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무슨 권리로 남들의 삶의 체험을 꿈/악몽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그들의 현실이 너무나도 가혹해서 악몽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그들의 현실이 너무나도 가혹해서 악몽이란 이름도 너무 약한 것이 아닌가. 그 꿈은 그들에게 우연히 닥쳐온다. 나중에야 남에게 그 해몽을 부탁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책의 주제인 꿈, 우리들이 저마다 꾸고 있는 꿈속에서의 그러한 의지를 다루고 있다.
이민노동자의 경험의 윤곽을 그리고, 그것을 그 노동자를 둘러싸고 있는 물리적인, 그리고 역사적인 상황과 관련시켜 보는 것은 지금 이 순간 세계의 정치적 현실을 보다 확실하게 파악하는 일이다. 다루어진 문제는 유럽에 관한 것이지만 그 의미는 지구 전체에 해당된다. 주제는 부자유이다.
이 부자유는 객관적인 경제제도와 그 안에 갇혀 있는 이들의 주관적인 경험을 연관시킬 때에만 완전하게 인식될 수 있다. 진실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부자유는 바로 그 양자의 관계인 것이다.
북서부 유럽에는, 영국을 제외하고도 거의 천백만 명의 이민노동자들이 있다. 정확한 숫자는 추측하기 힘들다. 아마 2백만 명쯤은 제대로 된 증명서조차 없이 불법적으로 살면서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입부>
그를 이민을 떠나도록 강요한 것은 빈곤 하나만은 아니다. 자신의 개인적인 노력을 통해서, 그의 애초에 자기가 태어났던 환경 속에는 결여되어 있는 역동성을 회복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어느 날 그는 떠나겠다고 말한다. 그 말을 할 때까지도, 결정은 실제로 내려진 것이 아니었다. 그가 그 말을 하고 났을 때에야, 그것은 알려진다. 마을 전체가 알게 된다. 그리고 나면 그 마을이 그 사람과 그 사람이 자기 말을 취소하는 일 사이에 서 있게 된다. 몇 사람은 그를 말리려 한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이미 결심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말을 할 때까지도, 그는 결심을 한 게 아니었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한다. 그는 이 마을을 평생 동안 알고 있었다. 떠나는 순간에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는 강도는 거의 의지력만큼이나 강력하다. 마을을 떠남으로써, 그는 스스로 그런 느낌을 자초한 것이다. 그에 따라 일어나는 감정의 혼란은 많은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가 돌아올 때 그의 삼촌은 살아 계실까? 작별을 고하는 것은 하늘의 뜻에 따르는 일이다. 그가 승리해서 돌아올지 패배해서 돌아올지 누가 알 것인가? 도시가 베풀어 주는 것은 거기서 성공하는 사람들것이지, 실패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건 아니다.
그는 도시가 주는 상품들이 검은 물결 위에 떠 있는 모습을 그려 본다. 지는 사람은 그 물속에 빠져 죽을 것이다. 그에게 잘 가라고 말하는 마을 사람들의 표정은 아무 대답도 제공해 주지 않는다.
그의 어머니는 그의 결심에 찬성을 한다. 그것은 가문의 문제이고 가문 전체 이득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들이 가는 외국은 싫어한다. 그리고 그가 집 밖으로 걸어 나가게 될 때쯤엔, 어머니는 그가 어떻게 태어났던가를 기억해 낸다.
집안의 수레를 타고 가장 가까운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길에는 별로 이야기 할 만한 것도 남아 있지 않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걷고 타고 가축을 먹이고 있는 옆을 지나간다. 길 자체가 이야기를 전해주는 대상이며, 길 양 쪽의 풀잎들이 이야기를 들어 준다.
스페인 국경도 프랑스 국경도 몰래 건너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한 일을 주선하는 것은 리스본의 밀수꾼들이었다. 그들의 사례금은 한 사람당 350달러(이 당시 포르투갈 농민들에게는 1년간 총수입과 맞먹는 액수)였다. 이 금액을 지불하고 나서 많은 이민 지망자들이 사기를 당했다. 그들은 스페인 국경만을 겨우 지나친 산맥으로 인도되어 그곳에 버렸고, 완전히 방향감각을 잃은 그들은, 일부는 굶주림과 노숙으로 죽어 버렸고, 일부는 350달러만큼 더 가난해져서 간신히 길을 찾아서 돌아왔다.
비록 독점자본은 지구상의 대다수 사람들로부터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과대이윤을 짜내서 일에 성공하기는 했지만, 전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을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공업 생산자로 변형시키지는 못했다. ...비록 독점자본이 모든 계급과 모든 국가들을 여러 가지의 공통적인 착취 형태로 굴복시키고 있지만, 그러한 사회들 사이의 차이는 여전히 최대한도로 유지시키며 강화해 간다. 독일에서는 육체노동자 일곱 명 중 한 명은 이민노동자다. 프랑스. 스위스. 벨지움에서는 산업노동력의 약 25퍼센트가 외국인들이다.
