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자료

죽음에 이르는 병!

[중산] 2020. 11. 11. 07:24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절망은 정신의 병, 자기의 병이며, 그렇기 때문에 세 가지 형태, 즉 절망하여 자기를 소유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 형태,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기를 원하지 않는 형태,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기를 원하는 형태를 취할 수 있다.

 

자기 자신에게 절망하는 것, 절망에 빠져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이것은 모든 절망에 대한 공식이다. 그는 자기를 정립한 권능으로부터 자신의 자기를 떼어내고 싶어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그렇게 할 수 없다. 그의 모든 절망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권능은 더욱 강력하며 그런즉 그가 그렇게 존재하기를 원하지 않는 자기로 존재하도록 강요한다.

 

그가 그렇게 존재하고 싶어 하지 않는 자기로 존재하도록 강요되는 것, 그것이 고뇌이며. 자신이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괴로움이다. 소크라테스는 육신의 병이 육신을 태워 없애는 것과는 달리 영혼의 병(죄)은 영혼 자신을 태워 없애지 않는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영혼의 불멸을 증명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있는 영원한 것은 절망이 그의 자기를 태워버릴 수 없다는 사실, 바로 이것이 절망 안에 있는 고통스러운 모순이라는 사실에 의해 증명될 수 있다.

 

절망의 본질, 즉 이러한 자기 병, 즉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여타의 다른 질병의 경우와는 전적으로 상이한 의미에서, 그런데도 그는 죽을 수가 없다. 죽음은 최후가 아니며, 다만 죽음은 끊임없이 계속되는 최후일 뿐이다. 죽음에 의해 이 병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데, 왜냐하면 이 병과 그 고통-그리고 죽음-은 바로 이처럼 죽을 수 없는 무력함이기 때문이다.

 

절망에 빠져있는 사람이 아무리 그것을 회피하려해도, 영원성은 그의 조건이 절망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고야 말 것이며, 그를 그 자신에게 철저히 고정시킴으로써 그의 고통이 여전히 그가 자신의 자기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되게 할 것인즉, 그가 그는 자신이 그렇게 하는 데 성공했다고 그저 상상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명백해질 것이다.

영원성은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바, 왜냐하면 자기를 갖는 것, 자기로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최고의 특권, 무한한 특권이지만, 그러나 이것은 또한 인간에 대한 영원성의 요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병(절망)의보편성

의사들이 흔히 살아 있는 사람 가운데 완벽하게 건강한 이는 단 한명도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인간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살아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조금이라도 절망하고 있으며, 미지의 그 무엇이나 근심, 내면의 갈등, 부조화, 불안 등을 마음속에 내밀하게 품고 있을 것이다.

 

의사가 몸 안에 병을 지니고 돌아다닌다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 자신이 설명할 수 없는 불안 안에서 그리고 그러한 불안을 통해서 아주 드물게 그 모습을 나타내는 정신의 병을 안고 다닌다고 말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자신이 건강하다고 스스로 이야기하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이 아프다고 스스로 말하지 않을 때도 건강한 것으로 간주된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정신으로 운명 지워졌다는 것을 결코 의식하지 못한 채 세상을 살아가며, 오히려 자신이 절망에 빠져 있다고 말하는 이들은 보통 매우 심원한 천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정신으로서 의식이 일깨워질 수밖에 없는 사람이거나 쓰라린 경험과 놀라운 결단을 통해서 정신으로서 의식이 일깨워지게 된 사람들이다.

 

정말로 절망에 빠져있지 않은 사람은 사실 매우 드물다. 인생의 기쁨이나 슬픔에만 정신이 팔린 탓에 자신이 정신이라는 것을, 자기라는 것을 명확하게 영원히 깨닫는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 그런 사람의 인생만이 낭비되었을 뿐이다. 무한한 은총은 절망을 통하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다.

