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과 권위
정체성 형성과정은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정체성은 상이하고, 어찌 보면 상충되는 두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첫 번째 과정은 ‘동일시’라고 부르는데 나는 ‘정체성’과 같은 이 어원을 선호하는 편이다. 또는 이 과정을 ‘거울반응(mirroring)‘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환경과 주변 사람들(특히 부모)이 끊임없이 보여주는 단어와 그림들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토대로 정체성을 형성한다. 두 번째 과정은 동일시와 반대되는 ‘분리‘이다. 어려서부터 우리는 스스로 결정하기를 원하며 주변이 강요하는 것을 거부한다.
동일시와 분리는 동시에 일어나지만 번갈아가며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아니‘라고 말하며 분리를 원하는 어른들을 종종 목격한다. 반대로 무조건 ’그래‘라고 말하는 어른들, 즉 동일시를 택하는 어른들도 있다. 가장 이상적인 모습은 ’그래‘와 ’아니‘사이에서 균형 잡힌 선택을 내리는 것이다.
인간에게 핵심적인 네 가지 관계를 통해 형성되는 정체성에 대해 알아보자. 나는 이성, 내 주변 사람들(또래 집단, 이웃, 직장 동료), 권위와의 관계를 통해 내 정체성을 형성한다. 그리고 내 몸과의 관계를 통해‘ 나 자신을 정의한다.
우리 내면에는 우리가 여자로서, 남자로서, 동료로서, 인간의 몸으로서 해야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명령하는 강력한 힘이 작동하고 있다. 이 힘을 ‘내면화‘라고 말한다. 원래 외부에서(타인에게서) 온 금지와 명령이 우리의 정체성과 합쳐지는 것을 뜻한다. 해야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명령하는 이 목소리는 우리의 일부가 되어 끊임없이 우리를 꾸짖는다. 프로이트는 이를 ’초자아‘개념으로 설명했다.
실제 자아를 지배하는 초자아는 엄격한 아버지상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이 내면화라는 것도 사회적 기대에 순응하는 과정이기에 결국 사회화의 한 형태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회사를 때려치우고, 상사 면전에 욕을 하고 싶다가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내 안에 무언가가 날 막아 세워 계속 열심히 일하도록, 상사에게 예의를 지키도록, 나이 어린 동료에게 점잖게 굴도록 만든다. 이 모든 것이 내면의 어떤 힘에 의해 가능하다니 신기하지 않은가.
권위는 행사하는 사람의 외부에서 비롯된다. 권위는 그것을(명령의 형태로)표현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차지하는 것이다. 사람은 권위를 얻거나, 발휘하거나, 잃거나 타인에게 부여할 수 있다. 따라서 권위의 원천은 그 사람의 외부에 있어야 한다.
권력은 양면적 구조를 지니고 있어 두 사람을 필요로 한다. 힘이 센 사람이 약한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식이다. 따라서 권력은 유예된 폭력이다. 반면 권위는 삼중구조를 지니고 있다. 권위는 제 3의 요소, 즉 모두가 믿는 외부의 원천에 근거하고 있다. 권위에 대한 다소간 자발적인 복종은 바로 이 외부의 원천에 의지한다. 권위는 언제나 내적 강박과 관련 있는 것이다.
‘자연적인’ 권위 모델로 자녀 양육을 언급한다. 가장 전통적인 자녀 양육 형식에서 권위는 아버지에게서 비롯된다. 빅토리아시대의 아버지상은 권위의 상징이었고, 여성과 아이는 그의 말을 따라야 했다. 사람들이 욕망과 도덕 사이에서 겪는 갈등은 그 원인을 되짚어가다 보면 결국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환원되었다.
