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자료

칸트⦁괴테⦁니체 3인의 초대!

[중산] 2020. 10. 21. 12:51

칸트의 의무와 행복이론

삶의 행위라고 요구하면서 가장 내⦁외적인 결단의 가능성으로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은, 행위자 자신의 행복 혹은 도덕적 의무 이행이라는 양자택일에 직면한다. 양자의 유인(誘因)이 균등하게 충족되는 경우에만 삶의 만족과 내적 화해가 가능해진다. 어느 한쪽이 부족하면 화해할 수 없는 삶의 균열을 야기한다.

 

이와 같은 이유로 소크라테스 이래 모든 도덕철학자들은 도덕적 요구와 개인적 행복 사이에 진정한 모순이 존재할 수 없음을 입증하는데 노력해왔던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누구도 악하기를 원치 않고, 비도덕적이라는 것은 단지 이론적 오류에 지나지 않으며, 아는 자는 언제나 도덕적이라고 설파했다. 이 경이로운 명제는 어디까지나 미덕과 행복이 일치한다는 선입견 없는 전제조건에 근거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전제조건들이 사실인 경우, 즉 만약 모든 상황에서 동일한 행위가 의무의 요구와 사적 관심의 요구를 충족시킨다면, 우리는 현혹되는 경우 또는 잘 알지 못하는 경우에만 행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도덕적인 행동이 행위자의 주관적인 관심, 즉 행복에 대한 관심을 충족시킨다면,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확실히 우둔함의 소치이다.

 

미덕과 행복의 괴리는 고대 그리스인의 삶에도 무수히 나타났다. 그들에게 미덕이란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것이었다. 즉 국가의 안녕과 힘을 위한 활동이 미덕이었던 것이다. 그리스 국가들은 전체의 발전으로 개별인간이 얻는 안전, 명성 및 부의지분을 직접적으로 인식할 수 있을 만큼 작았다.

 

그렇지만 사회영역이 확대되면 개별 인간은 중심에서 점점 멀리 떨어진 주변부에 위치하게 된다. 사회영역 확대는 사회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의무와 그에게 허용하는 행복이 조화를 이루는 이해공동체를 분열시킨다. 이런 부조화의 문제는 고대 이래로 정신적 발전과 더불어 시작된 사람들을 더 불안하게 만든다.

 

우리의 아주 개인적인 존재가 우리의 운명이나 외적 세력과 얽힘으로써 산출되는 행복의 열매는 우리가 행할 수 있는 도덕성의 정도에 대해 점점 더 우연적이고 모순적인 관계가 된다. 철학적 사유는 평균적인 사람이 존재의 근본적인 욕구인 의무와 행복의 조화를 고집하도록 만드는 다소 경솔한 낙관주의를 반복한다.

 

그것은 “정직은 오래 가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라는 속담일 수도 있고, 죄를 지으면 반드시 벌을 받는다는 믿음일 수도 있으며, 피안의 심판관이 공적과 행복이 균형을 이루도록 배려한다는 믿음일 수도 있다. 스피노자가 말했듯이 행복은 미덕에 주어지는 보수가 아니라 미덕 그 자체라고 주장하곤 한다.

 

칸트에 의하면 행복은 미덕에 이르는 길에 존재하지 않는다. 칸트는 행복이 오히려 외적 기회와 그것을 재치 있게 이용하는데 달려 있으며, 또한 기질과 삶의 감정이라는 내적 기회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행복과 고통이란 주체의 욕구와 주체의 계산 불가능한 사회적, 물리적, 정신적 운명 사이의 우연적인 관계일 뿐이다.

 

실로 도덕은 자유로운 인간에게만 고유한 가치이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삶의 모든 재화와 의미는 자연의 자비와 외적 또는 내적 운명에 달려 있는 반면, 의무의 이행은 전적으로 우리 손에 달려 있다.

 

우리는 가장 가치 있는 경우에만 완전한 우리 자신이다. 또한 거꾸로 우리의 존재는 전체적인 행위가 가장 고유한 내면성을 이루고 우리 자신이 아닌 모든 것에서 완전히 자유롭다는 조건 하에서만 최대한 가치를 얻는다. 우리 존재의 가치와 스스로 책임지는 자유 사이의 자명하지 않은 연관관계를 들추어낸 것은 칸트가 이룬 불멸의 업적이다.

