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이론의 창시자 아도르노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론의 창시자 마르크스(1818~83)는 모두 라인 강 연안 지역 출신이다. 프랑크푸르트에는 지류인 마인 강이 흐르고 마르크스가 태어난 트리어에는 모젤 강이 흐른다. 마찬가지로 라인 강의 지류다.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한 집안 출신답게 마르크스는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에 그다지 충실하지 않았고, 아도르노 역시 예술을 통한 보편교양을 추구하는 개화된 유대인 집안에서 성장하였다. 두 사람은 개인적인 역량 면에서도 탁월하였다. 고도의 지적 능력으로 그들을 관리한 것은 지식인으로서의 정체성뿐이었다.
아도르노와 마르크스는 둘 다 자유주의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났다. 19세기 중반 마르크스는 자유주의 혁명의 시대를 통과한 후 영국으로 망명해야 했고, 아도르노는 1930년대에 미국으로 망명해야 했다. 마르크스가 자유주의의 실현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현실에서 확인하는 체험을 했다면 아도르노는 나치즘의 등장으로 존재기반 자체가 말살되는 시간을 겪었다.
마르크스가 학업을 마치고 사회활동 할 당시인 1840년대 독일사회에 자유주의적 변혁이 실현될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했지만 어쨌든 사회변화의 바람은 프랑스로부터 유입되었고, 1830년 7월 혁명의 여파로 자유주의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학업을 시작한 본에서 1년을 보내고 1836년 베를린으로 간 마르크스는 곧바로 헤겔철학에 경도되었다.
1831년 사망한 헤겔의 지적 유업은 이미 좌파와 우파로 분화된 터였다. 우파는 효율적인 관료제도를 갖추고 좋은 대학들이 세워졌으며 산업화로 고용이 늘었으니 계몽의 성과로 인정하는 입장이었다. 반면 ‘청년 헤겔파’로 지칭되기도 하는 좌파는 빈곤, 국가의 검열, 종교적 차별 등이 여전한 현실을 직시하고 변증법적 사유를 한 단계 더 진전시켜야 한다는 투지로 뭉쳤다.
‘이상적인 것은 현실적이어야 한다.’의 형태로 실현시키려는 젊은이들이 이른바 ‘박사클럽’이라는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마침 박사학위를 받은 그 시점에 자유주의 부르주아들이 쾰른에 신문사를 세우려고 돈과 사람을 모으고 있었다. 헤겔좌파의 수장에게는 저널리즘이 더 어울릴 수 있었다. 급진민주주의를 아우르는 ⌜라이니셰 차이통⌟편집장이 되었다.
당국의 검열이 강화되고 출자자들과의 갈등 등으로 좌절을 겪으면서 마르크스의 이 시절 경력은 개인사이기 이전에 자유주의 전망이 좌절하는 독일 민족사의 한 단락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 ‘독일사’는 19세기 유럽대륙이 겪은 자유주의 파탄의 역사를 가장 역동적인 형태로 구현하는 경우가 된다.
1848~49년의 피비린내 나는 봉기들은 과학이 눈부시게 발전하는 가운데 민중들은 빈곤상태로 떨어지는 사건이었다. 이 시기 혁명가들은 부르주아적 자유주의 혁명이 사회주의적인 것으로 변환되리라는 희망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절박함에 시달렸다.
프로이센 정부는 1849년 7월 마르크스를 라인라트에서 추방하였고, 프랑스 정부도 그를 참아주지 않았다. 결국 영국으로 출국하여 런던에 도착한 마르크스는 고립된 생활을 하면서 ⌜자본론⌟을 집필한다. 이후 그는 다시 유럽대륙을 밟지 못한다.
이념차원에서, 독일이나 서부유럽은 아니었지만 러시아에서 ‘진보의 과제’를 속개하려는 일군의 사상가들이 나타났고, 그의 이론은 혁명적 실천을 기획하는 동력으로 떠올랐다. 인류문명사에 사회주의 혁명이 등장하였고, 문명인들은 다시 한 번 구조적 폭력을 경험하게 된다.
