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자료

오지에서의 삶 - 마리아 샵들렌

[중산] 2021. 6. 10. 07:02

농부들은 사랑의 슬픔으로 죽지 않고, 평생 그 슬픔을 표시하며 비극적으로 살지도 않는다. 그들은 자연에 아주 가깝다. 그래서 중요한 사물들의 본질적인 서열을 아주 분명하게 지각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그들은 고귀하고 비장한 표현을 피하고, ‘사랑’ 대신에 ‘우정’을, ‘고통` 대신에 ‘갑갑함’이란 말을 기꺼이 쓰는 것 같다. 매일의 노동, 수확, 미래의 안락함과 관계된 보다 진지한 중요성을 지닌 다른 걱정거리들을 옆에 두고 살면서, 마음의 아픔과 기쁨에 대한 그 말들의 상대적인 크기를 간직하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다.

 

이 땅의 한구석이 장애물 하나 없이 기막히게 정지(整地) 되어서 마침내 경작할 수 있다는 생각이 그녀(샵들렌)의 머릿속에 스며들자, 그녀는 일종의 도취 상태에 빠졌다. 그녀가 깨달았던 그대로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찬양했다.

 

그것(이 세상의 아름다움)은 도회지 사람들, 불모의 높은 산, 험난한 바다에 경악하여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인간미가 없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풍요로운 대지의 농촌이 지닌 평온하고 참된 아름다움이었다. 아름다움이라곤 그저 나란히 길게 뻗어 있는 밭고랑의 질서와 완만히 흐르는 하천뿐인 보잘 것 없는 농촌, 신부는 놔둔 채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태양과의 입맞춤에 몸을 던진 그런 농촌의 아름다움이었다.

 

샵들렌 부인이 말했다. “건강을 누리고 빚 없이 사는 농부의 삶보다 더 아름다운 삶은 없어. 자유롭지. 보스도 없지. 자기 가축들이 있지. 일을 하는 것은 자기를 위해서 하는 거잖아... 아! 이 얼마나 아름다워!”

 

로렌조가 반박했다. ‘자유롭죠. 한데 주인님이 있어요. 농사꾼보다 자유롭지 못한 사람은 없습니다. 성공한 사람들, 농지에 필요한 모든 걸 다 갖춘 사람들, 남들보다 더 운이 좋은 사람들에 대해서 말씀 하실 때 이렇게 표현하시죠. “아! 그들은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어요. 생활이 넉넉하고요. 가축도 꽤 많이 있고.”

 

그렇게 말씀하셔야 할 일이 아닙니다. 진실은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 그들의 가축이라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세상에는 좋아하는 가축만한 보스가 없지요. 거의 매일 그 가축들은 당신들에게 고통을 안겨주거나 피해를 주지요. 

 

점심을 먹으러 집으로 돌아와서 잠깐 쉽니다. 식탁에 앉기도 전에 아이가 이렇게 소리칩니다. “소들이 울타리를 넘어갔어요.” 혹은 “양들이 곡식을 먹어 치우고 있어요.” 그러면 다들 일어나 뛰어 갑니다.

 

아주 어렵사리 키웠더니 이 형편없는 미친 동물들이 쓸어버린 귀리나 보리를 생각하면서 말이죠. 남자들은 질주합니다. 몽둥이를 휘두르며 숨을 헐떡입니다. 여자들은 마당으로 나가 소리를 지릅니다. 소나 양들을 다시 가두고, 울타리 말뚝을 올려 세운 뒤, 녹초가 되어 들어오면, 식은 데다가 파리가 그득한 완두콩 수프와 식탁 아래로 떨어져 개와 고양이들이 갉아먹고 있는 돼지비계를 보게 됩니다. 그러면 모두 허겁지겁 아무거나 먹는 겁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키우는 동물들이 시종입니다. 여러분은 이 동물들을 보살피고 씻깁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의 음식물 찌꺼기를 주워 담듯이 여러분은 이것들의 오물을 수거합니다. 땅은 척박하고 여름은 너무 짧기 때문에, 일을 해서 이것들을 먹고 살게 하는 것은 여러분입니다.

 

매사 이런 식입니다. 여러분은 이것들 없이 살 수 없으니까요. 가축 없이는, 모두 이 땅에서 살 수가 없는 겁니다. 겨울은 아무런 수확도 내지 못하고 한 해 중 일곱 달을 잡아먹습니다. 건기와 우기는 늘 때를 잘못 찾아오고....도시에서는 이런 사태를 비웃습니다. 극심한 추위, 척박한 길, 모든 것에서 멀리 떨어진 채 즐거움도 없이 외진 곳에서 사는 것, 이건 비참함이며, 처음부터 끝까지 비참함입니다.