 

통속적인 견해는 절망에 빠져 있지 않은 것, 그리고 절망에 빠져 의식하지 못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절망의 한 형태라는 것을 완전히 간과한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자신이 건강하다고 스스로 이야기하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이 아프다고 스스로 말하지 않을 때도 건강한 것으로 간주된다. 의사는 바로 그가(전문적인 지식을 지닌)의사이기 때문에, 사람이 자신의 상태에 대해 이야기하는 바를 액면 그대로 신뢰하지 않는다.

 

절망이 통상 병이라고 일컬어지는 것과는 (변증법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간과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정신의 질병이기 때문이다. 병의 경우와 절망의 경우는 다른데, 병의 경우에는 기분이 언짢은 느낌이 바로 병이다. (절망의 경우에는) 결코 그렇지 않다. 여기에서 기분이 언짢음은 변증법적이다. 이처럼 기분이 언짢은 느낌을 전에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다는 것이 바로 다름 아닌 절망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인간적으로 말하건 데, 몹시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것, 순전한 평화와 조화와 환희라고나 할 여성의 젊음조차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망이다. 행운의 가장 내밀한 은신처의 깊고도 깊은 곳에는 불안도 자리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절망이다. 절망은 계속 거기에 남아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데, 절망에게는 머물기에 가장 포근하고 적당한 장소가 행운의 품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법 일관성 있게 무(無)에 관해서 가장 불안해한다.

 

그러나 반성은 무로 올가미를 만들 때 가장 완벽하게 유혹하며, 또 무일 때 가장 본래의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것에는 특별한 반성이 필요한데, 무에 대한 반성- 즉 무한한 반성을 견뎌낼 수 있으려면 위대한 믿음이 필요하다. 결국 지극히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여성의 젊음조차도 절망이며, 행운에 불과하다. 이런 직접성에 의존해서 인생을 헤쳐 나가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정확히 절망이라는 질병이 전적으로 변증법적이기 때문에 그런 질병에 걸린 적이 없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심각한 불행이다. 그 병에 걸리는 것은 참으로 횡재가 아닐 수 없다. 아무리 그것이 극도로 위험한 병이라 하더라도, 사람들이 그 병이 낫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일반적으로는 병에서 회복되는 것이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병 그 자체는 불행인 것이다.

 

자신은 절망하고 있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보다 치유될 가능성에 변증법적으로 더 접근해 있다. 자신이 절망에 빠져 있다고 말하는 이들은 보통 매우 심원한 천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정신으로서 의식이 일깨워지게 된 사람들이다.

 

의지가 전혀 없는 사람은 결코 자기가 아니다. 그러나 의지를 더 강하게 가질수록 사람은 자기의식을 더 갖게 된다. 자기는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무한성과 유한성의 의식적 종합이며, 자기의 과제는 자기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오직 신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수행될 수 있다.

 

자기가 자기 자신이 되지 않는다면, 그러한 것을 알든 모르든 자기는 절망에 빠져 있다. 그러나 자기가 현존하는 모든 순간에 자기는 생성의 과정에 있다. 왜냐하면 기능적 자기는 현실적으로 현존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생성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자기 자신이 되지 않는 한, 자기는 자기 자신이 아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것은 정확히 절망이다.

 

현실성에서의 강렬함은 가능성의 어떤 것을 현실화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현실성이 가능성과 필연성의 종합이다. 자기가 이처럼 가능성에서 길을 잃어버리게 될 때, 본질적으로 없는 것은 복종의 힘이다. 자신의 삶의 필연성에 복종하는 힘이며, 자신의 한계라고 불리는 것에 복종하는 힘이다.

 

비극은 그가 자신을 자각하게 되지 않았다는 것이며 따라서 필연적인 것임을 자각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신 그는 자신을 상실했다. 왜냐하면 이런 자기는 환상적으로 가능성의 차원에서 자신을 반성했기 때문이다. 가능성의 거울은 보통 거울이 전혀 아니다. 그 거울은 아주 조심스럽게 사용되어야 한다. 가장 심오한 의미에서 그 거울은 진실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가 자신의 가능성의 차원에서 이러저러하게 보인다는 것은 절반의 진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과 신을 자각하기 위해서는 상상이 그를 개연성의 독기(毒氣)보다 더 높이 끌어올려야 하며, 그를 이런 독기에서 떼어 놓아야 하고, 어떤 경험이든 경험의 충분한 표준을 넘어서는 것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희망하면서 두려워하고, 두려워하면서 희망하는 것을 그에게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속물적 부르주아 정신성은 상상력도 없고, 그것을 가지려고 하지도 않으며, 그것을 싫어하기까지 한다.

