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딜러드가 <<작가살이>>(1989)라는 저서에서, 딜러드 동료 작가가 학생의 질문을 받는다. “제가 작자가 될 수 있을까요?” 작가는 반문한다. “글쎄요, 문장을 좋아하나요?” 동료 작가가 학생에게 던진 질문은 “문장을 좋아하는 일이야말로 작가 생활의 출발 점”이라는 의미였다.
딜러드 화가 친구에게 어쩌다 화가가 되었느냐고 물었다. 대답은 간단했다. “물감 냄새가 참 좋아.” 위대한 소설 혹은 걸작을 거창하게 구상하는 것만이 작가나 화가로의 출발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림이나 글의 도구에 대한 느낌이 그 시작이 된다. 그림의 도구는 물감, 글의 도구는 문장이다.
문장을 음미하는 능력과 빚어내는 능력은 따로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 나란히 습득되는 능력들이다. 기억에 남는 문장을 만드는 요소 - 조정, 종속, 암시, 압축, 병렬, 두운법(리듬감 형성) 등의 기법-를 습득한다면 문장을 판별하는 법을 알게 될 것이다.
종속 형식의 문장
종속 형식은 문장의 요소들을 인과(특정 사건이나 상태가 다른 사건이나 상태로 인해 일어난 것), 시간성(특정 사건과 상태가 다른 사건과 상태보다 먼저 혹은 나중에 발생하는 것), 그리고 우위(사건과 상태가 중요성의 순서로 배열되는 것)의 관계로 배열한다.
‘짐꾼의 아내(그녀는 초인종 소리를 듣고 손님을 맞으러 나가곤 했다)가 “신사 한 분과 귀부인 한 분입니다, 선생님”이라고 알렸을 때, 나는 종종 그 시절 그랬듯, 뭐 원하다 보면 생각이 드는 법이니까, 모델이 곧 생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 헨리 제임스의 단편 소설 <<진짜>>(1892)에 나오는 첫 문장이다.
☞위문장은 사건과 독자가 직접 접촉하게 하지 않고, 생각들을 층위별로 끼워 넣음으로써 사건을 걸러준다. 이 문장에는 과거 사건의 틀(‘나는 모델이 곧 생길 것같다는 생각을 했다’가 생각의 첫 번째 층위다.) ‘원하다 보면 생각이 드는 법이니까’ 문장 사이에 삽입된 이 격언의 역할은 문장을 지연시키는 것이다.
병렬 형식의 문장
'강바닥에는 자갈과 바위가 있었다. 햇볕에 말라 허예진 돌들, 그리 맑고 빠르게 흐르는 물, 물길은 군데군데 푸른색이었다.' - 헤밍웨이의 소설<<무기여 잘 있거라>>(1929) 두 번째 문장에서.
☞이 문장은 ‘그리고’를 사이에 두고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절반은 자갈과 돌이, 나머지 반은 물이 장악하고 있다. 두 부분 사이의 관계는 명시적으로 표명되지 않는다. 이들은 서로의 옆에 놓였으며 ‘그리고’라는 접속사로 이어진다. 접속사의 역할은 지극히 미미하다.
‘햇볕에 말라 허예진’이라는 표현은 엄밀히 말해 형용사지만, 수식하는 성질보다는 명사(‘건조함’과 ‘흰색’)에 가깝다. 후반부에 나오는 물은 이 문체의 주장을 은폐한다.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겠다는 주장. 문장 역시 물처럼 ‘맑고 빠르게 흐른다.’ 멈추거나 방향을 바꾸지 않고 무언가를 수식하는 일도 없다. 요컨대 이 ‘간단한’ 문장은 스스로 펼쳐놓는 우화인 셈이다.(사실 우화는 가장 복잡한 문학 형식 중 하나다.)
병렬 형식으로 글을 쓰는 일이 질서 없이 이것저것 나열하면 되는 듯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런 형식의 글은 능숙해지기가 더 어렵다. 형식 제약이 비교적 적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무엇을 해야 할지 규칙이나 방안이 전혀 없다는 뜻이기도 때문이다.
‘집 앞 진입로로 살며시 떨어지는 벚꽃 잎, 옛 장서의 고요한 향기,
크리스마스 시즌 눈 결정이 송송 맺힌 창유리에 반짝이는 난로 불빛,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다섯만이 이 울타리 친 정원을 오고 간다. 영원히.’