이는 프로이트가 제시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론의 기본 바탕이 되는 생각으로, 남자아이는 욕망덩어리이며 어머니를 독차지하기 위해 아버지를 제거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버지가 자신보다 더 크고 힘도 세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때부터 아이는 공포를 느낀다. 너무 두려운 나머지 자신의 욕망을 제쳐놓고 아버지가 세운 규칙과 제재를 내면화해 양심(초자아)을 발달시킨다. 급기야 나중에는 아버지가 없을 때조차 금지된 욕망을 생각했다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프로이트의 시대에 가장 흔한 정신질환이던 신경증은 자기 능력을 뛰어넘어 너무나 도덕적이려고 할 때 일어난다. 아버지는 지나치게 엄격했을 것이고 겁을 줬을 것이다. 사내는 진짜 사내다워야 했고 아버지는 진짜 아버지다워야 했던 과거를 생각해보면 충분히 말이 된다. 이렇게 ‘자연적’ 권위의 원천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아들 예수가 자신을 희생해 자신의 아버지를 섬기는 종교를 발흥하고 확립한 것이 가장 대표적이다. 또 다른 ‘아들들’인 유대교의 신 여호와를 숭배하도록 한 모세와 이슬람의 신 알라를 숭배하도록 한 마호메트는 예수보다는 조금 더 나은 운명을 겪는다. 세 사람 모두 아버지 말씀과 그에 관한 법을 세운다.
모세는 신의 계명을 돌에 새겨 시나이산을 내려오고, 예수는 산상수훈을 남기며, 마호메트는 샤리아를 도입한다. 종교와 세속의 권위는 수 세기가 지난 후에야 분리되었다. 이 원초적 아버지 권위는 그가 죽은 후에야 아들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프로이트의 신화와 성서를 통해 분명해진 사실은, 권위의 원천은 우리의 밖에(이 경우에는 하늘에) 있다는 것이다. 신은 자신에 대한 복종을 강요함으로써 권위의 원천이 되는 셈이다.
파스칼은 권위를 훼손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출처를 찾는 일이라고 말한다. 권위는 관습에 근거할 뿐이라는 진실을 사람들이 모르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법이 오래전부터 진실 되게 존재했음을 계속 믿을 수 있도록 내버려두는 것. 이것이 모두를 위한 일이라고 파스칼은 믿었다. 이 신념은 훗날 가부장주의로 명명되는 생각의 근거를 이룬다. 이른바 ‘아버지가 제일 잘 알아.’ 또는 ‘이게 다 너를 위한 일이야’. 모델은 이 신념에서 비롯되었다.
역사를 통틀어 권위의 근거를 신성한 존재에서 찾는 것은 예외적인 일이 아니었다. 인간은 신격화된 존재에 권위를 부여한 다음 자신들이 만든 이 존재로부터 자신들의 권위를 넘겨받았다. 파스칼이 죽고 100여 년이 흘렸을 무렵, 계몽주의 시대를 이끈 지성인 임마뉴엘 칸트가 나타났다. 칸트에 의하면 계몽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스스로 초래한 미성숙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는 실현하는 방법까지 알려준다.
미성숙이란 타인의 가르침 없이는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줄 모르는 무능력을 의미한다. 이 미성숙은 지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타인의 가르침 없이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결단과 용기를 내지 못해서 생겨나므로, 스스로 초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네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이 말은 계몽의 표어다.
칸트의 원칙은 간단하다. 스스로 생각할 수 있으면 자유로운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계몽주의는 이성을 인간에게만 있는 고유의 특성으로 내세운다. 이 이성은 우리 모두에게 존재하므로, 우리 모두 각자의 지적능력을 이용해 인생을 바르게 살아가게 해주는 보편적 법칙을 찾을 수 있다.
아마 다들 한번쯤 살면서 공정한 체제가 생긴다면 어떨까 생각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 체제가 정말 공정하다면 대다수는 기꺼이 체제에 복종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권위와 그 근거에 대한 문제는 단번에 사라질 것이다. 칸트가 설명한 계몽의 의미(‘미성숙은 타인의 가르침 없이는.....’)는 권위의 근거가 될 수 있는 두 가지를 보여준다. 권위는 모두에게 이로운 것에 자발적으로 복종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는, 자기결정권을 가진 개인의 내면에 비롯되거나, 미성숙한 개인이 복종하게 되는 압도적으로 높은 존재로부터 나타낸다.
권위는 신에게서 온다는 전통적 관점이나 인간이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는 칸트의 관점과는 달리, 대부분 사람들은 권위의 가장 이상적인 원천이 지도자 개인이라고 생각한다. 타고난 자질(현명함과 공정함)을 바탕으로 권위를 차지하거나 맡게 된 위대한 지도자를 신뢰하는 것은 당연한 생각이었다.