 

 

 

칸트는 행위를 횡적차원으로 니체는 종적 차원으로 확장시킨다. 행위는 개인에서 무한히 연속적으로 반복된다. 행위의 확대는 동일한 목적에 이바지한다. 그것은 행위의 의미를, ‘오로지-지금’ 그리고 ‘오로지-여기에서’의 형식으로 행위를 묘사함으로써 일어나는 우연성에서 해방시키기 위함이다.

 

행위의 내적 가치는 시간과 숫자, 어디에서 발생하고 얼마나 자주 발생하는가 하는 문제를 완전히 초월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러한 범주에 얽매어 있기 때문에, 행위의 내적 가치는 그 진정한 비중을 잴수 있도록 적어도 무한한 숫자와 시간을 갖추어야 한다.

 

니체의 영겁회귀 이론의 역설은 근본적으로 오해일 뿐이다. 니체는 그 자신의 철학을 ‘비도덕주의’라고 규정한다. 그는 다수의 사람들과 상태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채 사회적 존재의 가치를 최상의 개인들에게로 옮겨 놓는다. 그는 무자비하게 선택하고 도태시키는 훈육을 전도함으로써 비참하고 처진 사람들에 대한 동정과 이타주의를 보여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래쪽에 관심을 갖는 모든 것, 자비와 겸손이 지닌 외견상의 도덕성은 삶이 아직 도달하지 못한 높이로 고양되는 것을 저지하기 때문이다. 지도적인 사람들이 대중의 수준으로 위축되는 것을 다음과 같이 의미로 말한다. “가장 멀리 떨어진 자들이 그대들의 이웃사랑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사람이다.”

 

강한 자를 약한 자의 종으로, 건강한 자를 병약한 자의 자의 종으로 만들려는 ‘몰아성’에 대한 증오, 이것은 니체 자신에게, 그리고 수많은 그의 적대자에게 도덕에 반기를 드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가 보기에 본질적으로 도덕은 기독교 이타주의적-사회적 신념의 고안품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칸트와 극단적으로 대립된다고 믿는다. 실제로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칸트와 니체는 모두 도덕주의자다. 칸트는 기존의 도덕을 공식화하려 한 반면, 니체는 ‘도덕’으로 멈추어 서 있는 기존의 도덕에 새로운 내용을 부여하려 한다.

칸트는 주어진 것을 인식하기를 원하는 이론가이며, 니체는 주어진 것을 실천적으로 개혁하기를 원하는 도덕의 사제이다.

 

“변화무쌍한 잠자리가 샘물가에 날아다닌다.

벌써 오래전부터 나를 기쁘게 한다.

때로는 어둡고 때로는 밝다.

마치 카멜레온 같이, 때로는 붉고, 때로는 푸르며, 때로는 초록이다. 오, 내 가까이서 그 색깔을 한번 보고지고!

잠자리는 빙빙 돌고 둥실둥실 떠돌며, 결코 쉬지 않는구나!

그러다가 조용히 버들가지에 앉는다.

잡았다! 잡았다!

그리고 자세히 관찰해보니

슬프고 어두운 푸른색이구나 -

그리하여 환희는 깨져버리고 만다.“ <괴테, 환희>

 

미학적 향유를 파괴할 정도로 너무 분해된 것은 환상이 아니라 대상의 상이 실제 사라져 버린다. 잠자리의 색깔에 매혹되어 가까이 보기를 원하여, 따라가 잡아서 보니 슬프고 어두운 파란색이다. “그리하여 환희는 깨져버리고 만다!”

아름다움은 이념적인 내용을 실제적인 존재에 구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즉 아름다움의 철저한 지배는 존재의 정신적 원리와 자연적인 원리, 그리고 주관적인 원리와 객관적인 원리 사이의 근본적인 대립이 해체되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대립이 그야말로 무(無)임을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뉴턴의 색채 론에 대해 괴테가 논박한 궁극적인 동기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면 드러난다고 주장하는데, 부분적으로는 정당하다. 괴테는 수많은 좁은 틈과 렌즈를 통과해야 하는 스펙트럼을 비웃으며, 청명한 하늘 아래 햇빛 속에 행하는 시도를 유쾌할 뿐 아니라 찬양한다. 미학적 심상의 파괴는 그에게는 곧 진리의 파괴이다. 거꾸로 칸트에게는 미학적 규준(規準)은 자연인식의 대상에 대한 방자함과 사로(邪路)가 될 것이다.

