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라고 하면 위화감을 느끼는 사람도 많을 수 있는데 특정 종교의 신앙을 대상으로 하기보다는 세계에 의미를 주는 것,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커다란 의지 같은 것이라고 생각 된다.
사람은 극단적인 상황에 처했을 때 현실 자체보다 그것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느끼고 거기서 의미를 찾아 살아가려고 한다. 현실만 마주하면 찌부러질 것처럼 구원이 없는 상황에서도 현실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느끼는 것으로 살아갈 의미가 생긴다. 비트겐슈타인 역시 전선에서 죽음의 위험에 직면했을 때 현실을 초월한 의미를 느낀다. 그것은 그가 말로는 할 수 없는 것으로, 철학에서 배제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에서는, 뜻대로 되지 않는 불행한 세계로부터 거리를 둠으로써 세계에 농락당하지 않고 자신을 지키려 하는 생각과 그런 세계의 배후에 뭔가 숭고한 의미가 있다고 믿어려는 바람이 서로 교차하고 있다.
현실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과 현실에서 사실을 초월한 의미를 찾는 것. 이것들은 모두 인생을 살아가기 위한 철학으로서 정신적 파탄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행위다. 인생을 살아가기 위한 철학이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기 위한 행위가 그 철학을 자연스럽게 필요로 하기 때문에 아슬아슬한 생을 지탱하기 위해서 철학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의 말은 더욱 예리해져 과격할 정도로 자신의 물음에 대한 답을 타협 없이 찾아간다.
<안동 하회마을>
1916년 7월 8일
신을 믿는다는 것은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이해한다는 것을 말한다.
신을 믿는다는 것은 세계의 사실들로는 여전히 끝나지 않음을 안다는 것을 말한다.
신을 믿는다는 것은 삶의 의미를 가짐을 안다는 것을 말한다.~ 나는 운명으로부터 독립적일 수 있다. 두 가지 신성이 있다. 이것이 전부이다. 선하고 동시에 악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행복한 사람은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시간 속에서가 아니라, 오직 현재에 사는 사람만이 행복하다.
현재 삶에 있어 죽음이란 없다.
죽음은 삶의 사건이 아니다. 죽음은 세계의 사실이 아니다.
영원을 무한한 시간의 지속이 아닌 무시간성으로 이해할 때, 현재를 사는 사람은 영원이 사는 것이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 나는 세계와 일치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행복하다’를 뜻한다.~<1차 대전(1914~1916)때 러시아군의 맹공격을 받아 후퇴하는 중에 직접 쓴 ‘비트겐슈타인 철학일기’ 일부이다>
분열과 파탄의 갈림길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하려는 사색을 담고 있는 글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다가오는 죽음의 한가운데서 필사적으로 ‘살아가는 의미란 무엇인가’에 대해 묻는다. 신을 믿는 다는 것이란 이 세계의 현실을 초월한 의미가 있다는 것과 같다며 두 가지 신적인 존재를 언급한다. 즉 세계와 자신(자아)이다. 양자는 어 떤 부분에서 독립된 존재지만 자신은 세계에 의존하는 부분도 있다. 왜냐하면 세계는 자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알 수 없는 의지에 의해 그곳에 존재해온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과 세계가 일치한 상태는 행복한 상태로, 그 상태에서는 죽음도 두렵지 않지만 양자의 불일치가 일어나면 마음이 괴롭고 불행해진다. “행복하게 살기를!” 하고 스스로 외칠 때 그는 세계, 즉 자신의 의지와 일치된 삶을 통해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지려 한다. 세계와 일치되어 지금 이 순간을 살면 죽음도 두렵지 않고 자기의 유한성을 초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 문장에서 느껴지는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부끄럼 없는 인생을 살고 싶다는 비트겐슈타인의 강한 의지다. 설령 다음 순간 목숨을 잃더라도 지금 이렇게 살아 있는데에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다.
1916년 8월 13일
인간이 자신의 의지를 이행할 수 없고 세계의 모든 고난에 시달려야 한다고 가정해 볼 때, 무엇이 그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까? 인간이 세계의 고난을 막을 수 없을 때, 인간은 도대체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 걸까?
지식의 삶을 통해서. 좋은 양심은 지식의 삶이 수호하는 행복이다.
지식의 삶이란 세계의 곤궁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삶이다. 오로지 세계의 안락함을 포기할 수 있는 삶만이 행복하다. 삶에 있어서 세계의 안락함이란 은총이 많은 운명일 뿐이다.
위 글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세계로부터 거리를 두고 현세적인 즐거움을 단념한 채, 오로지 사고하고 인식하는 삶을 살면 어떤 가혹한 고난이 닥치더라도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세계와 일치해서 사는 삶의 방식과는 다른 삶의 방식이다.
비트겐슈타인 안에 있는 두 가지 모순된 충동은 분명하다. 하나는 세계로부터 거리를 두어 평인을 유지하려고 하고, 다른 하나는 세계와 일치해서 신의 의지를 재현하려고 한다.
비트겐슈타인이 전쟁터에서 쓴 말도 ‘무의미한’명제인데, 거기에는 명석하게 말할 수 있는 한계를 초월한 무언가가 나타나 있고, 그것은 한 인간의 정신을 지탱했다.
인생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과학적인 명제처럼 말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살아갈 수는 있다. 철학한다는 것은 말로 할 수 없는 것의 한계에 도전해 거기에서 세계를 초월한 어떤 의미를 찾으려는 시고로, 인생을 살아가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행위이다.
따라서 그것은 사색하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말로 할 수 없으므로 직접 인생을 살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세계와 일치하는’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어떤 의미에서 언어의 한계를 정함으로써 말에서 해방되어 세계에 몸을 던지는 것이다. 언어를 봉인해 말에서 자유로워짐으로써 불필요한 구속에서 벗어나 가벼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이유’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오카다 다카시(정신과 의사 겸 교수) 지음, 홍성민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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