현대의 공업은 세계시장을 탄생시켰다. ...이 시장은 무한정의 발달을 상업, 항해술과 육상 통신에 가져다주었다. 확장되어가는 데 비례해서 똑같은 비율로 부르주아들은 그들의 수도를 개발하고 늘려 나갔고, 중세기 이래로 모든 계급이 계승해 내려온 배경에까지 깊숙이 밀고 들어갔다.
그들은 시골을 도시들의 통치 아래 종속시킨 것이다. 부르주아 계급은 엄청난 대도시들을 만들어냈으며, 농촌 지역에 비해서 도시 인구들을 엄청나게 증가시켰고, 그렇게 해서 그곳의 인구들의 상당 부분을 천치 같은 농촌생활로부터 구출해냈다. (<공산당선언>)
농촌생활의 천치 같음에 대해서 마르크스는 과장했다. 1848년의 저술에서, 그는 도시의 합리주의의 역량을 과대평가했으며, 시골마을을 도시의 기준을 가지고 판단했다.
버스는 이제 그의 나라의 서울의 시외에 와 있다. 그는 쓰고 남은 블록과 판자조각과 내버린 함석 조각으로 멋대로 지은 게딱지같은 판잣집들의 덩어리들을 바라본다. 바로 이 속에, 서울까지 도착하기는 했으나 그 이상은 가지 못한 시골 사람들이 살고 있다.
도시는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크고 사람들도 더 많다. 그는 이곳을 통과하기 위해서 의지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그 전에 시장에서 팔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없었던 종류의 생선, 사치스러운 식기류, 이상한 모양의 케이크나 사탕과자들, 그가 마주치는 것들은 점점 더 생소한 것들이 늘어날 것이다.
그는 자기와 똑 같은 많은 사람들을 본다. 멀리 여기까지 와서 멈춘 사람들을.
어떤 사람이 이민을 가기로 결심한 것은 세계 경제체제의 맥락 속에서 바라본 필요가 있다. 그 경제체제란 신 식민주의다. 경제학 이론은 이 경제체제가 어떻게 해서 저개발을 만들어 내고, 이민을 초래하는 상황을 제시해 줄 수가 있다. 왜 그런 체제가 이민노동자들이 팔아먹어야만 하는 특별한 노동력을 필요로 하고 있는지도 제시해 줄 수가 있다. 그러나 경제이론의 용어란 반드시 추상적인 것이기 마련이다.
그 이민이 가지고 떠나는 것은 자기 자신의 결심과 자기 집에서 준비해 온 앞으로 2~3일 동안 먹을 음식, 자신의 자존심, 호주머니 속의 사진들, 그의 짐 꾸러미, 그의 옷가방이다.
한 이태리인의 말 : 낮 동안에는 나의 일도 있고 동료들도 있다. 나는 내가 버는 돈을 생각하면서 일하고 또 일한다. 나는 스스로에게 이건 내 가족들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계속해서 타이른다. 그러나 일이 끝난 뒤와 일요일이면 마치 지옥 같다.
어떻게?
지옥에서의 방향을 묻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만약에 지형적으로 좀 단순한 곳이라면 사람들은 활짝 열린 시골로 걸어 나가서 널따란 강의 강둑 위에 누워 있기라도 할 것이다.
한 인생의 시간이 느껴지는 공간은 한 개의 원으로 표현될 수 있다. 이 원은 어떤 주어진 순간에도 과거⦁현재 ⦁미래로 채워져 있다. 자아는 여기서 시간의 어떤 한 개의 점에만 연결될 수는 없다. 시간이란 연속성에 입각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로만 떼어서 말할 때 과거의 나, 현재의 나, 가능성으로서의 나 정도에 불과하다.
이 원 속에는 과거는 묻혀 있는 독자적인 추억들의 형태로, 미래는 두려움과 희망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현재는 발생하는 대로 그 안에 들어가고, 그 즉시 과거와 미래가 거기 연결된다. 이 삼자는 하나의 혼합물을 형성하며 그것이 그 개인의 바로 그 순간의 행동의 의도성에 속에 표현된다.
그 의도성은 과거의 정보로부터 비롯되었으며, 현재에 존재하고 있고, 방향은 미래를 향하고 있다. 그러나 이 혼합물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고정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게 필요하다. 예를 들어 어떤 공포증 같은 것은 그것들을 고정시킬 수 있다. 그는 현재와 관련해서 어떤 의도를 가지고 행동할 수 없게 만든다.
공포증을 제외하고도, 외부 환경이 정상적인 과정을 방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상실감의 고통, 이건 사랑하는 사람을 여의었을 때 일어난다. 그 생명을 위해서 또는 그 생명을 향해서 이제는 어떤 솔선수범도 불가능하다. 오직 죽음의 정적만이 있을 뿐이다.
어쩌면 그 정적은 평화를 암시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맨 처음에는 그 고정성이 끔찍하기만 하다. 그리고 그 고정성은 과거를 회고하는 쪽으로 작용한다. 이제 끝난 생명은 어떤 생명이라도 다시 변화할 수가 없다. 남겨진 사람은 그 생명의 삶속으로 돌아가서 자기의 역할을 다시 하며 살아간다.