비판이론의 가장 뜨거운 화두는 바로 이 ‘구조적 폭력’의 문제다. 이전보다 ‘더 나은 삶‘을 추구하면서 개인적 영달을 탐하지도, 속물적 퇴행에 빠지지도 않았는데 잘해보려는 노력이 의도와는 완전히 딴판인 결과를 가져오는 이 역할을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20세기에 발생했던 구조적 폭력이 마르크스라는 개인과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너무나도 선명하고 거대한 유산이 되었고 ‘신자유주의적’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21세기에도 마르크스주의는 우리에게 여전히 큰 ‘산’으로 남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관심은 왜 인간적 선의와 진보의 이상이 ‘구조적’인 차원에서는 선하지 못하게 되고 아름다운 이상을 유지할 수 없게 되는가에 쏠린다. 여기에서 홉스봄은 프랑크프르트학과의 비판이론이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하게 되는 지점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다.
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그 본래의 자신만만한 급상승의 기세를 잃자 새로운 이데올로기, 즉 사회주의가 낡은 18세기적 진리들을 손질하여 새로운 체계를 갖추고 나섰다. 이성과 과학과 진보가 사회주의의 확고한 기초가 되었다. 운동권 학생들에게서 ‘입 진보’라는 비난을 들으면서까지 ‘이론적 천착’에 거의 매몰되다시피 했다. 왜 그런 고집을 피웠을까?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의식에서 산업화 패러다임을 불식하는 일이 급선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진보의 이상이 표방하는 ‘더 나은 삶’이 ‘더 안락한 삶’ 혹은 ‘더 많은 소비’를 선사할 ‘지금, 여기에서의 실천’이라는 소시민성에 희생된다면, 진보는 또 다시 본래의 이상을 기만 할 것이다. 68학생 운동(1968년 대학생과 좌파가 노동계의 지지를 얻어 1000만명이 일으킨 동맹파업,프랑스)의 급진성은 1848~49년 혁명기의 자유주의 이상을 재소환하려는 움직임인 측면이 없지 않았다. 따라서 과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하여, 존재 한 적이 없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무엇보다 먼저 과거의 걸림돌을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마르크스주의에서 산업화 패러다임을 제거하는 계기를 확립하는 것은 비판이론을 정립하면서 이도르노가 심혈을 기울인 부분이다.
비판이론은 현실제도로 정착된 마르크스주의보다 변증법을 훨씬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이데올로기 측면에서도 이런 사정은 먼저 적용된다. 모든 정신이 이데올로기인 것은 아니다. 비판이론은 정신에도 적용되는 내재적 비판을 뜻한다.
비판이론은 인간적인 관심에서 시작되었다. 그런 한에서 실천적이다. 하지만 비판이론은 증명되어야하는 주제로서의 실천에 따라 측정될 수 없다. 진리, 이성의 객관성은 비판이론에 대해 구속력이 있다. 비판이론은 이론과 실천의 통일을 실체화하지 않는다. 이런 통일은 오늘날 같은 사회에서는 전혀 가능하지 않다. 이론과 실천 사이에 어떤 연속성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계급사회 가장 최근 단계는 독점에 지배되고 있다. 현 단계는 독점에 합당한 정치 조직의 형태인 파시즘으로 치닫는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대중이라는 이름의, 억압된 사람들, 프롤레타리아들이 계급으로 하나가 되어 공포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라는 그런 표상이 무기력과 권력의 현재와 같은 배분에 직면하여 전망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계급이라는 개념 자체를 자세하게 고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개념은 고착되는 한편으로 동시에 변한다. 고착되는 측면은 사회가 착취자와 피착취자로 나뉜다는 이 개념의 토대가 완화되지 않은 채 지속되고 강제되고 더 견고해지는 데서 드러난다. 변화는 피억압자들이 오늘날 스스로를 계급으로 경험할 수 없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자본가들 사이의 자유로운 경쟁은 그들이 일치해서 임노동자에게 행하는 불의를 이미 포함하고 있는데, 임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체계를 통해서 임노동자를 생산해내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는 가장 확실한 근거는 자본주의가 시민사회 구성원을 임노동자로 생산해낸다는 사실에 있다. 하이테크놀로지의 미래지향적 게기도 포스트모더니즘의 참신한 아이디어까지 체계유지에 종속시킨다. 자본은 페미니즘도 팽창 메커니즘에 종속시켰다. 결국 20세기 후반 문화 운동은 자본의 집중과 강자의 승리를 도왔다.
