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령
시장 - 각하, 역병이 급속도로 만연하여 구조의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에 이르고 있습니다. 각 지역이 생각보다 훨씬 심하게 전염되어 있으므로 상황을 숨기고 주민들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진상을 알리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고 사료됩니다. 사실 지금 당장 병마는 주로 빈민들이 밀집해 있는 외곽 지역들에서 번져가고 있습니다. 이 점만은 적어도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하겠습니다.
동감이라는 듯 맞장구치는 속삭임 소리가 들린다.
성당에서
신부 - 이리들 가까이 와서 각자 자기가 저지른 사악한 죄를 여러 사람들 앞에서 고백하세요. 저주받은 자들이여. 여러분의 마음속을 열어 보이세요. 각자 자신이 저지른 죄악과 마음속으로 획책했던 죄악을 서로서로 고백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죄의 독기가 숨을 틀어막고, 문어처럼 휘감는 페스트의 마수처럼 여러분을 지옥으로 데리고 갈 것입니다∙∙∙∙나도 먼저 나 자신의 잘못을 뉘우칩니다. 자비심을 베푸는데 있어 인색했던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나이다∙∙∙∙.
일동 - 신이여. 우리가 저지른 일, 또 우리가 저지르지 않을 모든 일을 용서하여주소서.
판사가 가족들에게 둘러싸인 가운데 시편을 읽는다.
판사 - 당신은 평소에도 외출이 너무 잦았소. 그건 우리 집안의 행복에 되지 못했소.
부인 - 빅토리아가 아직 안 들어왔어요. 그 애가 무슨 변이라도 당하지 않을까 걱정이 돼서 그래요.
판사 - 환난의 와중에는 그저 가만히 집 안에 붙어 있는 게 좋아. 모든 것을 다 미리 짐작하고 준비해놓았지. 페스트가 퍼지는 동안 문 꼭 닫고 집 안에 틀어박혀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신의 은총으로 우리는 아무 해도 입지 않을 거야.
부인 - 당신 말이 옳아요. 이 세상엔 우리만 사는 게 아니잖아요. 딴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어요. 어쩌면 빅토리아가 위험한 지경에 빠져 있는지도 모르고요.
판사 - 딴사람들 일은 놔두고 집안 걱정이나 하라고. 가령 아들아이 생각이나 좀 하지 그래 그리고 힘자라는 한 필요한 식량을 모두 구해놓도록 해. 값은 달라는 대로 줘요. 아무튼 힘자라는 대로 긁어모아서 쌓아두는 거야. 지금이야말로 긁어모아 쌓아둘 때란 말이야!(그는 읽는다) “주님은 나의 은신처요. 나의 성채로다....”
빅토리아 - (더 나직한 목소리로) 자. 어서 키스해줘. 목이 말라 죽겠어. 우린 바로 어제 약혼한 몸이란 걸 벌써 잊었어? 나는 밤새도록 기다렸어. 당신이 힘껏 키스해줄 오늘을. 자 어서 빨리, 어서∙∙∙∙.
디에고 - 나를 건드리지 마. 물러나 있어!
빅토리아 - 왜?
디에고 - 난 더 이상 뭔지 모르겠어. 상대가 인간일 때는 한 번도 겁을 먹어본 일이 없어. 그런데 이건 나도 어쩔 수가 없어. 명예 같은 건 아무 소용이 없어. (빅토리아가 또 다가선다) 내 몸에 손대지 마. 어쩌면 나도 이 병에 걸렸을지 몰라. 그렇다면 너 한 테 옮길 가능성이 있어.
조금만 기다려. 숨을 좀 돌리게 해줘. 꼭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숨이 막혀. 저 사람들을 어떻게 안아서 침대에 뉘어야 하는 건지. 그것조차도 모르겠단 말이야. 무서워서 두 손이 이렇게 떨리고 저 사람들이 너무나 가엾어서 눈 뜨고 볼 수가 없어. (외치는 소리들, 신음하는 소리들) 그런데도 저렇게 나를 부르고 있단 말이야. 저 봐, 들리지. 가봐야겠어. 아무튼 너도 몸조심해. 우리 두 사람을 위해서 말이야. 끝나는 날이 올 거야. 반드시!
