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자료

묵상, 수도원 순례!

[중산] 2020. 11. 14. 10:47

지난 2010년 티베트 라싸 지역에 여러 건축가와 답사하러 갔을 때였다. 티베트의 여러 불교 수도원을 살펴보다가 라싸에 있는 조캉 사원에서 수도의 의미를 다시 알게 되었다.

 

조캉 사원은 7세기 티베트에 시집온 당 태종의 조카딸 문성공주가 지극한 불심을 일으켜 지은 절이다. 사원을 향해 오체투지를 하는 순례자들이 줄을 잇는다. 그들은 마음에 간절함을 담아 온몸을 바닥에 던지며 기도를 한다. 가만히 보니 그 순례자들 가운데 자기 고향에서부터 오체투지를 하며 온 듯한 젊은 남자도 있다.

 

무릎과 팔뚝에 보호대를 댔지만 이미 해어질 대로 해어졌으며 옷은 남루하기가 짝이 없었고 얼굴은 길바닥의 먼지와 오물을 뒤집어쓴 초췌한 몰골.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광채가 있었다. 아, 수도라는 게 말 그대로 길을 닦는 일이구나. 그냥 앉아서 염화시중의 미소로 득도하는 게 아니라 길을 닦는 고통을 겪은 후에야 알게 되는 행복인 게다.

 

그러니 성당에서도 신과 함께하는 아름다운 의식에 참예하여 행복을 얻으려면 미로를 무릎으로 기는 고통쯤은 기꺼이 감내해야 한다고 여겼고, 그런 의식을 치르고자 만든 게 미로였다.

 

깨달은 지금이라 해도 꼭 그렇게 기어서 가지는 않겠지만, 스스로 작은 자가 되어 눈으로라도 기어서 미로를 통과하고 싶었다. 그러나 산 마르티노 성당의 입구 개수 공사로 그렇게 갈 수 없게 된 것이다.

 

오늘은 13세기 초엽 성 프란체스코가 남긴 흔적을 찾아갑니다. ‘프란체스코 수도회’ 혹은 ‘탁발 수도회’의 창시자입니다. 그는 본디 부유한 옷감 상인의 아들이었으나 전쟁에 군인을 참전해 포로로 수감되어 있던 중에 신비한 영적 체험을 합니다. 그는 호방했던 젊은 날의 향락을 끊고 수도사의 길을 걷습니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그의 수도 방법은 탁발이었습니다. 탁발은 불교의 수도승이 집집마다 돌며 염불을 외워 복을 전하고 밥을 얻어가는 형태인데, 쉽게 말하면 거지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모든 것을 버리고 비워 철저한 청빈으로 사도적 삶을 살며 자연과 대화까지 하는 그를 많은 무리가 따랐고, 프란체스코는 그들과 더불어 ‘작은 형제들의 수도회’라는 가난한 공동체를 만듭니다. 현재는 16세기에 지은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라 성당 내부에 원형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생폴 주교좌 성당은 14세기 초 로마네스크 양식의 아주 소박한 건물로 시작했지만,마을인구가 증가하고 세력이 커질 때마다 증축되어 건축이 시대별로 변화한 단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 흥미롭다. 긴 여행의 시간 가운데 성당을 들르는 일은 휴지부를 얻는 것과 같다. 잠시라도 회중석의 장의자에 기대어 묵상에 잠기면, 여행 중에 쌓인 피로가 허물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마음도 다시 다지게 된다.

 

서울 같은 번잡한 도시에서도, 굳이 종교적 색채를 띠지 않더라도, 성소를 곳곳에 만들어 지나가는 이들에게 영성을 발견할 기회를 가지도록 하면 좋을 것이라고 시에 제안했다. 나는 번잡한 곳만이 아니라 경건한 영역이나 시설이 있어야 도시의 지속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다. 경건한 곳이라면 죽음이 있는 무덤만한 곳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묘역을 부동산 시세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도시 밖으로 쫓아내어, 마치 죽음을 모르는 양 일상을 산다. 오래된 도시들을 보라. 오래된 대부분의 도시는 무덤을 가까이 두고 늘 죽음을 보며 일상을 살기에, 그들은 지금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잘 안다. 지혜로운 인디언의 노래에 이런 내용이 있다.

