로운 육체에 대한 지나친 욕망’일 뿐이다.
따로 또 같이
두 사람이 노년을 함께 보내고 싶은 욕구는, 온몸이 짜릿하고 심장이 두근거리는 흥분 속에서 열정을 불태우겠다는 의지 못지않게 정당한 것이다. 자유를 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속박을 원하는 사람도 있고, 가족의 온정을 누리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막간의 짧은 도취감을 맛보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으며, 권태로움보다 고독의 더 두려운 나머지 부부라는 굴레를 달게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다.
이성과 감정의 이종교배
사랑의 영역에서 돈을 제외시키는 것은 위험한 생각이다. 평소 대화에서는 거론하지 않다가 작은 문제라도 발생하면 쟁점으로 떠올라 치사한 해결로 변질되는 탓이다. 모든 정신적 혹은 감정적 채무는 현금으로 지불된다. 오로지 사랑에만 의지해서 맺어진 커플은 사상누각과 같다.
처음 만났을 때 두 사람을 연결시키는 불타는 정열은, 기분 좋으면서도 믿음이 가는 동조와 우정이라는 또 다른 모습의 가치 있는 관계로 바뀌지 않은 한 연장될 수 없다. 일관성 있는 태도로 열정을 승화시킴으로써 차갑게 식어 버린 공동생활에 온기를 불어넣고, 격정의 뜨거운 불길로 결혼 생활을 뒷받침하는 요소들을 태워 없애기 보다는 이를 늘려 나갈 필요가 있다. ‘바람직한 부부애’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요란하지 않은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으로 맺어진 부부는 서로 세심하게 배려하는 법을 알기에 아무 생각 안하고 자기 일에 열중할 수 있다. 사랑에 개의치 않고, 증거를 댈 필요가 없으며, 끊임없는 요구 때문에 비애감을 느끼지 않는다.
1796년 마담 드 스타엘은 “여자에게 사랑은 전부이지만, 남자에게 사랑은 한때에 지나지 않는다.“고 적은 바 있다. 살다보면 사랑 말고도 정열을 쏟을 활동이 얼마든지 있으며, 야망이 남녀 모두의 로망이 될 수도 있다. 신나는 인생을 선택하고 사회참여의 기회를 되찾는 대신, 부부라는 구속에 얽매여 젊음을 매장시킬 이유가 무엇인가?
오늘날 대다수의 여성들은 연애만큼이나 직업적인 성공에 관심이 많으며, 그러자면 과학의 힘을 빌려 출산을 기피하거나 뒤로 미루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는 감정적이면서도 성숙한 삶과 멋진 직업을 양립시키는 것이 가능해졌지만 여기에는 많은 갈등이 따른다. 여성이 출산과 일을 양립시킬 수 있도록 돕는 것이야말로 현명한 가족 정책의 주요 과제이다. 유럽에서 가장 높은 출산율을 보이고 이는 프랑스는 이 분야에서 가히 선구자적 위치를 지키고 있다.
~1960년대에 유토피아를 꿈꾸었던 공상적 사회주의자 샤를 푸리에가 부부의 경계를 뛰어넘는 다양한 연인 관계를 창조해냈다면, 오늘날엔 사랑의 경계를 뛰어넘어 시대감각과 의사전달 방식을 고려한 파트너십, 우정 어린 관용, 상호 존중 등의 다양한 시도를 포괄하는 부부 관계를 창조할 필요가 있다.
사는 즐거움
반세기 이래로 우리는 어이없는 모험을 계속하고 있다. 자유롭게 풀어주는 동시에 억압하는 해방을 시도하는 것이다. 쾌락주의가 자본주의의 마지막 단계가 되었음을 뒤늦게 확인하게 한 것이다. 이제 우리가 재창조해야 할 것은 경이로움과 정신적인 균형, 절제를 포함하는 비상업적 쾌락주의이다. 현대사회는 항상 느끼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말고 행동에 옮기라고 부추긴다. 이러한 방탕은 우리를 유혹함과 동시에 파멸로 이끌며, 일상의 자잘한 기쁨에 권태를 느끼게 만듦으로써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의 세계로 인도한다. 그러한 신기루에 현혹되지 않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갖춰야 할 양식이다. 걷잡을 수 없는 해방이란 자가당착에 빠질 수밖에 없으며, 제동이 걸리지 않을 경우 실패의 장막을 드리운다.
우리가 지닌 최후의 무기는 관용과 신중함이다. 각자의 결점을 너그럽게 봐주고 소중한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지 말자.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그들의 존재 자체에 감사하자. 그게 바로 사는 즐거움이다.
<‘결혼, 에로틱한 우정’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파스칼 브뤼크네르 지음, 이혜원님 옮김, 뮤진트리>
3월 말의 대운산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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