 

괴테는 아름다움에서 참된 인식을 미혹하지 않는 규준을 발견한다. 만일 객체 - 외적인 또는 지적인 - 의 분해로 그 현상의 아름다움이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한다면, 그 순간 분해의 결과 역시 허구임이 입증될 것이다. 자연을 잡아 찢는 것은 이론적으로 틀렸다. 왜냐하면 미학적으로 틀렸기 때문이다.

 

근대의 세계관은 근원적인 이원성을 다양한 방식으로 화해시키면서 발전하는데, 거기에는 또 다른 이원성이 첨가된다. 일반적으로 도덕성의 문제가 기인하는, 자아와 사회 전체 사이의 실천적 이원론이 바로 그것이다.

 

개별인간의 이해관계와 전체의 이해관계는 원시문화에서는 언급할만한 대립관계에 있지 않다. 인격의 개별화가 시작되면서 양자 사이의 대립이 생기며, 또한 개별인간에게 자신의 개인적 인간관계를 보편적인 이해관계에 종속시키라는 요구가 생겨난다.

 

그리하여 의지와 당위가 대립하게 되고, 자연적 주장성과 객관적 도덕법칙이 대립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통일성에 대한 요구가 일어난다. 어느 한쪽을 억압하거나 양자를 똑같이 충족시킴으로써 개인과 전체 사회의 이원론을 지양하라는 요구가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명백히 삶의 가치를 최대화하도록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대한 칸트와 괴테의 해답은 그들의 이론적 세계관에서의 관계와 정확히 일치한다.

 

1. 괴테의 이해를 위하여~!

괴테는 위대한 망각자(妄覺者 )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나는 사람들이 괴테를 천박하게 해석했다고 믿는다. 흔히 생각하기를, 그는 지나간 것과 타협하고, 행위의 결과로 나타나는 어려움을 조용히 던져버리며, 앞을 향한 시선과 발걸음을 방해하는 경우 뒤를 돌아보는 것과 뒤를 생각하는 것을 피한다.

괴테는 정반대로 과거 때문에 몹시 괴로워했다. 그의 사유세계는 지속적으로 혼령이 등장하고 지속적으로 “떨쳐버리기 힘든” 악령의 모티브가 관통한다.

⌜가장행렬⌟에서 그는 ‘혼령’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일 혼령들을 당장 내쫓지 않으면,

그들은 다른 곳으로 이동하며,

그중 누군가 어느 구석에 붙어 있다.

그는 아주 조용히 있다가도,

기묘한 순간에 나타난다.

혼령에는 현실보다 더 좋은 대항 수단이 없다.

귓속에서 우리를 괴롭히는 멜로디는 오직 그것을 연주함으로써만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이 명령의 형태로 우리를 번민하게 하는 것을 현실의 형태로 마주하면,

거기로부터 구원을 받는다.

 

괴테가 그의 정신적 삶을 관통해 끊임없이 예술적 직관을 하는 것은 단지 그의 예술가 기질만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괴테의 부단한 예술적 직관은 동시에 내적인 어두운 세력에 대한 평형추였다. 즉 과거의 그늘을 없애버리는 현재의 등불이었던 것이다.

 

괴테의 표현은 전체적인 예술작품에서 필연적인 역할을 하지만, 거기에는 동시에 예술을 초월하는 체험이 분출 된다. “우리는 과거를 먹고 살며 과거 때문에 망한다.” 따라서 “그대 만일 아름다운 삶을 설계하려 한다면 과거에 신경 쓰지 말아야 한다.” 여기서 괴테의 시 ⌜삶의 규칙⌟을 인용해 보자.

 

“그대 만일 아름다운 삶을 설계하려 한다면,

과거에 신경 쓰지 말아야 한다.