 

내 무덤 앞에서 울지 마오

나는 거기 있는 게 아니라오. 나는 잠들지 않는 다오

나는 숨결처럼 흩날리는 천의 바람이라오(∙∙∙∙)

내 무덤 앞에 서서 울지 마오

 

무덤이라는 장소는 우리가 죽은 자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어떻게 사는 게 옳은지 성찰하는 곳이다. 그래서 무덤은 죽은 자가 아니라 남은 자를 위한 곳이며 산 자인 우리에게 절실한 시설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이를 혐오 시설이라며 버렸다. 이는 결국 우리 자신을 버리는 행위와 같다.

 

발걸음을 옮겨 이곳의 묘역을 찾았다. 묘역은 마을 성벽의 남문 밖 좁은 지형 위에 있었다. 성모마리아를 모신 경당이 절벽 끝에 있어 장례식장으로 쓰이고, 그 앞으로 묘들이 줄 이어 있다. 마르크 샤갈, 20년을 이곳의 풍경을 그리며 살았던 그도 1985년 여기에 묻혔다.

 

코트 다쥐를의 야트막한 풍경이 사방에 펼쳐져서 마치 녹색의 바다에 떠 있는 듯한 이 절벽 위 묘역은, 북편에 있는 마을의 문을 나서며 모든 것에서 자유한 죽음이 눕기에는 너무도 마땅한 장소였다. 이제 세상 밖으로 나가 자유하는 죽음의 풍경, 성문 옆 성벽위에 앉아 망연자실한 채 한참을 바라보았다.

 

오전에 빛이 짧게 반짝였다. 그러나 회랑에 내린 부드러운 음영은 오히려 석재의 결구와 쓰인 돌의 표정을 훨씬 선명하게 나타냈다. 중정은 정사각형이 아니라 다소 각이 일그러진 사각인데 그 각도가 절묘하다. 지형의 차이 때문에 생긴 바닥의 높낮이 차와 함께 틀어진 각이 한정할 수 없는 크기의 공간을 만들며 신비를 더했다.

 

2층으로 올라가 수도사의 숙소 공간과 테라스를 돌았다. 디테일 속에 신이 있다고 미스 반 데어 로에가 말했다. 그는 여기에 와보았을까? 정말 그 속에 신이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토록 완전할 수 없다. 이를 지은 건축가가 과연 누구일까? 결코 나타나지 않는 그를 정말 알고 싶었다. 그의 간절함이 없었다면, 이 완벽한 아름다움은 불가능했다.

 

나는 눈물까지 흘리게 하는 르 토르네 수도원 건축의 힘은 어디서 온 것인지를 짐작한다. 절박함일 게다. 예전에 어떤 이가 내게 당신의 건축은 어디서 오느냐고 물었다. 같은 대답을 했다.

 

절박함. 돌이켜 보면 나는 늘 절박했다. 어릴 적 파산한 집의 곤궁함으로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닐 처지여서 절박했고, 내 의지와 관계없이 주어진 종교는 늘 의심덩어리여서 믿음을 강요하는 주변 사람들과 갈등하며 절박했다. 젊은 시절 허구한 밤을 제도 판 위에서 하얗게 지샜다. 동료들이 핏발 선 내 눈을 보며 걱정했지만, 그럴수록 그들이 잠잘 때 나는 또 밤을 새웠다.

 

어느 날 문득 나에게 ‘빈자의 미학’이 도둑처럼 왔다. 나는 안다. 언어는 말하는 게 아니라 내게 오는 것임을 ∙∙∙∙. 그때는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를 읽기도 전이었다. 절박함 끝에는 늘 침묵이 있기 마련이며 그 침묵을 견디면 진정한 언어가 온다는 것이다. 빈자의 미학, 다시 말하면 내가 죽어서 다가온 언어였으며 나를 평생 쫓아다니는 존재가 베푼 은혜였다. 그 은혜로 다시 절박하여 글을 써서 책까지 낸 터라 나는 이 절박함에서 이제 영영 벗어나지 못한다.

 

그랑드 샤르트뢰즈 수도원, 클뤼니 수도원이 성장하여 방대한 상태가 되자 그 번잡함을 떠나 베네딕토 규칙을 엄격히 지키며 오로지 침묵 속에서 수도에 정진하고자 랭스 브루노(1930?~1101)수도사가 1084년 여덟 명의 동료 수도사와 함께 프랑스 알프스의 깊은 산중에서 개척한 수도원이다.