- 타나 프렌치 작가가 쓴 수준 높은 스릴러 소설 <<닮음>>(2007)의 병렬 형식이다. 소설 속 주인공인 화자는 동거인 네 명과 산다. 이들 사이의 정서적 유대감은 매우 강하다. 그녀는 동거인들과의 생활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현재진행형(‘떨어지는’, ‘반짝이는’, ‘오고 간다’)에 의해 움직임을 부여받은 구절들이 이어져 동적이면서도 고요한 풍광을 만들어 낸다. 절반 정도 읽다 보면, 문장은 자기 형식이 실행해온 메시지에 명시적 논평을 가한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그런 다음 “영원히‘ 끝나지 않는 느낌을 주는 단어로 마무리한다. ’영원히‘라는 단어는 문장과 화자의 이룰 수 없는 열망을 명명한다. 탁월하다. 편안하고 만족스러운 휴식 장면을 상상하라.
풍자 형식의 문장
‘지난주에 어떤 여자를 보았다. 살가죽이 벗겨진 여자, 여러분은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그 탓에 그 사람이 얼마나 더 나빠졌는지.’
- 이 유명한 문장은 <<통 이야기>>(1704)의 9장에 나온다. 이 문장 앞에는 다음과 같은 작가의 주장이 있다. “육신을 지닌 존재의 대부분은 내가 본 바에 따르면 겉이 속보다 훨씬 더 낫다”라는 문장이다.
☞ 살가죽이 벗겨진 여자에 대한 문장은 ‘거죽이 속보다 더 낫다’라는 문장의 증거로 제시된 것이다. ‘지난주에 어떤 여자를 보았다‘라는 문장은 아주 익숙하다. 첫 타자는 ’살가죽이 벗겨진 여자’라는 충격적인 표현이다. 이 말 때문에 ‘지난주에 어떤 여자를 보았다‘라는 진부한 표현은 파괴까지는 아니어도 충분히 흐트러진다.
그러나 이 교란을 표명하는 것은 화자가 아니다. 화자는 ‘여러분은 믿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이 당혹감을 태연하게 독자에게 떠넘긴다. 독자의 어깨에 천연덕스럽게 팔을 두르고는 독자가 당연히 자신과 똑 같은 눈으로 대상을 보는 것 아니냐고 우기는 격이다.
독자와 화자 모두, 보면서도 도저히 믿을 수 없어 하는 것은 가죽이 벗겨져 나쁘게 변해버린 ‘사람’이다. 이 예리한 외과적 해부에 대한 무표정한 임상적 반응의 효과는 ‘사람’이라는 단어의 이중성에 기대고 있다.
여기서 ‘사람’은 누군가의 몸을 가리킬 수도 있고 아니면 누군가가 지닌 내면의 자질을 가리킬 수도 있다. 화자에게는 내면과 외면 사이의 괴리가 없다. ‘사람’은 누군가의 표현일 뿐이며, 그 표면을 제거하고 또 제거해도 계속해서 괜찮은 표면이 나오면 그뿐인 것이다.
좋은 문장이란?
내용 전달, 즉 생각과 감정을 효율적이면서도 황홀하게 전달하는 일이야말로 문장이 도달해야 할 최종 목적지다. 글을 쓰는 목적은 포괄성, 즉 말로 가능한 모든 것을 어느 누구도 다른 말을 할 수 없을 정도까지 말하는 데에 있지 않다.
스트렁크와 화이트의 <<글쓰기의 요소>>같은 책에 나오는 처방전 격의 조언-문장을 짧게 쓰라, 직설적으로 쓰라, 자신을 전면에 내세우지 말라. 비유는 가능한 한 적게 쓰라 - 이 일부 목적에만 유용할 뿐 다른 목적에는 아무런 효용도 없는 불행한 조언에 불과한 이유다.
문장을 쓸 때 해야 할 첫 질문은 바로 이거다. ‘나는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답은 수도 없이 많다. 수많은 대답 중 하나는 ‘있는 그대로 말하거나 쓰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언어는 현실을 형성한다. 문장을 고칠 때 어떤 일을 하는지 떠올려보자. 뭔가를 보태고, 빼고, 시제를 바꾸고, 절과 구를 재배열한다. 변화를 줄 때마다 독자에게 제공하는 ‘현실’도 바뀐다. 그런 것이 목적이라면 문장은 끝이 나지 않을 테니까. 현재 당면한 목적에 부합하는 관심사 순서대로 관점이나 강조점을 힘있게 전달하는 것이 목표다.