될 수 있으면 역정을 내지 말아야 한다.

언제나 현재를 즐겨야 하며,

특히 사람을 증오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미래는 신에게 맡겨야 한다.“

 

대다수 삶의 규칙은 아름답지 못한 쓰라린 경험에서 유래한 것이다.

괴테가 자신의 존재를 ‘아름다운 삶’이라고 부르기를 원했다고 진지하게 믿는가?

괴테의 삶에서는 이전의 연인들과 결별한 후 오랜 시간이 지나 그들을 다시 보고자 하는 주목할 만한 충동이 나타난다.

순진한 목사의 딸인 프리데리카가 그랬고, 종교적 차이로 헤어진 부유한 은행가의 딸인 약혼녀 릴리가 그랬다. 후일 괴테는 릴리야말로 자신이 깊이 전정으로 사랑한 첫 번째 여인이자 마지막 여인이었다고 고백했다.

 

2. 니체의 이해를 위하여~!

사람들은 니체를 이기주의적 쾌락의 전도사로 간주한다. 그러나 그는 모든 단순한 쾌락을 경멸한다는 점과 모든 위대함은 고통을 통해 조건화된다는 점을 설파한다. 그는 무정부주의적인 무훈육성을 정당화하려 하며 그에게는 엄밀성과 규율이 강력하지 못하다고 사람들은 해석한다. 또한 그는 자아 외의 인류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관심하다고 비난 받는다.

 

그에게는 경솔함 때문에 이 모든 것을 자초한 책임이 있다. 그는 신중하지 못하게도 자신을 ‘비도덕주의자’라고 부르고, 이를 통해 그의 적대자들에 대한 자신의 비난을 정당화한다. 그는 확고한 의무에의 구속과 의지의 가치를 부정하고 인간에게 당위를 면제한다는 의미에서의 비도덕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다만 바로 지금 지배하는 도덕을 부정할 따름이다. 그는 현재 지배적인 도덕의 민주주의적-기독교적 이상, 즉 몰아성, 굴종, 체념, 그리고 뒤쳐진 자들, 비참한자들, 허약한 자들에 대한 자기헌신에서의 우리 인간종족의 발전에 대한 가장 커다란 위험을 간파하기 때문이다.

 

인류의 진보는 매순간 가장 높이 발전한 개인들에 의해 담지 된다. 즉 강력하고 의연하며 숭고하고 승리를 거두는 인간들이야말로 인류를 모든 단계에서 다음 단게로 이끄는 선구자이다. 만일 이들이 자신을 관철시키는 것을 포기한다면, 만일 이들의 힘과 아름다움, 그리고 고상함과 자유 대신 ‘대중’, 즉 그들 뒤에 처진 사람들에게 유익한 특징만을 발전시킨다면, 뒤를 향해서 개화될 수밖에 없다.

 

3. 칸트 대 괴테와 니체

철학자 게오르그 짐멜이 칸트의 도덕철학은 개인과 사회관계를, 그리고 니체의 도덕철학은 개인과 인류의 관계를 지향한다고 언급했다. 전자의 경우는 정언명령이, 후자의 경우는 경우에는 영겁회귀가 각각 개인과 사회, 개인과 인류를 결합시키는 개념적-이론적 기제이다.

 

개인과 사회, 그리고 인류의 관계에서 괴테는 칸트가 아니라 니체와 가깝다고 짐멜은 진단한다. 짐멜에 의하면 괴테의 관심을 끄는 것은 니체와 마찬가지로, 전적으로 ‘보편적-인간적인 것’이다. 언제나 자아와 그의 집단, 또한 집단 상호간의 대립과 모순에서 생겨나는 윤리적-사회적 과제는 그에게 일시적이고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괴테와 니체가 칸트와 구별되는 또 한 가지 결정적인 요소는 개인주의 이론이다. 칸트가 양적 개인주의를, 괴테와 니체는 질적 개인주의를 대변하는 사상가이다. 양적 개인이 공통적인 것, 일반적인 것, 그리고 보편적인 것을 특징으로 한다면, 질적 개인은 고유한 가치, 이상, 그리고 행위와 삶의 규범 및 법칙을 특징으로 한다.