 

절망의 증가하는 강렬함은 의식의 정도에 달려 있거나 또는 그것의 증가에 비례한다. 사람이 일종의 순진함에서 자신은 그것이 절망이라는 것조차 알지 못한다고 말하고 싶을지도 모르는 상태이다.

 

사람들의 감성은 보통 지성보다 훨씬 우세하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행복한 것처럼 보이고, 자신도 행복하다고 상상한다면, 비록 진리의 빛에 비추어 고찰할 때 불행하더라도, 그런 사람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오류에서 떨어져 나오기를 결코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화를 내게 되며, 그렇게 하는 자는 모두 자신의 적으로 간주하고,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그런 일이 행복을 죽인다는 의미에서, 그것을 살인과 맞닿아 있는 공격으로 간주한다.

 

왜냐하면 그는 감성적인 것과 감성적-심령적인 것에 철저히 지배되고 있기 때문이며, 그는 감성적 범주, 즉 쾌, 불쾌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며, 정신, 진리 등등과 작별을 고했기 때문이며, 너무 감성적이어서 모험을 하거나 정신으로 존재하는 것을 감내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절망이 당혹이라면, 절망에 대한 무지는 단순히 절망에 오류를 보태는 것이다. 무지와 절망의 관계는 무지와 불안의 관계와 같다. 개인은 자신이 절망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할 때, 자신을 정신으로 의식하는 데서 가장 멀어지게 된다. 즉 자신을 정신으로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 절망이거니와, 절망은 무정신성이다.

 

우리는 환상은 본질적으로 두 가지 형태, 즉 희망의 환상과 추억의 환상이 있다는 것을 간과한다. 청년은 희망의 환상을 가지고 있다. 성인은 추억의 환상을 가지고 있다. 청년은 희망의 환상만이 있다는 철저하게 편향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청년은 희망의 환상으로 고통 받는 것이 아니라, 아마 환상이 없는 더 높은 관점에서 청년의 환상을 내려 본다는 기묘한 환상으로 무엇보다도 고통 받는다. 소크라테스가 왜 청년을 사랑했겠는가? 왜냐하면 그는 인간을 알았기 때문이다.

 

절망은 젊다는 것의 일부이며 젊을 때에만 나타나는 것이고 분별의 연령에 이른 성숙한 사람에게는 발견되지 않는 것이라는 일반적 견해를 설명한다. 이것은 절망적인 오류이다. “사람이 성장하여 환상에 벗어나듯이” 당연하게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 시절에 얼마나 행복했고 얼마나 아름다웠던가에 관해서 소녀처럼 환상적으로 착각에 사로 잡혀 있는 경우가 가끔 눈에 뛴다. 우리는 이러이러했다는 것은 노인들에게 흔히 듣는 말인바, 청년과 마찬가지로 커다란 환상이다.

 

신앙과 지혜가 그렇게 쉽게 오고 이빨, 수염 등처럼 세월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을 뿐 아니라 판단의 결여를 보여 줄 뿐이다. 인간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어떤 것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지상적인 그 무엇에 대한 절망은 절망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이다. 그들은 두려워하는 것을 배운 적도 없거니와 무슨 일이 일어나든 일어나는 일에 좌우되지 않고 “...해야 한다.”는 것을 배운 적도 없다. 그러기에 그들은 그들에게 이미 모순으로 나타나는 것, 주변 세계에 반영될 때 더욱 빛나는 것을 참지 못한다. 그 결과 자기의 영혼에 대해 염려한다는 것과 정신이고자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는 변호의 여지없이 시간 낭비로, 인류에 대한 반역으로, 미쳐서 시간을 허송하는 반항적인 광기로, 어떤 경우에든 경멸과 조소로 처벌받아야 하는 시간 낭비로 보이는 것이다.

