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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세 가지 직업

[중산] 2020. 12. 5. 07:55

불가능한 세 가지 직업

1925년 프로이트는 미래를 예견하는 위트 있는 글을 남겼다. 이 세상에는 불가능한 직업 세 가지가 있는데, 바로 ①교육하는 일, ②치료하는 일, ③통치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 일을 하는 사람인 아버지, 의사 그리고 정치인은 프로이트가 살던 시대에는 모두 남성을 가리켰다.

 

육아와 정치, 사람을 돕는 일은 물론 가능하다. 프로이트가 말한 불가능과 정신분석가 자크 라캉이 말한“아버지, 정치인, 의사됨과 가장 밀접한 감정이 수치심이다”수치심은 이 일을 하는 가부장적 위치에 있는 주인상과 불가분의 관계라는 해석과 관련 있다. 아버지 말은 늘 옳고 아버지가 우두머리다. 정치인은 자신이 당선되기만 하면 모든 것이 바뀔 것이라 약속한다. 심리치료사는 자기 치료법의 효능이 확실하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증거 기법 연구’를 내세운다.

 

이런 시스템이 수백 년간 유지 될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이 그 시스템을 믿었기 때문이다. 지배자(옛날 같으면 아버지, 왕, 지금이라면 교수, 의사, 정당 지도자 들)의 측근일수록 그 지배의 약점에 익숙하다. 그들은 지도력의 허점을 더 많이 볼 것이다. 과거에 충성심은 주로 주인의 비밀을 지켜 체면을 살려주는 것을 뜻했다. 이러한 공모는 옛말이 됐다. 이제 스노든과 위키리크스 같은 내부 고발자들이 많아졌다.

 

전통적 의미에서의 충성심(더 정확한 표현으로는 공모)이 사라지면서 종교, 정치, 교육, 단란한 가족 등의 영역에서 갈수록 많은 스캔들들이 등장하고 있다. 권력 남용은 가부장제의 틀 안에 구조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는 권력의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그 자리에 들어가려고 하다가 우연히 저지른 실수가 아니다. 그 자리 자체가 그런 실수를 범하기에 너무 좋은 환경이기 때문에 그렇다. 폐쇄적인 집단일수록 병적증상을 보인다는 사실을 우리는 임상심리학과 고전 정신의학을 통해 배웠다.

 

①불가능한 직업으로서의 육아, 양육

과거에는 아버지의 실패를 숨겼지만 더 이상 그렇지 않다. 게다가 요즘 젊은 아버지들의 어깨에 지워지는 압박감은 그 어느 때 보다 무거워졌다. 너무 무거워진 나머지 아버지 역할을 아예 거부하는 남성들도 늘고 있다. 반면에 이전 세대와 다르게 아이들과 훨씬 소통하는 아버지들이 늘어났다. 그러나 스스로가 아버지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바로 이 적극적인 아버지들이다. 부연하면 어머니들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신생아, 영아, 유아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모두 부모 탓이 된다는 것이다. 잘못된 식습관, 수면훈련을 잘못했다고 손가락질 받는다. 게다가 머지않아 자녀들에게도 평가를 받게 된다. 더 이상 ‘아버지’는 도전 받지 않는 권위의 자리에 있지 않으며 모든 부모는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 어떤 증거를 대도 불충분하고 그것의 설득력도 잠시뿐이다. 지난 시대의 아버지가 느꼈던 우월감은 이제 수치심으로 바뀌었다.

 

현대 아버지의 유형은 양극단으로 나뉘었다. 첫 번째 유형의 아버지는 자신이 아버지라는 사실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포기해버리고, 일과 자기 생활에만 몰두할 뿐 아이들을 위한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 반대로 지극정성인 아버지가 있다.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아이의 모든 일에 관여하고 싶어 한다. 말하자면 제2의 엄마가 되는 격이다. 이 아버지들에게 부족한 것은 필요한 순간에 용기 있게 ‘안 돼’라고 말할 수 있는 단호함이다. 그렇게 행동하면 즉시 공격을 받게 된다.(“완전 꼰대네!”)

 

요즘은 남자로 살아가기가 혼란스러운 시기다. 생각해보라. 남자는 자녀에게 친구인 동시에 아버지여야 하고, 아내에게는 집안일을 도와주는 가정적인 남편인 동시에 남자다운 모습도 보여야 한다. 게다가 회사에서는 좋은 동료인 동시에 워커홀릭이어야 한다. 우리가 부모에게 기대하는 역할은 이렇듯 애매모호하다.