빅토리아 - 아니 가지 마.
디에고 - 언젠가 반드시 끝날 거야. 난 아직 너무나 젊어. 그리고 너를 너무나 사랑해. 죽음은 끔찍해.
코러스 - “도대체 누가 옳고 누가 그른 것일까? 생각해보라 이 세상 모든 것이 거짓일 뿐 죽음밖에는 아무것도 진실하지 않음을.”
전령1 - 병균에 오염된 모든 가옥은 대문 중앙에 ‘우리는 모두가 형제다’라고 써 붙이고 반경 1피트의 검은 색 별을 그려 표시할 것. 해당 가옥의 폐쇄 명령이 해제되기 전에 별을 지울 경우에는 법에 따라 엄벌에 처함.
법이라니 무슨 법?
목소리 - 물론 새로운 법이지
코러스 - 높은 사람들은 늘 입버릇처럼 우리를 지켜주겠노라고 했지. 그런데 지금은 우리만 외롭게 남았네. 도시의 성문이 열려 있을 때 어서 도망쳐야겠네. 일단 성문이 잠기면 불행의 도가니 속에 갇혀버리겠네.
전령3 - 하오 아홉 시를 기해서 일제히 소등한다. 여하한 개인도 당국의 정식 통행증 없이는 공공의 장소에 머물거나 도로를 통행 할 수 없다. 통행증은 언제나 자의적인 결정에 따라 극소수에게만 발행한다. 이상의 조치에 위반하는 자는 예외 없이 엄벌에 처한다.
군중의 소리 - 대문이 닫힌다.
- 아니, 전부 닫힌 것은 아니다.
코러스 - 아! 아직 열려 있는 문으로 달려가자! 우리는 바다의 아들딸들. 그곳으로 가야 한다. 성벽도 없고 대문도 없는 곳으로. 모래는 입술처럼 신선하고 전망은 눈이 피곤할 만큼 광대한 그 고장으로 가야 한다. 바람을 맞이하러 달려가자! 바다로! 드디어 바다로. 자유의 바다로! 물이 씻어주고 바람이 해방시켜주는 그곳으로!
바다로! 바다로! 바다가 우리를 구해줄 것이다. 질병도 전쟁도 바다에는 손대지 못하네. 숱한 정부가 세워지고 멸망하는 것을 바다는 보았다네! 바다는 오직 붉게 타오르는 아침빛과 초록으로 저물어가는 저녁 빛을 보여주고, 저녁에서 아침까지 별들이 쏟아지는 밤 동안 그칠 줄 모르고 철썩이는 파도 소리를 들려줄 뿐!
오, 고독이여, 사막이여, 소금의 세레여! 바다 앞에, 바람을 받으며 태양을 마주보고 서보자. 묘지처럼 굳게 닫힌 저 도시들로부터, 공포에 빗장 질린 저 인간들의 얼굴로부터 마침내 해방되도다! 어서 가자! 어서 가자! 인간과 그의 공포에서 누가 나를 구해주랴? ~ 누가 나에게 들려주려나, 망각의 바다를, 난바다의 저 고요한 물을, 굽이굽이 흐르는 강길, 숨어버린 그 물살의 행로를? 바다로! 바다로! 성문이 닫히기 전에 바다로!
목소리 - 아, 위대하고 무서운 신이시여!
목소리 - 자, 빨리! 필요한 것만 가지고 가, 매트리스와 새장을 ! 개 목걸이를 잊지 말아! 시원한 박하 항아리도 잊지 말아! 바다로 가는 동안 그걸 씹어야지!
목소리 _ 감춰, 그건 감추라니까! 우리가 먹을 식량을 감춰!
목소리 _ 빵 좀 줘, 있는 돈 전부를 줄 테니 빵 한 조각만!
제5의 성문이 닫힌다.
