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자료

피로사회, 우울사회~!

[중산] 2018. 6. 24. 20:42

피로사회

피로는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모리스 블랑쇼>

 

활동사회라고도 할 수 있는 성과사회는 서서히 도핑사회로 발전해간다.

성과사회, 활동사회는 그 이면에서 극단적인 피로와 탈진상태를 야기한다. 이러한 심리 상태는 부정성의 결핍과 함께 과도한 긍정성이 지배하는 세계의 특징적 징후이다. 그것은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을 전제하는 면역학적 반응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해 유발되기 때문이다. 과도한 성과의 향상은 영혼의 경색으로 귀결된다.

 

성과사회의 피로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고독한 피로다. 한트케가 ‘분열적인 피로’라고 부른바 있는 바로 그 피로다. 이쪽에는 나의 피로가, 저쪽에는 너의 피로가 있는 꼴이었다. 이런 분열적인 피로는 인간을 ‘볼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상태’로 몰아넣는다. 오직 자아만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나는 그녀에게 ’나는 너한테 지쳤어‘라고 말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함께 그렇게 외쳤다면 우리는 각자 동굴에서 해방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토록 심한 피로 때문에 우리에게서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영혼이 다 타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피로는 폭력이다. 그것은 모든 공동체, 모든 공동의 삶, 모든 친밀함을, 심지어 언어 자체마저 파괴하기 때문이다.

 

 

우울사회

오늘날의 사회는 날이 갈수록 금지와 명령의 부정성을 철폐하거나 자유로운 사회를 자처하는 성과사회다. 성과사회를 규정하는 조동사는 프로이트의 ‘해야 한다’가 아니라 ‘할 수 있다’이다. 이러한 사회적 변동은 인간의 내적 영혼에도 구조적 변화를 가져온다. 후기근대적 성과주체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대상으로 하는 복종적 주체와는 완전히 다른 심리를 가지고 있다. 프로이트의 심리 장치에서는 부인과 심적 억압, 위반에 대한 불안이 지배적이다. 자아는 ‘불안의 장소’이다. 하지만 후기근대의 성과주체는 부인할 일이 거의 없다. 그는 긍정의 주체다.

 

후기근대의 성과주체는 의무적인 일에 매달리지 않는다. 복종, 법, 의무 이행이 아니라 자유, 쾌락, 선호가 그의 원칙이다. 그가 노동에서 기대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쾌락의 획득이다. 그의 노동은 향유적 노동이다. 그는 타자의 명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그 누구보다 자기 자신에게 귀를 기울인다. 그는 자기 자신의 경영자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타자로부터의 자유가 해방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타자로부터의 자유는 나르시시즘적 자기관계로 전도되며, 이는 오늘날 성과주체가 겪는 많은 심리적 장애의 원인이 된다.

 

타자와의 관계가 사라지면 보상의 위기가 찾아온다. 스스로를 보상하거나 스스로를 인정하는 것은 블가능하다. 신은 도덕적 업적을 보상해준다. 보상구조에 이상이 생기면 성과주체는 점점 많은 성과를 올려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진다.

 

세네트 역시 보상의 위기가 온 원인으로 나르시시즘적 장애와 타자관계의 결핍을 들고 있다. “성격장애로서의 나르시시즘에서는 뚜릇한 자기애와 완벽하게 대립된다. 자아 속으로서의 침잠은 보상을 낳지 못하고, 오히려 자아에게 고통을 가한다.

 

세네트가 오늘날 개인이 겪고 있는 여러 심리 장애를 나르시시즘과 연관시키는 것은 정당하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정당한 관찰에서 잘못된 결론을 이끌어 낸다. “기대가 끝없이 올라감에 따라 사람들은 그 어떤 행동에서도 결코 만족감을 맛 볼 수 없게 되는데, 이와 나란히 무언가를 완결시킬 수 있는 능력도 상실된다. 어떤 목표를 이룩했다는 느낌은 회피된다.

 

슬픔은 강렬한 리비도가 투여된 대상의 상실과 함께 일어난다. 슬퍼하는자는 전적으로 사랑하는 타자와 함께 있는 것이다. 후기근대의 자아는 리비도적 에너지의 대부분을 자기 자신에게 사용한다.

 

우울증에 자주 선행하여 나타나는 소진(Burnout)은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될 힘이 빠져가는 주권적 개인의 증상이라기보다 자발적인 자기 착취의 병리학적 결과이다.

 

정신분석학적 치료의 핵심은 심리적인 내적 갈등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는데 있다. 즉 그러한 갈등의 존재를 의도적으로 의식의 표면으로 끌어올리는데 있다.

 

자아는 일단 도달 불가능한 이상 자아의 덫에 걸려들면 이상 자아로 인해 완전히 녹초가 되고 만다. 이때 현실의 자아와 이상의 자아의 간극은 자학으로 이어진다. 이상 자아에 비하면 현실의 자아는 온통 자책할 거리밖에 없는 낙오자로 나타난다. 자아는 자기 자신과 전쟁을 치른다. 모든 외적 강제에서 해방되었다고 믿는 긍정성의 사회는 파괴적 자기 강제의 덫에 걸려든다. 21세기의 대표 질병인 소진증후군이나 우울증 같은 심리 질환들은 모든 자학적 특징을 나타낸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폭력을 가하고 자기를 착취한다. 타자에게서 오는 폭력이 사라지는 대신 스스로 만들어 낸 폭력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러한 폭력은 희생자가 스스로 자유롭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더 치명적일 수 있다.

<‘피로 사회’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지은이 한병철 교수님. 옮긴이 김태환 교수님, 펴낸곳 문학과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