그것을 원래 자기가 살았던 그대로 다시 살 수가 있으면, 그는 지금 끝난 생명의 아직 열려 있는 가능성을 체험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겨진 사람들이 아예 과거 속으로 돌아 가버리면, 그들은 애초에 그들을 돌아가도록 충동한 것이 무엇인지 절대로 완전히 잊어버릴 수가 없다. 즉 과거 속으로 돌아가서 어떤 죽음을 예감하는 것이다.
그 과거는 지금은 현재로 되어 있는 그 시점에서의 미래를 빼앗겨 버린다. 어느 정도 심한가하면 남겨진 사람이 죽은 사람의 과거의 생활을 계속 함께하고 싶어 하는 나머지, 자기 자신의 과거가 고정되어 버리고 만다.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희생시키는 것은 근본적으로 인간적인 행동이며, 인간의 조건을 구성하는 한 요소이다. 그러나 미래를 향해서 어떤 헌납을 한다는 것은 지속성을 전제로 하는 일이다. 이민노동자는 그의 지속감을 좌절시키는 상황 아래에서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시킨다.
비번 시간은 미래의 어떤 것에 대해서도 교환될 수가 없다. 현재 속에 존재하고 있지만 역시 마찬가지로 무의미하다. 순수한 무(無)다. 그는 그것을 피하려고 한다. 과거에 관한 이야기로 그걸 채우려고 한다. 텔레비전을 보려고 한다. 철도역에 가서 기차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린다. 게임을 한다. 앉아서 미래에 대해 생각한다. 노래를 한다.
음악은 현재를 단단히 붙들어서, 그것을 여러개로 가르고, 그것으로 다리를 건설하고, 그것을 가지고 인생의 시간으로 인도해 간다. 듣는 사람과 노래하는 사람은 그 음악의 의도성을 빌어다가 그 속에서 잃어버린 과거 현재 미래의 혼합물을 발견해 낸다. 이 다리를 건너, 그 음악이 지속되고 있는 동안은, 그는 앞으로도 뒤로도 지나다닌다.
음악이 멈추면 무의함이 다시 스며들어 온다. 현재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건 스스로를 죽은 사람, 죄수를 느끼는 일이다. 그러나 일이 끝난 후와 일요일은 지옥과 같다.
최종적인 귀향은 신화적이다. 그것은 그렇지 않았더라면 무의미했을 것에 대해서도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은 실물보다 더 크다. 그것은 갈망과 기도의 대상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절대로 상상했던 것처럼은 되어 가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신화적이다. 최종적인 귀향이란 없는 것이다.
19세기 이민의 대부분은 영구적인 이민이었다. 어떤 때는 이민이 자기를 따라오지 못한 가족들과의 연결을 유지하기도 했지만 그의 출발은 죽음이나 같았다. 오늘날에는 일시적인 이민노동자들이 국경 없는 감옥에서의 일종의 수감생활과 같은 고통을 감수하고 있다.
* 서유럽과 북유럽의 이민노동자들은 그 전의 식민지 지역 출신들, 즉 영국의 서인도제도인⦁파키스탄인⦁인도인들과 프랑스의 알제리아인, 네덜란드의 수리남 출신 노동자들이 많다. 이들의 노동조건과 생활환경은 대개 남부 유럽으로부터 흘러온 이민노동자들의 경우와 비슷하다. 그들은 똑같은 착취를 당한다. 그러나 대도시 중심부에 자리 잡게 된 역사는 식민주의와 신 식민주의에 속한다.
서유럽이 계속해서 수백만 명의 이민노동자들에게 의존해 왔다는 사실은, 이제 그들의 경제체계가 이민노동자들의 노동력 없이는 더 이상 존속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유럽의 이민노동자들 가운데에는 아마도 여성이 2백만 명은 될 것이다. 어떤 여성들은 공장에서 일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가사노동에 종사하고 있다. 이 책에는 남자 이민노동자들의 경우에만 국한되어 있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서 상상의 이민자가 되어볼 수 있다. 과거 어릴 때 정 든 시골을 떠나 ‘**합섬’라는 섬유회사에 취직한 누나들이 회상된다. 귀향 때 화려한 도시인으로 변해 들어오면 모두들 선망의 대상이 된 적이 있었다. 책의 타이틀처럼, 심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그 내면의 생활상을 잘 그려낸 책이라 보여 진다.<중산>
<‘제7의 인간’에서 P256 중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존 버그 장 모르, 차미례님 옮김,눈빛출판>
* 존 버그(1926년 생)는 극작가, 소설가, 다큐멘터리 작가이다.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미술평론가다. 거시적 문명비평가라 할 수 있다. 중년 이후 프랑스 동부 알프스 산록에 위치한 농촌마을로 옮겨 가 살면서 농사일과 글쓰기를 함께 해 왔다. <모든 것에 대하여>,<피카소의 성공과 실패>,<예술과 혁명><그들의 노동에 함께하였느리라-부커상 수상>등 이 있다.
** 장 모르 존 버그와 공동으로 한 작업 외에도 지난 20년 동안 유네스코, 세계보건기구와 국제적십자사의 사진가로 일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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