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자료

윤동주님 시 감상!

[중산] 2021. 11. 9. 18:30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헤는 것은

쉬이 아츰이 오는 까닭이오,

아직 나의 청춘이 다 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경(鏡),옥(玉) 이런 이국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푸랑시스 ∙짬, ”라이넬∙마리라∙릴케*“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이 멀 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나린 언덕우에

내 이름자를 써보고

흙으로 덮어 버렸습니다.

 

따는 밤을 새워 우는 버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우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우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게외다.

                                                 -<별 헤는 밤>중에서

☞ <별 헤는 밤>은 가을 속의 별 가슴 속의 별이 대응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화자는 ‘가을 속의 별’을 헤아린다. 그리고 이런 헤아림은 곧 ‘가슴 속의 별’을 헤아리는 일로 치환된다. 이 시에서 ‘별’은 추억, 사랑, 쓸쓸함, 동경, 시, 어머니 아름다움을 표상하는 바, 이런 상징적 의미는 <서시>에 나오던 ‘죽어 가는 것들을 사랑하는 마음’과 통한다. 그러나 이런 세계는 ‘별이 아슬히 멀 듯이’ 너무나 머언 곳에 있다.

 

화자는 ‘별’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삶의 부끄러움을 느낀다. “나는 무엇이 그리워/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내 이름 자를 써보고/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는 이런 부끄러움을 동기로 하는 화자의 상징적 죽음을 암시한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 겨울을 지나 봄이 되면 새로운 삶, 곧 ‘파란 잔디’로 새롭게 태어나리라고 믿는다. 이 시가 강조하는 것은 부활, 혹은 재생 의식이다. <이승훈시인∙ 문학평론가>

 

‘계절이 지나 가는 하늘‘이란 화자가 계절의 변화나 흐름을 하늘에서 읽음을 암시한다. 하늘이 가을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은 가을 하늘을 강조한 표현.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은 가을 밤 하늘 속의 별들을 다 헤일‘듯하다는 말이다.

’별‘은 추억∙사랑 ∙쓸쓸함∙동경∙시∙ 어머니∙ 아름다움을 표상함. ‘겨울’을 지나 ‘봄’이 오면, 그의 죽음-무덤 위에는 새로운 삶이 개화하고, 부끄러움이 아니라 자랑스러운 삶이 소생함을 노래하는 연이다.

*’릴케‘ : 신비성과 기교에 빠진 것에 반발하여 자연을 되찾고 인생을 그대로 보려 한 20세기 프랑스 시인.

 

서시(序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년 11월20일

 

☞ <서시>란 책의 첫머리에 서문 대신으로 쓴 시, 장시에서 서문 비슷하게 첫머리에 다른 장을 마련하여 쓴 시를 뜻함. 1941년 12월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할 때 출간하려 한 시집에 실린 19편의 작품 중 제일 나중에 씌어진 것으로, 흔히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다. 이 시의 중심 이미지는 ‘하늘’,‘바람‘,’별‘이다. 이 시의 부제로 ’시‘를 덧붙인 것은 이런 이미지가 그의 시적 태도와 상관관계에 있음을 은연중에 암시한다. 시의 문맥에 따르면 ’하늘‘은 우러러보는 세계를, ’바람‘은 괴로움을, ’별‘은 죽어 가는 것에 대한 사랑을 표상한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에서 시인 혹은 화자가 현재 체험하는 별∙바람의 갈등을 노래한다. 그것은 고통∙ 사랑의 갈등, 현실∙이상의 갈등으로 부연될 수 있다. 이 시가 노리는 것은 이런 심리적 갈등이며, 이런 갈등은 윤동주의 시적 특성으로도 드러난다. ‘우러러’. 이 말의 원형으로는 그동안 가) ‘우러러보다’, 나) ‘우러르다’가 지적된 바 있음. 전자는 타동사로서 높은 데를 처다보다, 양모하다의 뜻이며 후자는 고개를 점잖고 무게 있게 쳐들다.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다의 뜻. 여기서는 가)의 부사형으로 사용. ‘부끄럼’은 ‘부끄러움‘의 준말. ’잎새‘는 ’잎‘의 방언. ’스치운다‘ 원형은 ’스치다‘로 서로 살짝 닿으면서 지나가다의 뜻. ’스치운다‘는 ’별‘이 ’바람‘의 스침을 입는다는 뜻.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그는 선선히 사생풍 서정시에 만족하기에는 너무 강하게 인간의 고뇌를 안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풀잎의 사소한 움직임에도 마음이 아파지는 것이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참회록>전문