글쓰기 기술이란 글을 쓰는 여러분이 바라는 효과를 산출하게 될 형식이라는 자원을 발굴하는 일이다. 에드거 앨런 포에 따르면 글쓰기에 돌입하는 모든 작가의 머릿속 최전선에 자리 잡아야 하는 내용은 이렇다.
‘마음이나 머리, (더 포괄적으로는) 영혼이 허락하는 수많은 효과나 인상 중에서 지금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글쓰기의 철학>>(1846) 요약하자면 발휘하고 싶은 효과를 고르고,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파악한 다음, 그것을 실행할 방법을 알아내라는 것이다.
<‘문장의 일’지적 글쓰기를 시작하는 사람에게, 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스탠리 피시 지음, 오수원님 옮김, 윌북출판>
* 스탠리 피시(1938년~) : 미국의 대표적 문학이론가이며 법률학자이며 작가다. 예일대 박사, 일리노이대 명예학장, 플로리다 법학교수를 거쳐 현재 예시바대학의 교수로 재직 중이다. <<실락원>>의 작가인 존 밀턴 연구의 대가이다.
현대시의 역사
현대시의 역사를 살핀다는 것은 즉, ‘낯설게 하기’의 역사를 살피는 것을 의미한다. ‘낯설게 하기’를 대하는 태도에도 여러 종류가 있어요. 우리가 일제 강점기를 벗어난 것이 1945년이죠? 이때부터 한국전쟁 이전까지를 해방공간이라고 합니다.
이 시기의 갈등이 전쟁으로 비화되고 나서 남한이나 북한, 혹은 대한민국이나 조선의 문학이 시작되죠. 그래서 우리가 아는 한국문학은 전후세대의 문학으로 시작되는 것이나 다름없어요.
참혹한 전쟁을 겪은 세대가 자칭 전후세대라 말하며 가장 애용했던 용어가 ‘역사의 영점’, ‘폐허’와 같은 ‘자기 비우기’ 에 속하는 말들이에요. ‘자기 비우기’ 때문에 생겨 난 철학이 바로 실존주의에요.
현대시, 그 공룡의 뼈대
일반적으로 현대시는 공룡처럼 덩치가 커서 그 특성을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시 공부를 하는 사람들조차도 현대시는 도대체가 알아들을 수가 없다고 불평을 해요.
현대시에 내장된 공통의 뼈대가 두 가지인데, 하나는 ‘불협화’, 또 다른 하나는 ‘비규범성’이에요. 말이 좀 어렵죠? 그래서 후고 프리드리히도 이렇게 말문을 엽니다.
20세기의 유럽시로 통하는 안락한 길은 어디에도 없다. 여기서 ‘현대시’라는 낱말을 지목하는 대상은 “후기 릴케와 트라클에서 고트프리트 벤에 이르는 독일 시인들, 아폴리네르에서 생-종 페르스에 이르는 프랑스 시인들, 가르시아 로르카에서 기옌에 이르는 스페인 시인들, 팔라체스카에서 문가레티에 이르는 이탈리아 시인들, 예이츠에서 엘리엇까지의 영국 시인들”을 가리킵니다.
20세기의 유수한 거장들이 쓴 시는 왜 이해하기 힘들까요? 그것은 수수께끼와 모호함으로 말하기 때문이에요. ‘수수께끼’와 ‘모호함’으로 가득찬 언어는 당연히 전달력이 떨어지고 쓸모가 없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현대시는 놀라울 만큼 생산적입니다. 그 이유를 후고 프리드리히는 ‘이해할 수 없지만 매혹’이 발생한다는 데 두고 있어요.
바로 이 ‘낯설게 하기 효과’가 결국에는 소통이 잘 되는 쪽이 오히려 소통이 안 되는 쪽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상황이 20세기의 시가 처한 상황이에요.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오면서 안락하지 않고 수수께끼와 모호함으로 가득 찬 불편한 언어들이 놀랄 만큼 생산적이게 되는 현상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이성적인 언어질서를 벗어난 시가 오히려 논리 정연한 말들을 각성시키는 반역을 일으켜요.
'이성‘ ’과학‘ 이런 것들이 사실은 진위를 식별하는 사유 형식의 하나일 뿐인데 거기에 절대적인 권위가 부여되다 보니 존재의 진실을 판단할 때 자꾸 모순이 생기는 것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시를 쓰는 사람들이 이성을 절대화시키는 체제를 상대로 필사적으로 저항합니다.