시장경제에는 계급개념의 비진리가 잠복된 채로 있었다. 반면 독점에서는 이 비진리가 가시적으로 되고 진리인 계급의 살아남음은 안 보이게 된다. ...부르주아지 편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맞서 자신의 계급적 성질을 부인하기가 쉬워지는데 실제로 그들의 조직이 이해가 동일한 사람들의 합의라는 형식을 내팽개쳤기 때문이다.
18세기와 19세기에 부르주아지를 계급으로 구성했던 이 형식은 유력자의 직접적인 경제적∙정치적 권력으로 대체된다. 이 유력자의 명령은 추종자들과 노동자들에게 동일한 경찰의 위협을 가하고, 동일한 기능과 욕구를 강요한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계급관료를 통찰하는 일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
소수의 소유자와 압도적인 무소유의 대중으로 나뉘리라는 이론의 예측은 맞아떨어졌다. 하지만 이로써 계급사회의 본질이 명백하게 되는 대신에 그 본질이 대중사회에 의해서 주술에 걸려들고 이 대중사회에서 계급사회는 완성된다. 지배계급은 자본의 집중 뒤로 사라져(자취를 감춰)버렸다.
사회적 총 생산의 양이 증가할수록 부의 집중이 가속화되는 과정을 해병해주는 글귀다. 모두 잘 살기를 염원하면서 개발독재의 국민동원령을 감당한 한국사회도 20 대 80의 사회를 지나 1대99의 시대로 부가 집중되는 자본의 탐욕을 막아내지 못하였다.
마르크스는 계급이론을 전개하는 중에 사망하였다. ...개혁주의자들만이 계급문제에 대해 토의하면서 접근하였는데, 투쟁을 부인하고 통계학적으로 중산층을 추인하며 우회적인 진보에 대한 찬양으로 시작된 배반을 호도하기 위해서이다.
기만적인 계급 부정은 이 이론의 책임 있는 담당자들로 하여금 이 개념을 발전시키는 대신 학습대상으로 보호하도록 움직였다. 이리하여 이론은 허점을 드러내고 실천은 파멸시키는 공모자가 되었다. 만국의 부르주아 사회학은 이를 활용하였다. ...
사람들은 삶의 푸른 나무 앞에 가려진 지배역사의 어두운 숲을 더 이상 못 보는 것이다....민주주의가 **과두제라는 사실은 성숙한 지도자의 견해와 이해에 따라서 민주주의로 나아갈 만큼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인간에게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기득권을 역사의 객관적 필연 속에 파묻어버리는 비인간성에 있다.
20세기 후반 혁명운동에 헌신하던 이론의 계승자들은 소멸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을 ‘교육’으로 구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그럴 수 있다고 믿었다. 교육 역시 체계의 일부가 되었음을 너무도 자명한 일이다. 한국의 대학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는 입시제도는 아마도 전 세계적 모델에 해당할 것이다.
아파트 한 채를 목표로 저축을 하던 중산층은 어느새 주택소유자와 세입자로 분화되었지만, 아파트 소유자가 될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는 신화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계급관계는 자본과 이주노동자 사이로 이전되었다. 과거 제3신분이었던 부르주아지가 구체제를 무너뜨리면서 ‘인권’의 이름으로 연대했던 체계 외 존재인 제4신분은 제3신분이 사회의 지배자가 되면서 프롤레타리아라는 이름을 얻고 체계 내 존재가 되었다.
그런데 이 제4신분은 체계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면서 선임자인 제3신분이 개척한 ‘지배자가 되는 길’을 반복의 역사로 구현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계속 지배자로 남기위해 체계 외 존재를 다시 필요로 했다. 중산층 신화가 창궐하는 이유다. 지배자는 여전히 제 3신분이다. 그래서 적나라하게 자기이해를 관철하는데 거리낌이 없다. 제 4신분의 역할을 이어받았지만 어디에서도 연대의 손길을 발견하지 못하는 이주노동자는 제 5신분으로 응집되는 중이다.