 

차이와 거리를 두고 존재하기

대다수 부모는 권위의 자리를 기피하고, 단호하게 ‘안 돼’ 라고 말하는 것을 꺼린다. 어떤 부모는 양육법이 틀렸다고 생각해서, 어떤 부모는 아이가 적개심을 품을까 봐 두려워서 그렇게 행동한다. 확실한 권위의 자리에 있기에는 시간도 능력도 부족하다고 느끼는 부모는 ‘부드러운’양육법을 택한다. 이들의 목적은 권위자가 되기보다는 자녀에게 평등한 관계로, 친구처럼 다가가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들은 기본적 오류를 범한다. 권위는 차이와 거리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열네 살 딸을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라고 부르고, 아버지는 열두 살 아들에게 ’남자 대 남자‘로 이야기하는 것은 부모와의 관계가 평등하다는 착각을 만들어 낸다.

 

사춘기 아이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재빠르게 주도권을 잡으려 할 것이고, 그 결과 갈등이 반복 될 것이다. 바로 이 갈등을 부모는 피하고 싶어 한다. 갈등을 회피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이미 축소된 자신들의 존재를 더 축소하는 것이다. 이는 악순환을 낳아 가장 극단적인 경우에는 부모가 자녀를 진심으로 두려워하게 된다. 그렇게 되는 순간 문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이제 노쇠하지 않은 부모도 자녀에게 학대를 받는다. 또한 교사도 학생이 정신적으로, 또 물리적으로 폭력을 가할까 봐 두려워하게 되었다.

 

확실한 권위의 자리를 취하지 못하고 부드러운 접근법을 택한 학교들도 똑 같은 결과를 겪고 있다. 갈등을 피하고 학생들에게 친구처럼 다가가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교사들은 문제가 더 심각해진 현실을 목격하고 있다. 그에 따라 교사들이 학생들과의 접촉을 최소화하려고 한다. 교무실은 안전한 천국이 되고, 학교 내 몇몇 장소(자전거 보관소, 화장실)는 교사가 절대 가지 않는, 그래서 학생들이 장악한 곳이 되었다. 권력관계는 뒤집혔다. 더 이상 교사의 권위를 이야기할 수 없게 되었다. 

 

양육과 교육은 아이와의 거리를 필요로 하지만 아이 앞에 존재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단지 차이에 따른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다. 부모와 교사는 아이들 앞에서 존재감을 되찾아야 한다. 그러나 혼자서 존재감을 발휘해서는 안 된다. 한 집단의 일원으로서 존재해야 한다. 하일 오메르는 이를 ‘예의 주시해 보살피기’라고 명명한다.

 

통제는 비인간적이고, 권력(명령과 통제)과 연관이 있으며, 즉각적인 개입(대개 처벌)에 대한 위협을 근거로 작동한다. 통제 시스템이 과해진다는 것은 권위가 사라지면서 순수 권력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통제를 받는 사람들은 통제를 하는 사람이 뒤를 돌아볼 때마다 그를 조롱하고 다음번에는 어떻게 그에게 맞설지 구상한다. 반면 권위는 단순한 통제 이상의 존재감을 발휘하며 힘이 미치는 대상을 지속적으로 보살핀다.

 

아이가 크면 위험 요인은 길거리, 친구들, 인터넷 등으로 더 복잡해진다. 바로 이러한 부분에서 부모다움(가부장제가 아니다)이 필요한 것이다. 부모는 자녀를 잘 보살피기 위해 무엇이 좋고 나쁜지를 결정한다. 만일 부모 결정이 사회적 관습에 맞지 않는다면 지역사회, 또는 오메르가 말한 집단 구성원들이 그들을 바로 잡아준다.

 

이론상 상시 자녀를 예의 주시하며 보살피는 것은 바람직해 보인다. 그러나 부모가 존재감을 강화하게 되면 차라리 몰랐으면 하는(열세 살짜리 딸이 길가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던가 하는)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이 때 못 본 척하거나 어물쩍 넘어가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다. 그러나 정면으로 대응하면 갈등이 악화되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이제 딸아이는 부모가 볼 수 없는 곳에서 담배를 피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맞을까? 이 예시는 순수 권력과 권위의 차이점을 보여 준다. 권력은 즉각적인 복종을 요구한다.(“당장 담배 내놔!”)즉, 언제나 이기는 쪽과 지는 쪽으로 나뉜다는 것이다. 이때 늘 부모가 이기는 쪽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이 담배는 내 돈으로 산거야!”)