 

7월이 되자 꼴이 익기 시작했다. 8월 중순이 되면, 그 더미들을 자르고 창고에 쌓아 두기 위해서 건기만 기다리면 되었다. 북서풍이 3일 내내 세차게 계속해서 불어, 비가 오지 않는 시기를 보장했다. 다섯 명의 남자들은 풀을 베고 곧바로 잘린 목초를 쌓아 올렸다.

 

신께서는 결국 관대함을 보여 주셨다. 북서풍이 3일 내내 세차게 불어, 비가 오지 않는 시기를 보장했다. 닷새동안 계속해서 그들은 여유롭게 크게 몸을 움직이며 하루 종일 좌우로 낫질을 했다. 능숙하게 풀을 베는 사람에게는 아주 쉬워 보이는 몸동작이지만, 배우기에는 무지하게 어렵고 땅일 중에는 가장 힘겨운 일이었다. 

 

파리와 모기떼들이 무수히 많은 목초 더미에서 쏟아져 나와 그들을 물려고 끈질기게 들러붙었다. 작열하는 태양은 이 사내들의 목덜미를 달구었고, 그들의 땀방울이 그들의 두 눈을 뜨겁게 밝혔다.

 

닷새 만에 목초를 다 베었다. 그리고 건기가 지속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엿샛날 아침, 저녁이 되기 전에 곳간에 쌓아 두려고 했던 목초 더미들을 펼치고 뒤섞기 시작했다. 낫질은 끝이 났고, 쇠스랑 작업을 할 차례였다. 쇠스랑으로 목초더미를 무너뜨리고, 햇볕에 펼쳐 놓았다. 그리고 나서 오후가 끝날 무렵 목초가 말랐을 때, 쇠스랑으로 큰 더미로 만들어서 다시 쌓아 올렸다. 

 

빵을 굽는 저녁이면, 먼저 화덕에 고무삼나무 나뭇가지를 넣고 불을 피웠다. 그다음으로 열을 내는 굵은 낙엽송 장작을 태웠다. 화덕이 달구어졌을 때, 마리아는 거기에 반죽이 가득한 빵틀을 넣었다. 한창 빵이 구워지고 있는 가운데 빵들의 위치를 바꿔 주기만 하면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빵이 다 구워져서 잠을 잘 수 있기를 계속해서 인내심을 가지고 바랐다. 매주 긴밤을 새우는 일은 그녀에게 즐겁고 감미로웠다. 그녀가 상상하는 행복한 것들의 파노라마를 전혀 방해받지 않은 채, 그와 그녀 자신만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행복한 것들은 아주 단순했다. 전혀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등은 항상 굽어 있어 피곤한 상태였기 때문에, 저녁 무렵이면 아픔으로 찡그려야 비로소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먹는 시간마저 줄이고, 유리한 이 날씨에 행복해하고 감사하면서, 새벽부터 밤까지 단 1초도 낭비하지 않고 일했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모기떼가 불타는 오후의 대기 속에서 맴돌았다. 이것들을 떨쳐내기 위해서 매번 몸짓을 해야만 했다. 모기떼는 어마어마한 곡선을 그리더니 이내 돌아와서는 가차 없이 반사적으로 오로지 피를 빨아먹기 위한 한 치의 공간을 찾는 데 혈안이 되었다.

 

이것들의 찢어질 듯한 음악 소리에 끔찍한 검은 파리들의 윙윙거리는 소리가 뒤섞였다. 이 모든 것들이 끝없는 굉음처럼 숲을 가득 메웠다. 다람쥐 한 마리가 죽은 자작나무 몸통에서 내려와 잠시 동안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더니 위험을 무릅쓰고 땅으로 내려왔다.

 

밤 7시경이 되어 의사가 도착했다. 가방을 탁자 위에 놓고 투덜대면서 외투를 벗기 시작했다. “길이 이러면 말이죠” 그가 말했다. “환자들을 보러 오는 것이 작은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당신들을 보아하니, 갈 수 있는 한 가장 멀리에 있는 숲 속에 숨어 살러 오셨나 봐요. 젠장! 누가 와서 돕지 않으면 당신들 모두 다 죽을 겁니다.”