이러한 생각의 기원은 플라톤의 철인 왕(philosopher king)개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 개념을 발전시킨 철학자는 토머스 홉스였다. 이후 장 자크 루소가 개인적인 해석을 내놓았고, 20세기 초반 독일에서 막스 베버가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옹호하는 의견을 내놓았다. 홉스의 군주, 루소의 위대한 입법자, 베버의 카리스마적 리더와 같은 개념이 이상적 아버지를 연상시킨다는 것은 정신분석가가 아니어도 눈치 챌 수 있다.
기성정치를 비롯해 그 무엇도 믿지 않는다. 모든 것들이 권위를 잃은 것이다. 요즘 젊은 세대 사이에는 이러한 생각이 더욱 만연하다. 사후 세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 그리고 인생을 최대한으로 살지 못했다는 두려움만 남는다. 사후 세계의 두려움도, 전통도, 믿음도 없다. 종교와 전통이 사라진 이유는 널리 알려져 있다. 예전보다 사람들이 많은 교육을 받고 과학을 배울 기회를 얻었으며, 과학이 종교와 전통을 대신해 실용적인 답을 주었기 때문이다.
전통적 권위는 가부장적 권위와 같은 말이다. 둘 다 하향식이며 남성의 전유물이다. 아렌트에 따르자면, 권위의 상실 앞에서 상황을 복구하려는 노력은 권위와 가부장제가 더 이상 같을 필요도 없다. 권위는 삼중구조이다. ①무엇(기관)또는 누군가(권위자)가 ②무엇 또는 누군가에게 ③모든 당사자들이 믿고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외부적 근거를 토대로 권위를 행사한다.
우리는 한 시대의 종말을 겪고 있다. 약 1만 년 동안 성, 사회, 종교, 정치, 경제 등 우리 인생의 모든 분야를 좌우했던 가부장적 권위가 사라지고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권위 자체와 작별을 고하는 것은 아니다. 아렌트는 인간관계를 규제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에 권위 없이는 사회가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우리가 어떤 형태의 권위를 형성해야 하는가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한다. 전통적 권위가 이미 기본적인 인간관계 속에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더욱 자명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몇 십 년 동안 사회변동을 통해 새로운 거울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이로써 우리는 예전과 다른 규범(성공, 경쟁, 유연성, 개인주의, 강요된 자기결정)을 받아들이고 예전과 다른 관계를 형성한다. 이 모든 것은 신자유주의라 불리는, 이 시대를 지배하는 경제모델에 기초한다.
신자유주의가 불평등을 심화하고 사람들을 승자와 패자로 나눈다. 이데올로기로서 이런 모델은 죄책감과 공포를 일으킨다. 오늘날 걷잡을 수 없이 퍼지고 있는 불안장애와 우울증이 그 결과이다. 경제모델로 출발한 신자유주의는 이제 모든 영역으로 세력을 뻗치며 정상의 기준을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고 신자유주의의 지배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도덕적 권위는 미약하다. 신자유주의적 규범과 가치를 발휘하는 강력한 영향은 권위보다 권력과 훨씬 더 밀접한 관계가 있다.
권위와 권력의 차이는 둘은 분명 다르지만 상호 배타적인지 않다. 모든 형태의 권위는 권력의 양상을 포함하고 있다. 원하는 행동을 강요하려면 권위에 권력이 필요하다. 이때 말하는 권력이란 정당한 권력을 의미한다. 반면 권력은 권위 없이 홀로 가능하다. ‘힘이 정의다’ 또는 ‘부가 정의다’라는 말처럼, 때로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보다 힘이 세기(부유하기) 때문에 그가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
요즘 교사들은 예전만큼 학생들에게 발언권이 없다는 사실은 오늘날 권력과 권위의 문제를 잘 보여주는 사례인 셈이다. 칸트는 아이의 성장과정과 인간의 성장 과정에 공통점이 있다고 보았다. 아이와 같이 인간은 ‘미숙’하며 그 상태에 벗어나야 한다. 그 ‘미성년’상태를 벗어나는 인간은 권위를 획득하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다.