☞ <참회록>역시 거울 속의 자아 거울 밖의 자아의 갈등을 노래한다. <자화상>에서도 그랬듯이 불쌍한 자아, 욕된 자아다. 이런 자아를 극복하기 위해 그는 밤마다 거울을 닦는다. 그가 바라는 이상적 자아는 ‘운석 밑으로 걸어가는’그런 사람의 이미지로 노래한다. 운석은 지구로 떨어진 별이고, 별은 윤동주의 시에서 대체로 아름다움을 표상한다. 그렇다면 그가 바라는 자아는 별과 하나가 되는 그런 자아일 것이다.<이승훈시인∙ 문학평론가>

 

여기서 주조가 되고 있는 것은 뉘우침의 정이다. 이 작품 속에서 ‘나’는 그 모습이 도무지 흐리기만 하다. 그리고 그 빌미가 된 것은 스스로의 생에서 보람을 느끼지 못하는 마음의 상태다. 이것은 그대로 단독자로서 하나님 앞에 서기까지 일체의 인간적 시도를 부정해 버리는 키르케고르의 생각에 대비되는 입장이라 하겠다. 윤동주의 시를 이루고 있는 정신의 한 가닥 닻은 바로 여기에서 찾아지는 셈이다. 단독자로서 하나님 앞에 서기까지 일체의 인간적 시도를 부정해 버리는 키르케고르의 생각에 대비되는 입장이라 하겠다.

 

<참회록>은 신의 예지가 은총처럼 서려 있는 ‘절대 희망’의 시다.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하는 자탄이 멀잖은 날 “그 어느 즐거운 날에”는, “그 때 젊은 나이에/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로 바뀔 것을 예감하는 시인의 희망은 ‘모든 조건부에서 초월된’ 것이다. 마르셀에 의하면 희망은 ‘적극적 비수락(非受諾)’이다. 시련에 굴복하고자 하는 성향에의 비수락 속에 ‘인내’를 도입하면 희망은 보다 완전해진다. ‘절망’은 그날 그날의 시련을 끝없이 이어 가서 소멸의 날까지 살아가야 한다는 견딜 수 없는 확신을 미리 가져 버리는 데서 성립한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에 내포된 진실은 ‘인내’와 ‘비수락’의 의지가 걸어 나오기 이전 단계에 온 절망적 자기 인식이다. 온갖 수모와 학대를 감내해야 하는 식민지 백성의 한 사람으로서, 역사와 민족과의 연계 속에서 파악된 ‘나’의 좌표는 그렇게 욕된 것이다. 그러나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하는 탄식을 ‘부끄러움’으로 돌리는 예시가 있어, 시련에 대한 인내와 그 의지는 절대 희망의 교리와 더불어 지속되는 것이다. 희망은 그 본성상 유한하며 개체인 사물을 초월하여 무한하며 영원한 것에로 향하는 성격을 지닌다.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는 불퇴전의 응락성이 바로 희망의 본성인 것이다. 그러니까 전인적 무게로 받들어야 하는 신념의 ‘거울’을 회복한 시인은 이제 담보와 약속을 동시에 제공하는 산 영속성을 확인하기에 이른다.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슬픈 사람의 뒷모양이/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자화상

 

산모퉁이를 돌아 논 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 1939년 9월

 

☞ <자화상>에서 고통∙사랑의 갈등, 현실∙이상의 갈등은 우물 속∙밖의 대립을 중심으로 노래된다. 흔히 우물은 시의 경우 거울 모티브에 속한다. 거울은 대체로 자아 성찰이라는 의미를 띠지만, 이상의 경우에는 도달할 수 없는 자아, 곧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없는 자아지만, 윤동주의 경우에는 구체적으로 실현 될 수 있는 자아, 혹은 추억 속의 자아로 드러난다.

 

우물 밖의 자아 말하자면 현실적 자아와 대립된다는 점에서 이른바 이상적 자아라고 할 수 있다. 화자는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간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진다. 다시 돌아가 우물 속의 자아를 들여다본다. 다시 미워져 돌아간다.

 

그러나 다시 그 사나이가 그리워진다. ‘그 사나이’는 시의 마지막 연에서 노래되듯이 ‘추억처럼’존재하는 사나이다. 이 시가 강조하는 것은 우물 속의 자아, 곧 이상적 자아에 대해 보여 주는 우물 밖의 자아, 곧 현실적 양가적 심리 상태다. 그것은 증오/연민으로 드러난다. 시는 ‘솔기 없는 직물과 같은 대자연의 질서’속으로 되돌아가려는 인간의 저 근원적 통일성에 대한 향수의 발현인 것이다. 윤동주의 시적 자아가 지향하는 것도 원초적 통일감의 성취일 것인 바, 그것은 소위 꿈의 형태로 나타난다. 

