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스라는 70대 후반의 남자가 있었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는데, 60대 이웃 여자 때문에 사랑의 열병을 앓게 되었다.
“왜 지금 나한테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첫 상담 시간에 그는 절규하듯 외쳤다.
“사랑과 욕망 같은 끔찍하게 복잡한 것에서 해방되었다고 생각했는데요.”
그는 평생을 작은 마을 신문의 편집인으로 일한 박식한 남자였다.
“원치 않아요. 그런데 달콤합니다.”
“나는 아내를 사랑합니다. 아내가 나의 이런 감정을 안다면 속이 상할 겁니다.
나는 이런 걸 원치 않아요. 덕분에 사는 것 같긴 하지만요.”
이 마지막 몇 마디가 인상적이었다. 이 새로운 여자가 그를 살아나게 한 것이다. 그동안 죽어있었기에 그는 그녀를 보고 삶으로 가는 길을 알아보게 된 것이었다. 물론 의식적으로가 아니라 내면 깊숙이 어딘가에서.
“사람들은 날 비웃겠죠. 대머리에다 올챙이배에 발을 질질 끌며 걷는, 어디를 봐도 가련한 늙은이가 말이죠. 그녀는 내게서 뭘 볼까요?”
“영혼이 아주 잘 생기신 것 같아요” 나는 그의 경험을 긍정하는 말을 했다.
“나는 아내를 사랑하는데 다른 여자에게 빠져 있습니다. 이도 저도 못하는 상황이죠. 빠져나가고 싶지만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 거죠.”
“아주 좋습니다. 그것이 현재 상황입니다.“ 나는 말했다.
이 남자의 경험은 드물지 않다. 성적 끌림은 젊은이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며 나이가 꽤 든 사람들은 특히 복잡한 관계에 빠질 수 있다. 그들은 경험에 개방적이며 자신의 감정에 편안해하고 욕망에 의해 움직인다.
성이 그저 성관계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유익하다. 성에는 일반적인 즐거움, 기쁨, 친밀감, 유대, 그리고 관능성 같은 성적 특성들도 포함된다.
사람들과 마음을 터놓고 친밀감을 형성하고 즐겁게 보내고 진정한 대화를 하는 것, 이런 것들 역시 넓은 의미에서 성의 표현일 수 있다. 비결은 이러한 경험들로 성적 욕망을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으므로 새로운 파트너와 실험을 하느라 인생을 망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작가인 존 라르는 은퇴 후 할 일에 상당히 열정적이다. ‘땅으로 돌아가기 전에 지구를 느껴보고 싶다. 얼굴에 햇살을 받고 싶다. 아직 다리가 움직이고 충분히 시력이 좋을 때 모험을 하고 싶다. 낚시를 가고 싶다.
은퇴를 재 정의하는 것은 지루함을 제거하고 새로운 모험으로 다시 틀을 짜는 것이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60세 되기⌟라는 에세이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나이 들면 더 평온해지고 더 차분해지고 더 초연해져야 하는 건가? 글쎄, 나는 정반대인 것 같다.
은퇴한 친구들과 이야기해보면 삶에서 멀어졌다는 소리는 하지 않는다. 정반대이다. 그들은 어느 때보다 열심히 사는데, 그렇지만 그들이 열심히 사는 것은 자신과 세상에 중요한 일들이다. 은퇴에 대한 이런 생각은 도교의 이상과 잘 들어맞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많은 것을 이루고, 혹은 노력과 열망이라는 낡은 요소를 버리고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다.
무위로 알려진 이 철학은 내가 나의 노년을 위해 세운 이상이다. 너무 열심히 노력하지 말고 많은 것을 하자. 좀 더 급진적인 표현을 하자면, 노력하지 말고 큰 일을 해내자.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이루자.
외로움과 혼자 있는 것
외로움과 혼자 있는 것은 다르다. 군중 속에 있어도 외로움을 느끼고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을 수 있다. 경험에 근거한, ‘증상과 같이 가라’는 규칙에 따른다면 혼자 있음으로써 외로움을 치료할 수 있다. 우리의 고통스런 감정은 우리에게 뭔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암시하며 그 방향을 제시한다.
자기 자신의 삶을 느끼고 강한 자기의식을 갖는 것이 중요 할 수 있다.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고 신경 써야 할 사람도 너무 많으니까,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고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위해 해로운 것이다.
나이 들게 되면 과거의 삶을 그리워할 일들만 생긴다. 그러면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고, 지금은 어떤 사람이라고 느끼는지 감각을 상실하게 된다. 그 감정이 외로움처럼 보일 수 있는데, 그럴 가능성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특정사람들과 장소들과 경험들과 더불어 친숙한 세계를 잃어버린 상실감일 수도 있다.
나이 들면서 우리는 유연성과 회복력을 요구하는 통로들을 통과한다. 우리는 잃고 얻으며 또 다시 잃는다. 나이 듦이란 세월이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인생에 기꺼이 마음을 열고 그 초대를 받아들여서 몇 번이고 변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 많은 변화가 보여 지켜본 인생이 아니라 살아온 인생이 된다.
윌든에서 ‘나는 생각하며 살고 싶어서, 오직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만 바라보며 인생이 가르쳐줄 것을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고 싶어서, 죽는 순간이 왔을 때 내가 살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하지 않기 위해서 숲으로 왔다’고 했던 소로가 말한 인생이, 삶이 우리를 나이 들게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삶을 환영하고 그 연금술에, 영혼의 화학적 성질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그 꾸준한 변화에 마음을 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나이 먹는다’는 말을 흔히 그러듯 세월의 흐름이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잘 ‘나이 드는 ’ 와인과 치즈에 관해 말할 때처럼 들어주기 바란다. 그런 것들은 나이 들수록 더 좋아지며, 심지어 나이를 먹어서 특별한 가치를 띤다.
인간도 비슷한 방식으로 나이 들 수 있다. 경험에 의해 변하면서 더 진짜가 되고 더 풍미가 있어지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나이가 들려면 경험의 영향을 받아 관점을 바꾸고, 보다 깨어 있고 보다 세련된 사람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가령 고독의 길을 끝까지 따라가며 그것을 개성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안에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이 존재한다. 우리는 정말로 중요한 것들은 의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반성하기보다는 반응하며 살아간다.
일상의 깊이, 그리고 잘 반성하는 능력은 하나의 성취이다. 나이 들수록 그 능력이 더 나아질 거라고 기대할 수 있다. 경험에서 배웠으니까. 반성을 잘하려면 어느 정도 고독이 편해야 한다. 반성을 하려면 조용히 혼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외로움이라는 것은 그저 자신과 단둘이 있으면서 방해받지 않고 자신의 생각에 마음을 여는 것의 특징일 수 있다. 외적으로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 같아도 내면에서는 기억과 생각들이 들끓는다. 반성이 따르는 고독은 관용이 필요할지 모른다. 그런 고독은 우리를 잘 나이 들게 하며 우리에게 성품을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이 공부’ P402 중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토마스 무어 지음, 노상미님 옮김, 소소의 책출판>*토마스 무어: 세계적인 영성 지도자이자 심리치료사다. 한때 수도사였고 음악가였으며 대학교수로 재직하다가 심리치료사가 되었다. 미시건대학 음악학 석사, 윈저대학교에서 신학 석사, 시러큐스 대학교에서 종교학으로 철학박사 학위 수여.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영혼의 돌봄⌟으로 46주 연속1위 기록을 세움.
다대포해수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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