 

비난은 방어적 태도와 거부를 불러일으키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을 주지 못하며, 심한 처벌을 내린다면 더더욱 그렇다. 순수 권력이 실패하는 이유는 무조건적 복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반면 권위는 미래에 일어날 자발적 복종에 초점을 두며, 특정인물에게만 달려 있지도 않다.

 

앞의 예시에서 부모 중 한 명은 아이에게 흡연이 좋지 않은 행동임을 이야기 한 다음 배우자 또는 주변 사람들에게 의견을 구한 후, 다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것이다. 이 모든 행동은 진정한 걱정과 보살핌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아이가 이 메시지를 (아주)나중에 깨닫더라도 괜찮다. 예의 주시하며 보살피기는 오래 지속될 권위에 목적을 둔 것이지 즉각적인 조치를 취하는 것이 아니다.

 

집단적 권위는 다른 사람들과 상의하고 다른 부모들의 의견을 구한다.

개인으로서 ‘권위’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사실 그가 가진 것은 권력일 뿐이다. 우리가 우리보다 위에 있는 사람(가령 교장)이 아닌 옆에 있는 사람에게 호소하는 데 있다. 새로운 권위는 네트워크에 근거한다. 이 네트워크는 아이의 또래 친구들도 포함된다.

 

부모는 자녀의 문제가 생겼을 때 대체로 비밀리에 해결하고 싶어 한다. 사춘기 아들이 방에서 광란의 술 파티를 벌렸다면, 그 자리에 있었던 다른 아이들의 부모에게 연락을 취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해결책이다. 몰래 처리하던 문제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은, 라캉이 지배자의 감정이라고 말한 수치심을 유발한다. 그러나 아무리 민망하다 한들 수치심이 죄책감보다 낫다. 죄책감은 처벌을 내포하고 있으며 많은 경우 배제(희생양)를 초래한다. 수치심은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기회를 만들어주며, 이때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이 주도적인 역할을 맡을 수도 있다.

 

②치료하는 일

내담자들이 안고 오는 문제들은 교과서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내담자들은 상담사가 마법사라도 되는 양 지팡이를 흔들어 자신의 모든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주기를 기대하고 실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상당수가 상담을 그만둬버린다. 몇 년 후, 상담사는 눈치 채지도 못한 채 다음의 시나리오 중 하나에 처하게 된다. 1. 관리자들의 태도, 기관의 규정과 자주 충돌하게 되어 상담사는 번 아웃에 빠지고 자신마저 상담을 받아야 하는 상태가 된다. 2. 내담자들에게 ‘회복 탄력성’이 부족하다고 지적하거나, 스트레스에 너무 예민하다고 이야기 한다. 3. 대안적인 방식을 찾고 싶어 하는 동료를 찾는다.~

 

③통치하는 일

여론은 굉장히 중요하다. 예를 들어 유권자의 투표행태를 바꿀 수 도 있다. 정치인들은 여론이 조작될 수 있고, 자신들이 그 조작을 가장 잘 통제한다고 추정하며 필사적으로 표를 얻어려고 한다. 선거기간만 되면  공보 비서관과 홍보 담당자들이 바빠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또 정치인들은 유권자가 스스로 생각할 수 없고 독립적으로 결정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가정 아래 고등교육을 받은 소수 엘리트만 정부 운영을 맡아야 한다는 믿음으로 나아간다. 선출은 가급적 민주적으로 이뤄져야 하겠지만, 필요하다면(예를 들어 위급 상황 시)민주적 원칙은 잠시 보류될 수 있다. 그러면 ‘대중’을 위한 최선의 결정은 전문가들의 손에 넘어가 있을 것이다.

 

기성정치의 몰락에는 위험한 부작용이 따른다. 많은 사람이 기성 정치의 몰락을 민주주의의 몰락으로 받아들여 새로운 형태의 정권을 모색하는 타당한 이유로 삼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패한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민주주의 정부에 대한 특정한 해석이 시효가 다 되었고, 특히 더는 민주적이지 않게 되어 그 효력을 잃은 것이다.

