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자료

시에 숨어 있는 기승전결

[중산] 2021. 8. 13. 19:53

                                                                        왜 사는가?

 

                                                                        왜 사는가 ∙∙∙∙∙∙

 

                                                                        외상값.

                                                                                                         - 황인숙. <<삶>> 전문

 

단 석줄로 삶을 간명하게 정리하는 이 시 자꾸 읽어볼수록 아프다. 첫 행의 물음표는 삶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 두 번째 행의 말줄임표는 이루어지지 않는 꿈의 좌절과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 그리고 마지막 행의 마침표는 삶의 어찌할 수 없음으로 인한 체념, 혹은 그래도 살아가야 할,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이유 따위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시에서 외상값의 의미도 읽는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로 확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부모에 대한 빚,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빚, 이웃에 대한 빚∙∙∙∙∙∙. 그런 외상값 때문에 사는 것, 그게 삶이라는 것을 이 시는 말하고 있다.

 

이렇듯 아무리 짧은 시라도 한 편의 시에는 이야기가 들어 있다. 시인은 머릿속에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해 놓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소재에 대한 시인의 장악력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사를 쓸 때처럼 시에 도식적인 육하원칙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인의 머리는 매우 세밀한 육하원칙을 바탕으로 시를 통제해야 한다. 시는 이야기를 구성하는게 목적이 아니라 감정을 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달빛 밟고 머나먼 길 오시리

두 손 합쳐 세 번 절하면 돌아오시리

어머닌 우시어

밤새 우시어

하아얀 박꽃 속에 이슬이 두어 방울

                                                                                    - 이용악의 <<달 있는 제사>>

 

언뜻 보면 이 시에는 세부적인 사건도 없고, 특정한 사회상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인물이나 배경도 존재하지 않는다. 장중한 서사적 뼈대를 갖추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짧은 시에도 이야기가 들어 있다.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어머니의 상실감을 아프게 바라보는 화자가 선명하게 이야기를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의 슬픔은 ‘이슬이 두어 방울’ 속에 집약되어 있다. 이 두어 방울은 이슬의 양이나 슬픔의 무게를 말하는 게 아니라, 현실의 슬픔이 감당할 수 없이 벅차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반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슬픔을 이겨내려는 안간힘의 표상이기도 하다. 아마도 이용악은 ‘달빛∙박꽃∙이슬’이라는 전통적인 자연서정에다 당대 민중의 보편적인 삶의 고통을 ‘두어’라는 관형사로 압축하고 싶었으리라.

 

 

커다란 황금물감 푹 찍어

가을들판에 가만가만 뿌려놓았다.

탱글탱글 누우런 벼이삭

살랑살랑 가을바람 불어오면

빠알간 고추잠자리

두둥실두둥실 흥겨운 춤사위

참새친구 멀리 이사 가도

외롭지 않은 허수아비

허허허 허수아비의 정겨운 웃음소리에

농부 아저씨 어깨춤 덩실덩실

 

이 동시는 온전히 수사의 기술로 쓴 동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쓰인 시어 중에 명사는 10개다. ‘황금물감∙ 가을들판’ 등,’이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공교롭게도 두 개 이상의 단어가 결합한 복합어의 형태다. 의성어와 의태어를 포함한 부사가 “푹’∙가만가만‘ 등 7개이고, 색깔이나 상태를 표현하는 형용사로 ’커다란∙정겨운‘ 등 말들이 쓰이고 있다.

 

이러한 부사와 형용사를 빼고 이 동시를 한 번 읽어보자

 

황금물감 찍어

가을들판에 뿌려놓았다.

벼이삭

가을바람 불어오면

고추잠자리

춤사위

참새친구 이사 가도

허수아비

허수아비의 웃음소리에

농부아저씨 어깨춤

 

이렇게만 해도 작가가 형용사를 통해 대상을 간섭하고 감정을 드러내는 기회가 대폭 줄어든다. 엘리엇은 일찍이 시가 ‘정서로부터의 해방이 아니고 정서로부터의 도피’라고 강조하면서 시에서 감정의 직접적인 표출을 경계했다. 형용사는 시인의 감정을 직접 노출시키는 구실을 한다. 쉽게 시인의 감정을 드러내는 데에는 형용사가 유리한 것이다.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시를 가슴으로 쓸 것인가, 손끝으로 쓸 것인가? 작품의 진정성(가슴)을 중요하게 여길 것인가, 표현기술(손끝)에 심혈을 기울일 것인가? 굳이 나누자면 나는 손끝의 문학을 먼저 배운 축에 속한다. 스무 살이 된 나이에 세상은 손끝으로 시를 만드는 일을 회의하게 만들었다.

 

대학 선배들은 이렇게 말한다. “가슴으로 쓴 시가 진짜 시다.” 또 이런 말도 했다. “시를 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시를 살아야 해.” 아아, 시를 쓰지도 못하는데 시를 살아야 한다니!~

 

<‘가슴으로 쓰고 손끝으로 써라, 안도현의 시작법’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한겨레출판> * 안도현 : 시인, 1984년 <동아일보>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서울로 가는 전봉준>, <그대에게 가고 싶다>,<외롭고 쓸쓸한> 등 시집다수. 소월시문학상, 노작문학상, 이수문학상, 윤동주상 등을 받았다. 현재 우석대 문예창작학과교수로 재직 중이다.

 

달맞이 꽃
치자 꽃, 향이 짙다!
맥문동 꽃
모과 열매가 제법 크다!
고추가 익어가고 있다!
벼이삭도 피기 시작한다!
가을하늘!
이른 아침 병산지에서~!
개울가 이끼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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