 

이 수도원은 1,000년 가까이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한 번도 외부에 문을 연적이 없다. 1984년 독일의 영화 감독 필립 그로닝이 촬영을 청원한지 무려 16년이 지난 후에 답신을 받아 2005년에야 <위대한 침묵>의 영화로 알려졌다.

 

아테네 멸망이후 무려 2,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국가를 가지지 못한 그리스인들이 부르짖는 자유를 공감하고자 구성한 이 여행은 같이 간 어느 누구보다 내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세계의 문명을 열어 오늘날 지성의 기반을 구축했지만, 역사의 격랑은 그들에게 오랫동안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종교가 그들을 위로했을까? 그리스 땅과 섬 곳곳에 정교회의 뿌리는 깊었다.

 

그리스 북부 칼람바카 지역의 마테오라, 공중에 달려 있는 곳이라는 뜻의 마테오라는 마치 바위를 수직으로 깎은 듯 기괴한 봉우리들이 집단으로 모여 특별한 풍경을 이루는데, 그 봉우리 위에 수도원이 있다.

1541년에 지은 마테오라의 발람수도원, 마테오라에서 두 번째로 큰 수도원은 성인들의 수도원으로 불리는데, 접근 수단이 오로지 도르레였다.

 

애초에 수도하고자 세상을 버리고 광야로 나간 수도사들이 절벽 동굴을 찾아 기거한 게 수도원의 초기 형태였다. 그런데 이곳은 절벽의 봉우리 위에 굳이 건축을 한 거것이다. 14세기 무렵 비잔틴제국이 이슬람 세력에 의해 패퇴를 거듭하자, 위협을 느낀 수도사들은 절대 고도 같은 이곳에 수도원을 짓고 세상과 결별했다.

 

로프와 나무 사다리를 늘어뜨려서만 겨우 세상과 이어지고, 경우에 따라 그 줄을 거두어 세상과 단절했다. 세상보다는 하늘이 더 가까운 이 수도원, 이곳의 수도사들이 보는 세상의 바다는 고통과 시름의 바다였을까? 수없이 많은 가파른 돌계단을 숨 가쁘게 올라 그 높은 봉우리 위에서 본 파노라마의 세상은, 그러나 내 눈에 더욱 아름답게 보였으니 나는 확실히 세상에 속한 자였다.

 

1996년이었을 게다.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내용에 이미 매료되었던 나는 이 책이 나오자마자 손에 쥐었고 그의 문장을 읽으며 전율했다. ‘지식인은(∙∙∙∙)단도직입적이고 직접적으로 말한다. 그러한 말들로 인해 높은 지위에 있는 친구를 사귈 수 없고, 공적인 명예를 얻지 못하며, 이러한 현실을 벗어나고자 탈출할 수도 없다. 이것은 고독한 상황이다.’

 

나는 완전히 궤멸당하고 말았다. 건축가가 되려면 그래야 했다. 자기 집이 아니라 다른 이의 집을 지어주는 일을 직능으로 가지는 건축가는 자신을 타자화하고 객관화시켜야 한다.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의 땅에 내가 가지고 있는 타성과 관습의 도구를 다시 꺼내어 헌 집을 그리는 것은 건축이 아니라 관성적 제품을 만드는 일이며, 새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의 소망을 배반하는 일이다.

 

새로움에 반응하고 스스로를 변화시켜야 하는 건축가가 경계 안에 머문다는 것은 그 소임을 파기하는 일과 다르지 않으니, 외로움과 두려움은 건축가에게 어쩔 수 없는 친구일 수밖에 없다.

 

우리 인간 존재는 땅 위에 건축을 통해 정주함으로 이루어진다고 하여 서양철학에서 존재론에 관한 전기를 만든 하이데거(1889~1976)는, 건축가의 그런 경우를 “깊은 겨울밤 사나운 눈보라가 오두막 주위에 휘몰아치고 모든 것을 뒤덮는 때”라고 이르며, 그때야말로 “철학을 할 시간”이라고 위로했다.

 

<‘묵상’건축가 승효상의 수도원 순례, p519 중 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승효상지음, 돌베개>

제천 의림지
마테오라 발람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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