 

민주주의가 실패했다는 잘못된 생각에서 출발한 다른 형태의 정부에 대한 추구는 전체주의 정권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즉, 권위가 아닌 권력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민주주의의 역사가 실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음을 상기하는 것은 중요하다. 민주주의 기원은 기원전 5세기 아테네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의회민주주의를 이룬 시점은 19세기 초였다. 1980년대부터 정치는 경제에 자리를 내주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전통적 권위는 점치 힘을 잃었고, 그 힘은 금융계와 경제 집단들로 넘어갔다.

 

이 세력은 ‘자유 시장’이라는 완곡한 표현으로 포장되어 오늘날까지도 정치를, 나아가 정부를 장악하고 있다. 선거는 더 이상 민주주의를 보장하지 못한다. 선거는 귀족정치를 낳는다. 우리는 이를 어렴풋이 느끼고 있지만 또렷이 의식하지는 못한다. 귀족정치는 소수 엘리트가 지배하는 정부 형태를 가리킨다. 오늘날에도 재력, 가문, 학벌 등의 장벽 때문에 선거에 출마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당 지도부는 이미 한 차례 선별된 집단 안에서 입후보자 명단을 구성한다.

 

선거가 치러지는 과정을 보면, 내용보다는 후보들의 미디어 노출과 그들이 말하는 구호(“지금 바로 변화”)가 더 많은 집중을 받는다. 설상가상으로, ‘민심을 대표하는 당선자‘는 정부에 입성하는 순간 민심을 생각하지 않는다. 대다수 정당은 의석을 차지하자마자 공약을 저버리고 ’대안이 없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선출 정치인들은 당 본부에서 시키는 대로 행동한다. 즉, 국가가 소수 집단의 하향식 정치에 의해 통치되고 있는 것이다. 대중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과 소수 집단이 시행하는 정책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다. 시위가 늘어가고 ‘분노한 시민’이 증가하는 이유다. 시민들에게는 분노할 만한 이유가 충분하다.

 

IMF 보고서는 소득 불평등 심화가 소득 상위 20퍼센트가 1퍼센트 더 부유해지면 GDP는 감소한다. 반대로 소득 하위 20퍼센트가 1퍼센트 덜 가난해지면 GDP는 올라간다. “IMF는 국가들로 하여금 부동산과 재산에 대한 세금을 높이고 탈세를 방지할 것을 촉구했다.” 이는 경기 부양을 원하는 정치인들이 어느 부분에서 비용을 아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

 

다비드 판 레이브라우크는 현대의 정치 상황을 가리켜 ‘민주주의 피로 증후군’이 역병처럼 돌고 있다고 표현했다.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신뢰하지 않으며, 두 가지 ‘치료책‘을 받아들이려 하고 있다. 첫 번째 치료책은 포퓰리즘이다. 겉으로 봤을 때에는 민주적인 것처럼 보이나, 실제는 그렇지 않다. 포퓰리즘의 민낯은 사람들이 희생당한 후에야 드러난다.

 

두 번째 치료책은, 소수 전문 집단에게 권력을 쥐어주는 일명 테크노크라시(technocracy), 즉 기술 관료제이다. 결정권은 객관적 지식으로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전문가에게 ‘위탁’된다. 이데올로기를 잊고 해결책에만 집중하면 모두가 행복해진다는 것이다. 참으로 그럴 듯하게 들린다.

 

전문가들이 작업에 착수하기 전에 사회는 무엇을 원하고 원하지 않는지, 무엇을 우선순위로 삼을 것인지에 대해 확실한 경계선을 그어야 한다.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사회적 합의를 통해 대다수가 동의하는 경계선이 만들어져야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런 합의는 드물게 일어나며 사람들은 이 결정을 고분고분 따르려 하지 않는다. 이런 결정을 전문가들에게 맡기는 것은 좋은 생각은 아니다. 어떠한 민주적 통제도 넘어서서 통치하고, 소위 자유시장이라는 지배적 권력의 이익을 좇아 결정을 내리는 소수 집단에게 권력을 쥐여 주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민주주주의 사회에서 당연히 있어야 할 투명성이 사라지면 시민들은 ‘유출’로 투명성을 대신한다. 결론은 분명하다.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들은 본질적으로 정치가 아닌 경제적 이해관계에 좌우된다. 게다가 이 결정들은 자율성을 제한하고 불평등을 심화하여 민주주의를 역행한다. 결정권은 유럽의회 의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민주적 통제의 범위를 벗어난 세력에게 주어진다.

