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이 산다는 것
간소한 삶을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건 우리 가족의 전통이기도 하다. 내가 어렸을 때, 부모님은 세계 대공황을 겪었던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셨다. 가족들 모두 지독한 가난을 견뎌내고 희생을 감내했던 이야기들이다.
아버지는 운 좋게 직장에 나갈 수 있었지만 5센트의 교통비를 아끼기 위해 집에서 사무실까지 스물여섯 블록을 걸어서 출근하셨다. 고등학교 다니던 언니는 수선한 옷을 입고 다녔다. 할머니는 매일 아궁이에 넣는 석탄의 수를 세셨다고 한다. 그때는 집에서 멀리 벗어나 돌아다니는 일이 없었고 다들 집 근처에서 지냈다. 이미 갖고 있는 것만으로 살아가며, 그것이 무엇이든 감사히 여기던 시절이었다.
내가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또 다른 경제 위기를 겪을 때는 더욱 많은 희생이 필요했다. 아버지는 몇 년 동안이나 새 옷을 사지 못하셨다. 어머니는 여전히 커피에 설탕을 넣지 않으셨고 그때쯤 우리는 이미 채식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언니는 나일론 양말은 신을 생각도 못했고, 초등학생이던 나도 물려받은 옷을 입고 다녔다. 우리 집 자동차에는 바퀴가 없었다. 이때도 우리는 역시 집 근처에 머물며 ‘견뎌냈다’. 대공황 때 얻은 교훈이 전쟁 때도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교훈은 오늘날에도 내게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어머니는 아래와 같은 인생 철학이 적힌 작은 장식판을 만들어 부엌 벽에 걸어두셨다. 이 판은 노끈과 은박지를 보관하던 서랍 바로 위에 걸려 있었다.
다 써라.
남기지 마라.
견뎌내라.
그게 아니면 없는 대로 지내라.
이것이 내가 사는 방식이다. 현재 나는 조그마한 마당이 있는 이동식 집에서 살고 있다. 회전식 잔디 깎는 기계를 사용하고 근처 공동 정원에서 채소를 기른다. 어딜 갈 때는 걸어 다니거나 대중교통, 또는 카풀을 애용한다. 그리고 뭐든지 재사용하고 재활용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돈 걱정 없는 삶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런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미국에도 가난과 절망이 존재한다. 가난은 세계 곳곳에 퍼져 있다.
여기 오레곤의 우리 집 가훈은 “내가 간소한 삶을 살면 다른 사람들도 간소한 삶을 살 수 있다.“이다. 우리 어머니의 지혜로운 말씀은 아직도 내가 결정을 내릴 때마다 방향을 제시해준다.
나는 지구를 보호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부족한 자원을 절약하고, 내가 운 좋게 가지고 있는 것들을 기쁘게 누리기 위한 나의 작은 노력이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내가 하는 작은 노력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이다.
살아남겠다는 결정
3년 전 내게는 주요우울장애라는 위기가 찾아왔고, 모든 것은 캄캄한 암흑에 휩싸였다. 마치 비 오는 겨울날 다리 위에서 떨어지는 것 -뛰어내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3초 만에 물속으로 곤두박질친 후 얼음장 같은 물 속 깊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두꺼운 코트는 더욱 더 깊은 물속으로 나를 끌어당겼고, 수면은 머리 위로 너무나도 멀리 있었다.
실제로 시도하지 않았던 이유는 단지 의문스러웠기 때문이다.
마음이 바뀌면 어떡하지? 물에 뛰어들고 나서 숨이 가빠 다시 위로 헤엄쳐 오르기 전에 질식하면 어떡하지? 그 마지막 순간에, 내가 결국 살고 싶어 했다는 걸 깨닫는다 하더라도 그땐 이미 늦었을 것이었다.
내가 어쩌다 등반을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어느 날 일시적인 기분으로 동네의 암벽등반 체육관에 들어섰을 뿐이다. 그곳은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하얀 먼지가 가득한 곳에 나트륨 증기 불빛이 빛나고 있었고, 그 밑에서 벽을 타는 남자와 여자들의 모습은 강인하고 아름다웠다. 암흑 대신 빛이 있었다. 하강 대신 상승이 있었다. 그곳은 내 안에 있던 것들과는 정반대의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두 번째로 등반할 때, 나는 추락을 예상하고 움직여야 했다. 지상에서 8m가량 위에 있었던 나를 밧줄이 지탱하고 있었지만, 나는 아직 그걸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확신하지 못했다. 나는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두려움인지 기쁨인지 지금 선택해야 해.” 이때의 선택은 더 오를 것인지 말 것인지, 삶인지 죽음인지를 의미했다.
그로부터 2년 동안 내가 등반을 한 날은 수백 일에 이른다. 실내와 야외를 가리지 않으며, 밧줄을 의지할 때도 있지만 대개는 밧줄 없이 등반을 한다. 대가가 없는 것은 아니다. 벽에 부딪쳐 자주 멍이 드는 바람에 가정환경이 어떤지 묻는 사람들도 있다. 아홉 달 전에 다리와 발목이 부러졌다. 회복은 빨랐지만 여전히 위험하다. 다음엔 운이 따르지 않을 수 있다.