코러스 - 자, 빨리 열린 성문은 하나뿐이다! 재난은 우리보다 걸음이 빠르다네. 재난은 바다를 싫어하네. 우리가 바다로 가는 것을 원치 않는다네. 밤은 고요하고 돛대 저 위로 별들이 흘러가네. 페스트는 우리를 제 밑에 두고 싶어 한다네. 페스트도 우리의 행복을 바라지만, 그것은 우리가 원하는 행복이 아니라 페스트가 원하는 행복인 거야.
목소리 - 신부님. 우리를 버리고 가지 마세요. 우리는 신부님의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신부가 도망간다.
가난뱅이 - 신부님이 도망간다! 신부님이 도망간다! 제발 제 옆에 있어주세요! 저를 보살펴주는 것이 신부님의 일이 아닌가요! 저는 신부님을 잃으면 마지막입니다!
전령5 - 공기를 통한 일체의 전염을 피하기 위하여, 말하는 것 자체도 감염의 수단이 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시민 각자는 초를 먹인 솜을 항상 입속에 물고 다닐 것을 명령한다. 이 조치는 질병을 예방할 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분별 있는 언동과 침묵을 유도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코러스 - 아, 비참하도다! 비참하도다! 우리만이 페스트와 함께 외롭게 남았으니! 마지막 성문도 닫혀버렸네!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네. 이제 바다는 너무 멀어졌다네. 이제 우리는 고통 속에 잠기고 나무도 물도 없는 이 좁은 마을 안에서 맴돌 수밖에 없구나.
우리가 지은 죄보다 우리가 받는 고난이 너무 가혹하구나. 이 같은 감옥살이 할 만큼 죄지은 기억이 없으니! 우리의 마음은 순결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세계와 여름을 사랑하였네. 그것만으로도 구원받을 만하지 않은가!
이제 바람은 그쳤고 하늘은 텅 비었구나! 우리는 오래오래 입 다물고 살아가야겠네. 그러나 공포의 재갈이 우리의 입을 틀어막기 전에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사막 한복판에서 외치리라.
디에고 - 나를 좀 데려다 주게
뱃사공 - 어디로요?
디에고 - 바다로, 그 배가 있는 곳으로.
뱃사공 - 그건 금지되어 있는뎁쇼.
디에고 - 우리의 몸에서 살을 깎아내는 것도 페스트요. 사랑하는 연인들을 갈라놓고 빛나는 날들의 꽃을 시들게 하는 것도 페스트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먼저 페스트와 싸워야지!
누가 절망을 말하는가? 절망은 재갈이다. 포위당한 이 도시의 침묵을 찢는 것은 오직 희망의 천둥소리, 행복의 번갯불이니. 자. 일어서라! 빵과 희망을 지키려거든 증명서 따위는 찢어버려라. 공포의 행렬에서 벗어나 온 하늘에 메아리치도록 자유를 외쳐라!
코러스 - 우리보다 더 가난한 자 어디 있더냐! 희망은 우리의 유일한 자산, 어찌 희망 없이 살아가리오? 형제여, 우리는 모두 이 재갈을 벗어던지자! (해방의 함성) 아, 메마른 대지 위에, 더위로 갈라진 균열 사이로 이제야 처음으로 단비가 내리네! 모든 것 푸르게 되살아나는 가을, 바다에서 신선한 바람이 돌아오네. 희망이 파도처럼 우리를 밀어 올리누나.
페스트 - 저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하는군.
여비서 - 네, 늘 하는 짓인 걸요!
페스트 - 그렇다면 좀 더 엄하게 다루어야겠는걸!
페스트 - 조용히 해! 나한테 걸리면 술은 초가 되고 과일은 시들어버려. 열매가 달리려고 할 때 포도 넝쿨이 말라 죽고, 말라서 불쏘시개로 쓸 만해지면 다시 푸르게 되살아나지. 부자도 못 되면서 자유롭다고 우쭐대는 놈들의 나라가 나는 싫어. 감옥도, 사형집행인도, 권력도, 내 손안에 있는 거야! 이 도시를 싹 쓸어서 없애버릴 거야.