 

그들이 내면으로 향하기 시작하는, 이것이 그들의 최선의 시간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자신들의 첫 번째 어려움과 마주칠 때, 그들은 방향을 틀어 버린다. 그들에게는 이 같이 황량한 사막으로 이어진 것처럼 보인다. 주위에는 아름답고 푸른 풀밭이 널려 있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떠나버리고 곧 시간, 그들의 인생의 최선의 시간을 잊어버린다. 그것은 한 조각의 유치함인 것처럼 잊어버린다.

 

성인의 절망과 청년의 절망 사이에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순전히 우연적인 것이지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청년은 미래에 대하여 미래의 현재처럼 절망한다. 미래에는 그가 떠맡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있으며, 따라서 그는 자신이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다. 성인은 과거에 대해 더 멀리 과거로 물러나는 것을 거부하는 과거의 현재처럼 절망한다.

 

사람이 자신에 대해 절망하려 한다면, 자신에게는 자기가 있다는 것을 자각해야만 한다. 자살은 절망이라는 것을 알고 그만큼 절망의 본성에 대한 참된 개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살하는 사람은 자살이 절망이라는 분명한 관념 없이 자살하는 사람보다 더 강렬하게 절망에 빠져 있다. 반대로 절망에 대한 그의 관념이 참되지 않을수록 그의 절망은 덜 강렬하다.

 

절망은 자기의식과 비례하여 강화되지만, 자기는 자기에 대한 기준에 비례하여 강화되며, 하느님이 그 기준일 때 무한히 강화된다. 사실 하느님에 대한 생각이 더해질수록 자기도 더해지며, 자기가 더해질수록 하느님에 대한 생각도 더해진다.

 

죄는 절망이다.

자신의 죄에 대해 절망한다는 것은 죄가 내적으로 일관성을 갖게 되었거나 혹은 일관성을 갖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죄에 대한 절망은 더 깊이 침몰함으로써 살아남으려는 노력이다. 기구를 타는 사람이 무거운 짐을 내던짐으로써 더 높이 상승하는 것처럼, 절망에 빠진 사람은 점점 더 단호하게 모든 선을 내던짐으로써 가라앉는다. (왜냐하면 선이라는 짐은 사람을 높이 올라가게 하기 때문이다). 죄 그 자체는 투쟁이다.

 

죄에 대한 절망은 자기 자신의 공허함을 특히 의식하고 있거니와, 자신은 생명의 양식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심지어 그 자신의 자기에 대한 관념조차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

 

맥베스의 다음의 말은 심리적으로 교묘하다. “(그가 왕을 살해한 후에, 그리고 이제 자신의 죄에 대해 절망하면서) 이 순간부터는 인생에는 그 어떤 심각한 것도 없다. 모든 것은 장난감에 불과하며, 명예와 은총은 사라져버렸다.”

그의 이기적인 자기는 야욕으로 절정에 달한다. 그는 이제 사실상 왕이 되었지만, 자신의 죄에 대해 그리고 회개의 실재성과 관련해, 은총과 관련해 절망함으로써 그는 또 자기를 상실했다.

 

<‘죽음에 이르는 병’ P280 중에서 극히 일부 요약발췌, 쇠뢴 키르케고르, 임규정박사 옮김, 한길사 출판>

* 쇠뢴 키르케고르(1813~55) :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 남. 그는 종교적으로 매우 신실하면서도 극도의 우울증에 사로잡혀 있던 아버지의 성격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17세에 아버지 권유로 코펜하겐 신학과에 입학하고, 2년 만에 신학사 지격시험 통과. 헤겔주의적 저술 및 라이프니츠, 데카르트, 아리스토텔레스 등 철학에 큰 관심을 기울인다. 훗날 실존철학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됨. <이것이냐 저것이냐>,반복>,<두려움과 떨림>,<불안의 개념>,<철학적 단편>,<죽음에 이르는 병>,<사랑의 역사>,<그리스도교적 강화집> 등 발표. 1855년 44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영월 청령포에서~!
제천 의림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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