 

유명 로비스트들이 정치적 의사 결정에 미치는 영향 또한 어머 어마하다. 이러한 결정들은 객관적인 수치에 근거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본질적으로 중립적일 수 없다. 그 수치를 도출한 연구 자체가 노골적으로 특정 이념에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본래 민주주의에서는 선택 가능한 정책들이 어떤 것이고, 그 정책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시민들에게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점점 그와 멀어지고 있다. 정치적 위기에 대한 두 가지 해결책, 즉 포퓰리즘과 테크노크라시는 피라미드 형식의 순수 권력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선거 전이면 정당들은 저마다 약속을 한다. 저마다 변화를 약속한다. 그러나 선거 후에는 이전 정부와 똑같은 일을 더 과감히 단행한다. 이로 인해 (1) 권력이 교체되어, (2) 시민들을 위한 결정들이 다시 내려지고, (3) 이 모든 것이 동시대 민주주의 형태를 기반으로 이뤄져야 하지만 그 변화는 일어나지 않고 있다.  ‘시장’아닌 정치가 결정을 내릴 궁극적인 힘을 되찾아 한다는데 대해서는 점차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세계 경제는 극소수 금융기관들에 좌우되어왔다. 그 결과는 정치적 자율성의 후퇴, 불평등의 심화, 환경 파괴였다.

 

두 번째로 필요한 변화는 정치적 결정들이 소수 금융기관이 아닌 다수 시민들의 이익을 위해야 한다는 것이다. ‘참여 사회’라는 거짓된 약속과 ‘자기 인생에 대해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구실로 개인을 탓하는 정책이 결합되어 복지국가가 무너지고 있다. 이는 세금이 점점 더 소수에게만 쏠린다는 뜻이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환경 문제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 이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걱정할 미래조차 없어지게 될 것이다. 세 번째로 필수적인 변화를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민주적인 형태의 정부를 지지한다는 가정이 필요하다. 그다음으로는 민주화 과정의 새로운 국면에 진입해야 한다.

 

피시킨의 접근법은 새로운 정치의 이정표가 되었다. ‘숙의적 여론조사(deliberative opinion poll)'라 불리는 공론조사를 통해 그는 민주주의를 현대적으로 해석해냈다. 이때 ’숙의(deliberative)‘라는 것은 ’상의를 통해서‘라는 의미다. 즉 숙의 민주주의는 상의를 기반으로 한다. 특히 중요한 문제이다. 나는 이것이 민주화 과정의 다음 단계라 생각한다. 

 

피시킨의 공론조사는 요즘 사회에 팽배해 있는 냉소주의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사람들에게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고 그들끼리 고민하게 하며 그들의 의견이 중요하고 실제 정책에 반영된다는 것을 보여준다면, 놀라운 일들이 생길 것이다. 참여자들은 정보를 제공받고 토론에 참여한 덕분에 처음보다 더 깊이 있고 다양한 의견을 갖게 된다. 또한 이들이 투표를 통해 내리는 선택은 많은 경우 공동체 전반의 이익에 부합되며,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개인주의적 세계관과는 완전히 배치된다. 숙의 민주주의 모델은 세계 곳곳에서 뚜렷한 성공을 거두고 있는 중이다.

 

정치적 권위에도 새로운 원천이 필요하다. 그 원천이 집단이어야 한다는 사실 또한 분명하다. 민주주의에서 정부는 대표 집단에 의해 작동한다. 시민들은 정확하고 균형 잡힌 정보를 제공하고, 다수가 강력한 소수 집단에 휘둘리지 않도록 보호하고, 합의 된 결정을 제대로 시행하는 것이 새로운 정치인들의 역할이어야 한다.

<‘우리는 왜 어른이 되지 못 하는가’ P342 중에서 극히 일부 요약발췌, 파울 페르하에허 지음, 이승욱님외2인 옮김, 반비출판> *파울 페르하에허: 벨기에 헨트 대학교 교수, 임상심리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 **육아,치료와 통치는 모두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다. 권위의 자리에 있고 싶지만 어느날 꼰대말을 들어야 하고 한 때 가졌던 우월감이 수치심으로 바뀌는 시대가 되었다. 통치에 이르기까지 권위와 권력을 적절한 예시를 통해 심리학, 정신분석, 철학, 역사적으로 잘 설명해 준 책이다. <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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