등반은 삶에 대한 냉혹한 결단을 요구한다. 부주의하거나 조심하지 않으면 떨어진다. 체육관에서 등반을 할 때, 야외 루트에서 밧줄을 타고 오를 때, 볼더링(밧줄 없이 하는 암벽 등반)을 할 때마다 나는 위험을 감수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살아남겠다는 약속을 한다.
이제 뛰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올라가는 것을 믿는다. 뛰어내리는 것은 쉬울지도 모른다. 다리 난간에 서서 한 발만 내딛으면 된다. 오르는 것은 힘들지만 가치가 있다. 나는 살아가기로 한 결정이 올바른 결정이었다는 것을 믿는다.
우울증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말로는 표현하지 못할 절망의 끔찍한 깊이를 이해 할 수 없다. 지금의 나는 어둠에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대신 나는 어둠을 정복하는 것과, 그 방법을 통해 느끼는 기쁨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자신이 등반가라는 것을 믿는다. 나는 등반가이며, 나는 살아 있다.
더 넓은 세상을 보아야 한다.
성 어거스틴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세상이 한 권의 책이라면 여행하지 않는 자들은 그 책의 단 한 페이지밖에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도서관 전체를 섭렵하고 싶다.
나는 떠나는 것을 믿는다. 내 집에서 나와 차나 비행기를 타고 완전히 낯선 곳으로 가는 것의 가치. 나는 세상을 보고 싶다. 그 장관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내 몸으로 직접 겪고 싶다. 텔레비전이나 구글 어스로는 부족하다. 아는 여행으로 새로운 문화와 새로운 관점, 열린 마음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여행은 인생에 대한 넓은 시야를 갖게 해준다. 이것은 사방이 꽉 막힌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어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인도 남부의 작은 도시에서 자랐다. 여름방학 한 달 동안 할아버지를 만나러 갔을 때 난 일곱 살에 불과했다. 그때까지는 천연 해안과 코코넛 숲, 안개 낀 산으로 둘러싸인 부산스러운 도시와 그 안의 자그마한 우리 집이 내 세상의 전부였다.
집 밖에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생판 모르는 산골의 시골 마을에서 여름방학을 보내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우리 가족은 시외버스에 올라탔고, 잔뜩 삐진 나는 창가에 앉아 입술만 내밀고 있었다.
곧 습지대가 사라지고 바싹 마른 건조한 땅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나와 같이 짙은 피부색을 지니고 있었지만 옷차림은 전혀 달랐다. 할아버지가 사는 마을에 도착했을 때, 그곳의 풍경과 사람들은 내가 보던 것과는 너무나 달랐기 때문에 매우 당황스러웠다. 길은 하나뿐이었고, 타일로 지붕을 낸 집집마다 외양간에 암소며 황소를 키우고 있는 것이다!
가까이 가서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너무 무서웠다. 그곳의 아이들은 외계인 보듯 날 구경했고, 나는 후다닥 엄마의 옷자락 뒤에 숨었다. 그때는 누구와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그 마을과 그 곳의 사람들을 알아가며 2주를 보냈다. 그곳의 아이들은 어떤 놀이를 하는지 배웠고, 그 아이들의 장난감을 함께 가지고 놀았다. 아이들은 내게 소젖 짜는 방법, 냇가에서 물고기 잡는 방법, 우리 할아버지의 과수원에서 망고 서리를 하는 방법들을 가르쳐 주었다. 마침내 집에 갈 때가 되었을 때, 그곳을 떠나는 것은 슬펐지만 나는 새로운 모험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요즈음 나는 세상 구석구석과 사람들을 모르는 채 지나치기엔 그것들이 너무도 다양하고 놀랍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 같다. 나는 세상을 봐야만 했다. 세월이 흐른 뒤 나는 인도를 떠나 지금의 내가 ‘집’이라고 부르는 이 나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지구에는 어린 시절 의 보금자리 말고도 눈으로 봐야 할 것들과 마음에 품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고, 여행에 대한 욕구가 나를 떠밀었다.
가족들과 친구들, 내가 사랑하는 곳들에 대한 그리움도 컸지만, 새로운 세계에서 발견하게 될 것들에 대한 기대로 마음이 설레었다. 미국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내가 공부한 펜실베이니아의 가파른 앨러게이니 산맥과,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시카고의 마천루, 뉴잉글랜드의 가을 색채, 그랜드캐니언의 까마득한 줄무늬 절벽은 모두 안전한 집을 떠나야만 내 주위의 아름다운 세상을 발견할 수 있다는 신념을 확고하게 해주었다.
마크 트웨인이 이런 말을 했다. “편견과 편협한 마음에는 여행만큼 좋은 게 없다. 지구의 한 귀퉁이에서 평생 채소밭만 가꾼다면 사람과 사물을 넓고 완전하고 관대하게 바라보는 시각을 얻을 수 없다.” 나는 이 말에 완전히 동의한다.
<‘내가 믿는 이것’,인생의 결정적 순간을 담은 60편의 짧은 이야기 중 3편을 발췌, 댄 게디먼 외 엮음, 홍승원님 옮김, 동네스케치출판>* 댄 게디먼: 미국 공영라디오방송(NPR)의 리포터이자 PD. 30년간 리디오 방송 분야에서 일하면서 많은 수상과 <코윈의 13>과 <8월14일 이후 50년>을 제작하여 듀폰-컬럼비아 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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