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내 일인지, 남 일 인지부터 따져보자!
정신분석학자 아들러가 창시한 심리학에서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을 때 그것이 자신의 과제인지, 아니면 타인의 과제인지 생각해보라고 했다. 이를 ‘과제의 분리’라고 했다.
얼핏 냉정하게 들리겠지만 자신의 고민은 결국 자기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우리는 가족의 문제든 친구의 문제든 자신이 아닌 타인의 문제까지 자기가 떠안을 때가 있다. 아들러는 이때 “그것은 그 사람의 과제이지, 나 자신의 과제는 아니라고 생각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젊었을 때부터 자신을 타인과 비교하지 않는 것을 신조로 삼는다면 바람직하겠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에는 늘 경쟁하는 습관이 몸에 벤 사람이 더 많다. 남의 행불행은 자기 문제가 아니라고 선을 그으면 질투심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이런 사고방식은 50세가 넘어서부터 더 받아들이기 쉽다. 왜냐하면 이때부터는 ‘죽음’이 현실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공자는 ‘쉰에 하늘의 뜻을 알았다’라고 말했다. 성공해서 부자가 되든 실패해서 빚더미에 앉아 있든 죽으면 그것으로 게임 오버다. 수백억을 가지고 있어도 저세상까지 짊어지고 갈 수는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 너무 아등바등하며 살 필요도 없다.
‘지루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해!
50세 이후의 삶에서 ‘지루함과 어울리는 방법’은 하나의 중요한 주제다. 이것은 지루함을 참는다거나 지루하지 않도록 자극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지루함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다. 지루함에 익숙해지는 것 또는 지루함을 더는 지루하다고 느끼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현대는 누구나 지루함을 두려워하고 자극을 원하는 시대다. 한편 사회도 그 요구에 부응해서 사람들이 싫증 내지 않도록 점점 더 자극을 제공하며 고도로 자극적으로 변해간다. 이 고도로 자극적인 사회에 저항해서 살아남으려면 옆에서 보기에는 지루해 보일지 몰라도 당사자는 지루함을 느끼지 않고 기쁨을 발견해가는 힘, 즉 ‘지루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고 본다.
나는 ‘지루할 수 있는 능력‘이 정년퇴직 후 제2의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키워드가 된다고 믿는다. 일이 없어지고 눈앞에 자유 시간이 펼쳐졌을 때, 인생을 즐기는데 중요한 기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50세가 넘어서 찾아오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영국의 논리학자이자 철학과 교육학에 공적을 세운 러셀은 <러셀의 행복론>의 ‘지루함과 흥분’이라는 장에서 ‘일반적으로 위대한 사람들의 특징은 조용한 생활’이라고 했다. “위대한 책은 한결같이 지루한 부분이 있고, 위대한 생애에는 하나같이 지루한 기간이 있다. 위인들의 인생도 두세 번의 위대한 순간을 제외하면, 늘 흥분으로 가득한 인생은 아니었다.”또한 러셀은 지루함이 너무 두려운 나머지 강한 자극만 추구하는 것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고, 그보다는 차라리 실속 있는 지루함이 낫다고 믿었다.
쉽게 변하지 않는 것들과 함께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한다." 공자는 말했다. 공자는 ‘지혜, 어짊, 용기’의 세 가지 덕목을 인간이 가져야 할 자질이라고 보고, 이것을 골고루 겸비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다. 그중에서도 ‘어짊’을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덕이라고 여겼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에 해당하는 말이다.
나는 산보다는 물을 선호해서 흘러가는 강물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제 나이가 드니 늘 같은 자리를 지키는 산을 좋아하는 심정에 공감하게 된다. 산이 좋다고 산을 집 안으로 옮겨올 수는 없다. 하지만 화초나 나무를 화분에 심어서 보기 좋게 가꾼 분재는 기를 수 있다. 분재를 쓰다듬는 행위는 나무가 품고 있는 생명력을 자기가 받고 싶다는 희망의 표현이 아닐까 한다.
사람들과 더 어울려서 뭐 좋은 일이 있겠나?
50년이 넘게 살다보면 “인간들이란 하나같이 성가신 존재야.“ ”좌우지간 제대로 된 사람이 없다니까“하고 느끼는 일도 종종 있다. ”더 사람들과 어울려서 뭐 좋은 일있겠나?“라는 의문을 품는 것도 당연하다. 몰리에르의 희곡<인간 혐오자>제목을 빌려 말하자면 누구나 약간의 ‘인간 혐오’는 있다. 50세를 넘으면 그런 인간혐오를 받아들이고, 인간을 멀리해도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해도 괜찮지 않을까?
‘인간 혐오’도 성숙의 한 형태인지도 모른다. 젊었을 때는 먹고 살려고 무리해서라도 사회에 적응하고, 사람들과 어울려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50세가 넘으면 이미 어느 정도 사회에 적응해온 결과로 지금의 모습이 있다. 그 경험이 있으니까 이제 사람들과 굳이 어울리지 않고 지나쳐 버려도 된다.
만일 내 안에 ‘인간 혐오’의 기질이 있다면, 중년이 되었을 때 그것을 언짢아하지 않는 마음으로 바꾸어 나가는 것은 절대 나쁜 것이 아니다.
<‘50부터는 인생관을 바꿔야 산다’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사이토 다카시 지음, 황혜숙님 옮김, 센시오출판>* 사이토 다카시 : 메이지대학교 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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