20세기 후반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명실상부하게 사회적 존재감을 상실하였다. 하지만 계급모순은 심화되었다. 생산력의 비약적인 증가로 가능해진 소비의 대중화∙일상화는 자본주의 모순의 체제내적 성격을 강화했다. ‘인위적인’ 화폐를 매개로 성사되는 소비가 자연스러운 삶이 되는 과정은 자본주의 생산품이 자연산물인 듯 듬뿍듬뿍 주어지는 환경이 조성되면서 가능해진 것이다.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인류에게 ‘선사한’ 새로운 환경이다.
자본주의가 ‘자연’이 되면서 모순과 억압도 자연적인 현상인 듯 받아들여지기 시작하였다. 해방된 자율적인 개인이라는 서구계몽의 관념은 자본주의적 자연에 종속되어 해방될 날을 기다리는 처지로 전략했다. 새로운 계몽이 시작되어야 함을 일찌감치 내다보는 테제들이다.
인류역사상 물질적으로 최고의 풍요를 누리는 21세기에 ‘먹고사는 문제’가 정말 시급히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 부상하는 까닭은 바로 사회가 부를 분배하는 과정에서 교환원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생산력의 수준에서 보면 인류는 이미 넘치는 단계에 와 있다. 당장 지상에 유토피아를 실현할 정도다. 분배가 잘못되고 있는 것이다.
20세기에 인류를 비참한 상황에 빠뜨린 1,2차 대전은 강하고 자율적인 개인이 더 이상 자유브르주아로 남을 수 없음을 ‘공지’하는 사건이었다. 독일 파시즘은 ‘강자의 숭배’를 세계사적 원리로 부상시킴으로써 이 숭배가 자체의 부조리성에 몰리도록 밀어붙였다.~
18세기에 들어 세상이 변하자 이성은 신앙에서 감성으로 타자를 교체하였고, 여러차례 관계조정을 시도하다가 18세기 말 관계맺음의 패러다임을 바꾼다. 질풍노도의 격정을 겪은 후 이념을 통한 오성과 감성의 매개를 시도한 것이다. 칸트의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논문은 이 새로운 시도에 대한 기록이다. 이제 이성은 ‘비판’이라는, 좀 더 형식주의적인 관계 속에서 작동하는 것으로 이해되기 시작하였다.
그 후로도 패러다임이 계속 변하였다. 그중에서도 ‘포스트모던’담론은 이성과 계몽에 과도한 부담을 지웠다. 이성에 질서구성 능력 상실이라는 판결을 내리는 데 그치지 않고, 사물의 질서 자체가 폐기되어도 무방하다는 논리마저 유포해놓았기 때문이다.
21세기로 접어든 현재, 이러한 생각에 대한 재검토가 절실하다. 질서구성 방식의 다양성을 검토할 필요한 시점에서 현대문명이 타자로 교류하는 방식에 대한 색다른 설명모델은 소중하다. 예술의 자율성은 쾌감을 통해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어지는 진정한 교류의 모델이 될 수 있다. ‘마음의 질서’가 사회구성의 원리로 들어서게 되면, 명실상부한 ‘문화의 세기’가 열릴 것이다.
철학은 참된 구성을 구체적으로 실현할 수가 없다. 우선 동일성을 부정하기 위해서라도 철학에서는 개념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개념을 떠나면 철학이 아니다. 예술이나 종교가 된다. 철학은 철저히 개념에 묶여 있다. 묶인 채로 개념은 이념을 실현할 수 있다. 개념으로는 객관세계를 온전하게 파악할 수 없음을 직시하는 것이 철학의 힘이다.
<‘아도르노, 현실이 이론보다 엄정하다‘에서 p440중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이순예교수 지음, 한길사출판>
* 이순예교수: 독일빌레펠트 대학교에서 독일 철학적 미학의 발전 과정을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건국대학교 교수.
**과두제: 소수나 집단이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독점하고 행사하는 정치체제
- 주제별 내용이 방대하여 요약 발췌분의 문맥흐름이 매끄럽지 못하다. 상세 내용은 책을 통해서 이해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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