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삶의 섬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
지루함의 올바른 활용법을 배우면, 지루함은 명상으로 가는 강력한 매개체가 되고, 만족스러운 삶을 창출하는 최적의 공간이 된다. 지루함을 느끼는 상황에서도 세상에 정신을 빼앗기지 않았을 때, 삶의 진실이 무엇인지 보고 느끼기 시작할 수 있고, 충만한 삶을 살지 못하게 발목을 잡는 게 뭔지를 알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탐구되지 않은 삶은 가치가 없다.”라고 했다. 지루한 시간은 우리 인생에 ‘탐구’를 시작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이다. 시간 속의 특별한 공간이다.
실존적 지루함
삶이 바쁘기는 한데 관심이 가거나 끌리는 게 거의 없을 때, 우리는 ‘채워진 실존적 지루함'을 느낀다. 일상에서 어떠한 호기심을 갖거나 자극도 느끼지 못하면서, 정신없이 바쁘기만 한 나날을 보낸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다. 이탈리아 작가 알베르토 모라비아는 이를 ’한때 삶에 활기를 주었으나 지금은 ‘시들고 죽어 버린’것들의 ‘질병’이라고 묘사 했다. 쇼펜하우어는 실존적 지루함이 “어떤 종류가 됐건, 우리의 욕망을 해결해 줄 대상을 찾아낼 능력을 상실하고, 어떤 행동에도 의미가 없을 때 발생한다.”라도 말했다.
우주입자는 물체와 물체 사이의 공간에 존재하면서 삼라만상을 일으키는 물질을 구성 한다.아노말론으로 불리는 이 입자는 관찰자가 기대하는 특성을 띄는 것으로 알려졌다. 공간속의 파장은 관찰자의 눈에 띄는 순간 입자로 변한다. 달리 말해 공간 속의 입자는 어떤 식으로든 고정된 게 아니라 순수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지루함은 현대의 바쁜 삶에서 마주하게 되는, 신경을 흩트리는 것을 걷어내고, 우리 존재의 참된 본질을 응시하는 공간이다. 하이데거는 우리 인생을 차지하는 모든 분주함과 활동이 사실 ‘존재를 망각하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 삶을 충족시키는 모든 것들 때문에 인생과 세상을 진실하게 탐구해 최상의 선택을 하는 길이 가로막힌다는 것이다.
지루함은 인생에 잠시 쉼표를 찍고 탐구를 시작하는 공간이다. 지루함이 곧 인생의 작업실이라고 생각하는 게 좋다. 이때 지루함은 무섭고 불편한 것들로 채워져 있어서 우리는 가급적이면 멀리, 저 멀리 도망치고 싶어진다.
외부의 사건들이 우리 인생의 만족을 끼치는 건 분명하지만, 만족과 충족이 내면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쳐야 한다. 우리는 욕망을 남이 해결해 주고, 내 문제가 바깥 요인으로 해결된다면 훨씬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고픈 유혹을 견뎌야 한다. 그 대신 불교에서 말하는, 집착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해, 외부의 모든 것들이 진정한 만족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어떨까?
불편함은 지루함 때문에 드러나는 것이지 지루함 그 자체는 아니다.
지루함은 우리의 신념을 겉으로 드러낸다. 해롭고 편협하며 고통스러운 신념을 말이다. 개인의 신념은 설령 그것이 진실과 거리가 멀어도 줄곧 진실이라고 믿는 명제다. 이런 신념에 맞서는 일은 무척 불편하다.
지루함이 무서운 진짜 이유
철학자 하이데거는 지루함이 인간존재에 관한 근원적이고 두려운 진리를 드러낸다고 말했다. 우리 인생 안의 모든 것과 인생자체가 언젠가는 다 무의미해질 것이라는 진리 말이다. 지금 열의 넘치고 매달리는 일이 언젠가는 내게 아무 의미 없는 날이 온다. 지루함은 우리 모두가 채우려 안달하는 공허함을 드러낸다. 라르스 스벤젠은 지루함은 “끝없이 삶을 채우려는 욕망의 추구가 초래하는 불가피한 결핍”이라고 했다.