칸트는 절대 권력의 군주가 통치하는 시대가 막 저문 때를 살았다. 군주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은 자동으로 신의 권위에 도전한다고 간주되었으며 당시에 이는 아주 위험한 생각이었다.
17세기부터 서구사회에 민주주의가 서서히 자리 잡으면서 교회와 국가의 분리도 진행되었다. 최근에 있었던 격동은 기억에 생생한 ‘68혁명(1968년 대학생과 좌파가 노동계의 지지를 얻어 1000만명이 일으킨 동맹파업,프랑스)’이다. 당시 권위 개념은 엄격한 가장, 권위적인 학교 선생, 폭력적인경찰, 피노체트 같은 독재자들까지, 권위는 비열함 그 자체이자 파괴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권위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인류가 더 잘 살 수 있고, 공동체가 자발적으로 모두에게 이로운 일들을 할 것이라는 믿음이 생겨났다. 이러한 사상은 계몽주의 철학자 루소는 숲속을 홀로 배회하며 사과를 따 먹고, 토끼를 잡으면서 자기 짝을 만족시키고, 생글생글한 아이들을 많이 키우는 ‘고결한 야만인’개념을 제안했다.
1970년대 생태학자들은 루소의 사상에 기대 ‘문명과 기술은 나쁘며 권위는 독재와 같다‘라며 ’만물의 어머니인 대자연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만물의 어머니. 사람들이 그토록 없애고 싶어 하던 권위가 신화적인 아버지상 그리고 독재적인 가부장과 밀접하게 이어진다는 것이다.
모든 중앙집권적인 권위를 거부한 초창기 무정부주의 세력이 근원적이고 ’자연에 가까운‘ 모계사회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상반된 두 개념은 공생관계를 이룬다. 이른바 아버지 개념은 점점 많은 규칙을 세우는 쪽으로 진화해 시간이 흐를수록 많은 문제를 만들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계속 더 많은 규칙을 세운다.
이 상황이 지속되면 결국 대부분의 일들은 엉망이 되어버린다. 다들 잔뜩 긴장한 채 규칙을 지키는 것에만 신경 쓸 뿐 규칙의 내용에 대해서는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곪았던 문제가 터지면 무게 추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기존의 권위와 규제가 낡은 구식이 되는 것이다. 다시 권위를 필요로 하는 목소리가 대두되기 시작한다.
한 때 심리치료사들은 모든 정신장애의 원인이 지나치게 권위적인 아버지 존재에 기인하였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 아버지들이 제거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정반대로 심지어 몇몇 정신 분석가들은 아버지들을 다시 권위의 자리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선거 기간이 되면 정당이 ‘법과 질서’를 회복하겠다고 공약을 걸면 그 즉시 여론조사도가 올라간다. 놀랍게도 그 공약을 지키는 당은 한 군데도 없지만 말이다. 이런 주장이 상징하는 권위가 언제나 위에서부터 내려온다는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 나 라(우리 조국)의 국부들, 또는 국부를 대신하는 사람들, 우리는 양육되어야 하는 약하고 약한 존재이다.
양육과 권위
요즘 아이들이 예전보다 자기주관이 뚜렷하고 거칠다는 말은 절반만 진실이다. 자녀의 뚜렷한 자기 주관은, 권위자로서 부모 역할을 이행하는 것에 대한 부모의 두려움이 만들어낸 결과다. 부모의 두려움은 분명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지만 잘못 이해된(‘아이들에게도 발언권이 있다.’라는 명제를 따르는) 교육 방침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우리는 요즘 아이들도 여전히 어린아이일 뿐이라는 것, 부모는 자녀를 책임져야 한다는 것, 아이에게 얼마든지 발언권을 주되 최종 결정은 언제나 부모의 몫이어야 한다는 것을 잊고 있다. 아이 양육 과정에 권위를 개입시키면 안 된다는 생각은 큰 오산이다.~
<‘우리는 왜 어른이 되지 못 하는가’에서 극히 일부 요약발췌, 파울 페르하에허 지음, 이승욱님 외2명 옮김, 반비출판>
*파울 페르하에허: 벨기에 헨트 대학교 교수, 임상심리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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