 

폭풍이 일었고 창문이 돌풍에 흔들리는 것처럼 잡 안의 내벽을 흔들었다. 북서풍이 어두운 숲의 꼭대기 위를 노호하면서 불어왔다. 집, 외양간, 헛간 등의 작은 목재 건축물 공간 위를 북서풍이 덮치더니 난폭하고 심술궂게 소용돌이쳤다.

 

<‘마리아 샵들렌’에서 극히 일부 발췌, 루이 에몽지음, 정상현님옮김, 지식을 만드는지식출판>

[해 설] 땅을 사랑하고 그 땅을 딛고 일어선 이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에게 삶이라는 것은 언제나 무미건조하고 단순하지만, 이 단조로운 삶 너머에는 결코 단순하지 않은 의미가 숨어 있다. 이들이 부부가 되어 처음으로 개간을 해야 할 땅을 가졌을 때 “옥토를 가질 날”이 오리라는 희망이 그들로 하여금 고된 노동을 잊게 해주었다.

 

샵들렌 씨의 개척자 정신은 이 부부를 늘 가난 속으로 몰아넣었다. 가난은 늘 출발점이었지만 “숲 한복판에서 윤택한 재산”을 만든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그들은 항상 행복했다. 이 행복은 이 종족의 무한한 인내심의 결과였다. 19세기 중엽부터 퀘백은 영국과 미국의 자본주의의 영향을 받아 급격한 상업구조의 개편을 겪는다. 생장호 주변은 개척자들의 선호도가 높은 편이다. 샵들렌 씨와 그 가족이 개척하는 곳이 비로 이 생장호 주변이다. 

 

샵들레 부인은 이 유랑민들과 망명자들에 ‘대항’하는 유일한 인물로 등장한다. 이 노동은 생존을 위해 자연과 벌이는 싸움이다. 자연이 이 고장에 준 광활하고 황량한 숲을 옥토로 바꾸어야만 하고 척박한 기후 조건을 견뎌야만 한다.

 

그들은 찰나와도 같은 봄, 태양이 작열하는 짧은 여름, 길게만 느껴지는 “혹독한 겨울, 추위, 눈“을 알리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가을을 살고, ”땅을 가지기 위해서 숲과 싸워야“ 하고, ”살려면 죄다 줄여 쓰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해야“하고, ”다른 집들은 멀리 떨어져 있으니 모든 걸 제 힘으로 해야만“ 한다.

 

”가차 없고 온화함이라고는 찾아 볼수 없는 이 지역“에서 ‘하지만 죽으라 하고 일만 하는”그들에게 땅을 일구며 사는 아름다움이다. 이 아름다움은 자연의 법칙에 순응한 인간이 자신의 정신적, 육체적 안락을 지불하고 그 자연의 세계를 확보했을 때 맛보는 편안한 행복감이다.

 

노동자들의 관점에서, 편안히 산다는 것은, “새벽부터 밤까지 자기 등골 쏙 빠지도록 사지를 써서 혹독하게 일을 해야”할 때 이해가 가능한 것이다. 이 편안함의 역설을 끌어안는 것은 바로 “이 말뜻을 가장 잘 아는 대지의 인간” 샵들렌씨의 열정이다.

*루이 에몽 (1880~1913) 프랑스 생. 소르본에서 법학 전공. 장편, 단편소설 집필. 1911년 10월 퀘백 시에 발을 디딘 에몽은 몬트리올을 거쳐 12월 이 작품의 배경을 이루는 생장(Saint-jean)호수와 그 주변을 여행한다. 유럽에 캐나다를 알리기 위해 글을 씀. 20세기 초 개척자인 가난한 농부들과 퀘백 시를 신화적으로 환기시켰다는 의미에서, 프랑스계 캐나다의 상징적인 작가라는 타이틀을 안겨 준다.

 

** 이 책을 통해서 논밭을 일궈서 생계에 매달리며 살아가는 농촌생활을 그나마 간접적으로 체험 할 수 있으리라 본다. 나이 들어 농촌생활을 꿈꾸는 사람들은 한 번쯤 읽어 볼 것을 권하고 싶다. 은퇴 후 무료함을 달래고 보람을 찾기 위한 취미 농의 전원생활이 아니라면 생계형 농촌생활은 신체적 강도가 거세다는 것을 사전에 충분히 인지 할 필요성이 있다. 그래야만 중도에 짐을 싸서 다시 되 돌아오는 불상사를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중산>

 

울주군 웅촌면 석천마을 
석천마을 학성이씨 이재락 선생 고택
울주군 석계서원
석계정사
석계천
회야강 상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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