좋은 인생 좋은 직업, 동반자 그리고 그 외에도 원하는 건 거의 다 가졌지만, ‘여전히‘뭔가 빠졌다는 느낌이 든다. 채워야 하는 빈 공간이 있다. 사람들은 어쩌면 ’존재의 완성‘을 찾아 헤매고 있는지 모른다.
대부분의 위대한 종교가 천국, 열반, 혹은 발할라(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궁전)를 이야기하여 존재의 완성을 약속한다. 그것은 언제나 충만감을 느끼고, 삶에 충실하며, 의미있고, 평화롭고자 하는 욕망이다. 분명 인간이 태초부터 갖고 있었던 욕망이다.
라르스 스벤젠은 인생이 존재를 위한 분투이고, 존재가 보장됐을 때 삶은 지루해진다고 했다. 다시 말해, 기본 욕구가 충족되면 인생의 다른 의미를 찾아야 한다. 이 단계에 오면, 돈, 식량, 안식처를 더 많이 구해도 삶의 만족도가 올라가지 않는다.
프랑스 철학자이자 작가인 알베르 카뮈와 장폴 사르트르는 인간의 존재가 ‘부조리하다’고 표현했다. 인간은 인생에서 의미를 찾지만, 누구도 딱히 ‘이거야’라고 확신할 수 있는 의미나 목적을 아직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족으로 인도할 삶의 방식이 이건지, 저건지 알 길이 없다. 완벽한 존재가 되기 위한 욕구를 완벽하게 채워줄 의미란 없다.
인생의 부조리함을 받아들이면, 존재라는 골칫거리가 품은 두 가지 진실의 윤곽이 뚜렷해진다. 첫째, 인간은 어떠한 길잡이나 확실한 보증 없이도 스스로 인생을 살아갈 방식을 선택할 자유와 의무를 가진 존재라는 자각이다. 둘째는 인생을 사는 최선의 방법을 찾는데 허용된 시간이 누구에게나 똑 같이 유한하다는 진실이다.
지루함을 회피하려는 파괴적 반응들
지루함을 채우려고 했던 활동이 중독으로 변하면, 지루함이란 공간은 더욱 고통스럽게 변하고 갈수록 강력한 수단을 동원하지 않으면 지루함을 메울 길이 없어진다.
게임중독, 울트라마라톤, 강박적 여행, 익스트림 스포츠, 쇼핑중독...
지루함과 명상이 닮은 이유
하이데거는 지루한 상태를 일컬어 ‘존재에 대한 마음씀’이라고 했다. 다른 것에 신경을 빼앗기거나 ‘존재를 망각’하지 않는 유일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마음 챙김훈련을 하거나 지루함에 빠지는 목적은 평생에 걸쳐 무를 경험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대신 지루함과 마음챙김을 통해 존재와 잠시 조우하고, 그곳을 짧게 여행하며 통찰을 얻은 후 현실로 돌아오는 것이 목표다.
마음 챙김을 넘어 지루함으로
마음 챙김은 스트레스와 불안을 느끼는 상황에서 자신의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발견하고 변화시켜 감정 및 정신건강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유익하기 때문에 사용되는 수단이다. 지루함은 주위대상 또는 행위와의 관련성이 완벽히 제거된 상태다. 의미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다. 마음챙김은 우리를 무의 근처까지 인도한다면, 지루함은 그보다 더 가까이 데려다 준다. 모든 감정이 그렇지만, 지루한 감정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낼 수는 없다. 하지만 지루함이 생겨날 가능성이 높은 환경을 조성하는 것은 가능하다. 생활 속에서 신경을 빼앗는 것들과 흥밋거리를 줄이는 것도 방법이다. TV를 끄고 스마트 기기를 치우고 한동안 침묵 속에 그냥 앉아 있어 보자 나만의 무인도를 만들어도 좋고, 우주를 떠다니는 우주 비행사가 되어도 좋다. 아무리 짧은 지루함의 순간일지라도, 심오한 무의미와 무의 씨앗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당신은 지루함이 필요하다.”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마크A 호킨스 지음, 서지민 옮김, 박찬국 해제, 틈새책방>
마크A 호킨스 : 캐나다 사이먼 프레이저 대학교 교육학 철학박사, 강의, 심리상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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