저자거리의 뒷골목에서 은밀히 작동되는 감성의 영토에서는 욕망이나 본능, 감각적인 것, 원초적인 것 음산한 것들이 넘쳐나요. 그래서 거대한 감정의 해방구, 칠정의 카니발이 춤추지만 진정함이 있어요. 바로 그곳에 현대시가 자리를 잡고 개인의 내면에서 들끓는 언어의 광란과 과인과 함성 속을 소용돌이치게 돼요.
그 양상을 후고 프리드리히는 이렇게 지적합니다.
‘시의 모호함이 독자를 혼란시키는 만큼이나 매혹시키며, 갈피를 못 잡긴 하지만 그 말의 마법과 신비스러움에 강제적으로 끌려든다. 그러므로 불협화적인 긴장은 현대예술 일반의 목표가 되었다.’
‘불협화’에 대하여
후고 프리드리히가 ‘불협화’에서 설명한 ‘말의 마법과 신비스러움’에 강제적으로 끌려드는 사례는 현대시 일반에 꽤 광범하게 퍼져 있습니다. 유럽 현대시에서는 그런 현상이 더욱 두드려져서 매혹의 효과가 더욱 극대화 돼요. 후고 프리드리히는 말합니다.
‘시의 모호함은 고의적인 것이다. 보들레르는 그 점을 이미 간파하고 “이해 되지 않는다는 것에는 그 어떤 명예가 있다”고 말했다. ‘시를 이해하려는 자에게는 무엇보다도 현대시를 감싸고 있는 모호함에 자신의 눈을 익숙케 하라는 충고 이외에 달리 해줄 말이 없다.’
마치 ‘알아볼 수 없으니까 시다. 알아볼 수 있으면 ’과학‘이나 ’윤리‘라 해야 되지 않겠느냐“하고 말하는 것 같지 않아요? 후고 프리드리히는 ’불가해함‘과 ’매혹‘의 만남을 ’불협화‘라 명명하고 ’불협화‘가 안정보다는 불안정을 향하는 긴장을 야기한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시는 이성이 도달할 수 없는 영역에 암시적으로 작용하면서 아울러 개념의 비밀스런 영역을 떨림 속에서 드러나게 하는 절대적인 힘들의 긴장의 직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다채로운 의미의 빛을 내는 자족한 형상체가 되고자 한다.’ 후고 프리드리히의 말이다.
‘비규범성‘에 대하여
관습적 사유에 대한 저항, 그것을 ‘낯설게 하기’라는 말로 설명한다. 후고 프리드리히는 이렇게 말해요.
현대시는 소통의 익숙함을 기피하기 위하여 사물이나 인간과 접촉하면서 얻은 현실감을 비의(秘義)적으로 비틀고는 합니다. 후고 프리드리히는 이렇게 말해요.
‘현대시는 그것들을 익숙하지 않은 곳으로 데리고 가서 낯설게 만들며 변형시켜 버린다.’ 시 창작의 세 가지 방식, 즉 느낌, 관찰, 변형 중에서 마지막 것을 지배적 흐름으로 만들어요.
현대시는 안정감이 아니라 경각심을 향하여 방향타를 정합니다. ‘시어는 기존 의미에 따라 계획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미를 제작하는 실험적 성격을 가지게 된다.’ 시에 어떤 뜻을 담았느냐 하는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게 되고 무제적 현상을 중시합니다. 규범을 어기는 것 말이에요.
규범이란 괴테와 같은 텍스트를 이해할 수 있는 정신적 토대를 칭합니다. 현대시에서는 불온해야 한다. 불온성을 잃으면 죽은 시가 된다. 현대시의 정신에는 유럽중심주의가 너무 강하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당시 유럽에는 괴테를 비롯한 고전들이 문화적 철칙처럼 권위를 가지고 있어서 아무도 어길 수 없었어요. 그런 선행의 모범을 부정하기 위해서 후고 프리드리히는 이렇게 말합니다. ‘비규범’은 어떠한 가치판단도 아니며 ‘변종’을 의미하지도 않는다.(중략) 현대시는 의도 적인 찬탄도 의도적인 비난의 대상도 아니다.
<‘작가는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김형수작가 지음,아시아 출판> * 김형수작가 : 시인이며 소설가, 평론가. 시집 <<가끔 이렇게 허깨비를 본다>>, 장편소설<<나의 트로트 시대>>,평론집<<흩어진 중심>> 등 작가 수업 시리즈<<삶은 언제 예술이 되는가>><<삶은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로 큰 반향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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