나다 - 내 관공서들 역시 계속 돌아가지. 도시가 무너지고 하늘이 폭발하고 인간들이 이 지상에서 모습을 감추어도 관공서는 여전히 정각에 문을 열고 허무의 세계를 관리할 것이다!
디에고 - 아아, 이렇게 된다면 차라리 죽이든가 죽든가 해야겠구나! 찬란하고 의기양양하고 야성적인 이여. 내게 얼굴 좀 돌려봐! 돌아와 줘, 빅토리아! 내가 쫓아갈 수 없는 저 세상으로 가버리지 말아다오! 내 곁을 떠나지 마, 흙 속은 차가워. 오 내 사랑. 오 내 사랑!
페스트 - 사람 하나 죽이는 것, 그건 속 시원한 맛은 있지만 실속은 없어. 가장 이상적인 것은 선택된 소수의 죽음을 통해서 다수의 노예들을 손에 넣는 것. 바로 그거야. 오늘에야 비로소 그 기술이 완성단계에 이르렀지. 바로 그 덕분에 우리는 필요한 만큼의 인간을 죽이고 욕보인 다음에 민중 전체를 무릎 굻게 만들게 되는 거야. 그 어떤 위대함도 우리를 거역하지 못해.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이기게 되는 거야.
나다 - 예전에 있었던 자들, 화석이 된 자들, 무사태평한 자들, 안락만 일삼는 자들, 궁지에 몰린 자들, 꼼꼼한 자들, 자기 불행을 외쳐대는 자들의 입을 막는 대신 놈들은 자신의 귀를 막는구나. 지금까지 우리는 벙어리였는데 이제부터는 귀머거리가 되려하네(군악 연주) 주의하라! 역사를 쓰는 자들이 돌아온다.
나다는 방파제 쪽으로 달려가 바다에 몸을 던진다.
어부가 뒤를 쫓아왔다.
어부 - 거짓말밖에 모르는 저 입도 소금이 가득차면 드디어 다물어지겠지. 보라! 성난 바다는 아네모네 빛, 바다가 우리를 보복하네. 바다의 노여움은 우리의 노여움. 바다는 소리친다. 모든 사람들이 한데 뭉쳐서 고독한 자들 한 덩어리가 되라고. 오 파도여, 오 바다여. 반항하여 일어서는 자들의 조국이여. 굴복을 모르는 그대의 백성들이 여기 있다. 쓰디쓴 소금물이 절여져 깊은 바다에서 솟구치는 거대한 파도가 그대들의 끔찍한 도시들을 단숨에 쓸어 가리라.~~
< 알베르 카뮈 전집 ‘계엄령’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김화영님 옮김, 책세상출판>
* <<계엄령>>은 1948년 10월 27일 ‘마들렌 르노-장 루이 바로 극단’ 에 의해 마리니 극장에서 처음으로 공연되었다. 1941년, 장 루이 바로는 페스트라는 신화와 관련된 공연물을 무대에 올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카뮈 역시 같은 주제의 소설을 발표하려 한다는 말을 듣게 된 그는 자신의 초안을 토대로 다이얼로그를 써줄 수 있겠느냐고 제안해왔다.
그런데 카뮈는 다른 생각이 있었다. 1948년의 모든 관객들이 이해 할 수 있는 어떤 신화를 상상해보자는 것이었다. <<계엄령>>은 이와 같은 시도의 구현인데, 카뮈 소설 페스트를 각색한 것이 아니며 전통적인 연극이 아니라 하나의 스펙터클(공연물)이다. 카뮈가 모든 텍스트를 썼지만 장 루이 바로에게 큰 힘을 받았음을 명시하였다.
**페스트는 1347년 유럽에 전파되어 유럽인구의 1/5로 줄어들게 한 공포의 급성 감염 병 이었다. 오늘날 코로나보다 더 강한 역병을 겪은 당시의 참상을 작가는 리얼하게 구성하여 우리들에게 공연물 시나리오를 펼쳐 보였다. 마스크 대신 초를 먹인 솜을 쓰고 다닌 갑갑함과 의료시설이 거의 없고 백신마저 없던 그 시절을 그려보면서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다소나마 위안이 되었으면 한다.<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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