 

18세기 양적 개인주의의 커다란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자유와 평등의 결합이다. 경제적 삶의 영역이 부상하고 확장됨으로써 개인의 자유는 정언명령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개인은 자유를 얻기 위해 전근대적인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구속과 의무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신념이 확산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개인의 자유는 다른 개인과 마찬가지로 보편타당한 이성적 존재인 한에서 자유이다.

 

정언명령은 개인과 그의 인격적 특징, 개성을 초월하며 개인에게 절대적인 강제력과 구속력을 행사하는 보편타당성을 지닌다. 개인의 도덕적 삶과 행위는 궁극적으로 정언명령을 통해 근거되어지고 정당화될 수 있다.

이에 반해 19세기에 발전한 질적 개인주의는 고도로 발전한 사회적 노동 분업에 대한 이론적 성찰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고도로 분업화된 사회질서의 존속과 기능은 개인의 특성과 개성, 그리고 유일성을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따라서 이에 대해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한다. 괴테의 작품가운데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와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두 교양 소설 에서 질적 개인주의가 그려져 있다.

 

괴테의 예술작품이 지닌 의미는 미학적-문학적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거기서 인간은 세계의 한 점으로 묘사될 뿐만 아니라, 자체가 하나의 세계로, ‘하나의 세계관의 이름’으로 묘사된다. 이것은 괴테가 미학적-문학적 형식으로 현대인에게 그의 구체적인 삶은 주관적-개인적 인격이라는 더 깊은 토대위에서 형성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음을 의미한다.

 

짐멜은 니체의 귀족적 개인주의에서 질적 개인주의의 전형적인 대표자와 옹호자를 발견한다. 니체는 인간의 삶의 본질을 개인의 발전 및 고양, 즉 개인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생물학적-정신적 특성과 능력을 끊임없이 질적으로 향상시키는 데서 찾는다.

 

개인적 삶의 최고 가치는 자신을 최상의 인간 유형으로 발전시키는데 있으며, 이상적인 사회질서는 바로 개인 사이와 인간 잡단사이의 거리, 불평등 및 서열관계가 존재하는 질서에 있다. 니체의 개인주의 이론이 개인적 삶과 행위의 사회적 차원과 의미를 절대적으로 부정한다는 점이다.

 

짐멜은 현대세계에서 질적 개인주의의 이상과 가치를 실현시키기가 점점 힘들어진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개인의 특성과 개성, 그리고 유사성을 발전시키고 보존하기가 점차 어려워지기 때문에 개인은 점차 다른 개인과 비교할 수 있고, 혼동할 수 있으며, 교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양적 개인과 개체성이 질적 개인과 개체성에 대해 우위를 점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을 인식하면서 짐멜은 질적 개인 및 개체성의 형성과 발전을 현대세계에 주어진 중요한 문화적 가치나 이상으로 내세운다. 질적 개인주의를 정당화하고 옹호하는 것이다.

 

짐멜은 개인주의의 두 가지 유형, 즉 양적과 질적 개인주의의 한 단계 높은 차원에서의 종합을 현대세계와 현대인에 대한 유일한 합리적인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칸트의 18세기 세계관, 괴테와 니체의 19세기 세계관의 창조적 결합이다. 

 

<게오르그 짐멜 선집2 ‘근대 세계관의 역사’ 칸트⦁괴테⦁니체 편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게오르 짐멜 지음, 김덕영님 옮김, 길출판>

* 게오르그 짐멜(1858~1918) :베를린 대학에서 역사학, 민족심리학, 철학 및 예술사를 공부했으며, 칸트철학으로 1881년에 박사학위를, 1914년 슈트라스부르크 대학의 정교수가 되었다. <사회분과론><도덕과학서설><칸트><괴테><쇼펜하우어와 니체> 등 철학, 윤리학, 사회학 등의 분야에 다양한 저서와 수많은 글을 발표했다.

'독서 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50세가 넘으면~!  (0) 2020.11.02
삶의 의미를 ‘테스’형과 현자에게 묻다!  (0) 2020.10.23
백치 아다다 - 계용묵  (0) 2020.10.10
날개 - 이상  (0) 2020.10.08
지식인의 서재  (0) 2020.0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