 

꿈인 시는 동시에 꿈꾸는 자의 자기 확인이기도 하며 따라서 여기에 불가피한 반성작용을 동반한다. 시에 자주 등장하는 자기 객관화의 매개 사물은 ‘거울’이다. 거울은 비생명적이고 물리적인 사물 도구임에 반해 ‘우물’은 정감적이고 생명적이며 옥외의 풍광을 이루는 자연의 일부로서 주어진다.

 

그 우물은 ‘산모퉁이를 돌아 논 가 외딴 곳’에 있다. 세상사의 소요를 떠난 자리에서 자기 관조가 비롯되기 때문이다. 우물은 그 자체만으로도 풍경의 고즈넉한 뜨락이 된다. 달과 구름과 하늘과 바람, 그리고 계절의 우수가 서려 있다. 그러므로 자기 모습을 발견하기 이전에 시인은 한동안 우물에 비치는 달과 가을의 조응(照應)에 시선을 몰입시킨다.

 

이 시선의 황홀한 실종에서 되돌아와 한 사나이의 모습을 거기 보는 순간, 흔들리는 빗살무늬 때문에 수면의 정적이 깨어지며 문득 한 가닥 미움이 고개를 든다. 자의식의 테두리 안에 수면의 정적이 깨어지며 문득 한 가닥 마음이 고개를 든다. 자의식의 테두리 안에 가장 깊이 자리하는 자아 거부, 숙명적이며 절망적인, 절대적 자기 권태가 치밀어 오른다.

 

민망하게, 평온을 잃어 우물가를 떠나는 시인의 가슴에 뭉클한 가여움의 정이 살아난다. 이건 절대적 자기 권태와 등가물이 되는 절대적 자기집착이라고 할 수 있다. 우물이라는 의식의 영사막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묘한 역겨움을 자아내면서 한편으로 기묘하고 아픈 연민을 유발한다.

 

심정의 균형 감각은 대립 감정의 동시적 출현으로 취해지는 자기 통어(通御)의 결과인 것이다. 낯설고 이질적인 풍광의 조화와는 동떨어진 자아의 발견은 부조리의 저 ‘빛깔 없는 황무지’에로 들어가는 몰입의 그것이다. 윤동주는 자기혐오를 자기 분열로 이끌지 않는다. 그리움은 여기서 자기 통일에의 원망이라 볼 수 있다. 때문에 필연 마지막 연에 가서 우물 속 풍광의 일부로 편입된 조화적 자기 관조를 보여 준다.

 

‘추억처럼’ 거기 머물러 있는 사나이는 이미 의식의 냉엄한 거리 유지를 벗어나 있다. 자기 객관화가 서정적 주체의 통합 작용에 의해 시적 질서의 조화 속에 용해되어 나타난다. 추억처럼 머물러 있는 ‘사나이’라는 표현은 또 다른 자기 발견을 예비하는 시적 자아의 과거주의의 결별을 암시한다.

 

보다 고양된 자기 인식에로의 발돋움을 포획하는 시 <자화상>은 1차적 반성을 드높은 서정성으로 형상화시킨 수작이다.

운명의 별의 부름을 받아 도덕적 소명감에 충만한 의식이 있어 미래는 이미 선취된 거나 다름없다. 단독자로서 신의 면전에서 오직 홀로 결단해야 하는 실존적 책임 인수란 비장하다. ‘십자가의 길’은 상처와 영광이 동시에 재현되는 엄정한 진실의 길이므로서다. 이로써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의 그 이유는 의미들로 충일하게 된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십자가>일부

 

☞ <십자가>의 초월 의지는 <참회록>에 와서 ‘운석’처럼 단단한 결정으로 응결된다. 그것은 ‘자기의 메시아적 본질’을 선취한 의식인의 승리이자 개가다. 그리고 바로, ‘절대 희망’의 복음인 것이다. <김남조>

 

윤동주 문학에서, ‘새벽’,‘아침’과 ,‘봄’과 ‘광명’ 등으로 나타나는 희망의 수사학은 명백히 기독교적인 구원 원리에 입각한 것이다. 그에게는 선험적이다 싶이 ‘구원되려는’ 혹은 ‘구원된’ 자아 인식이 있었다고 여겨지는 바, 가톨릭적 실존주의 철학자로 지칭되는 마르셀의 반성 개념에 기대면서 그의 총명과 감성을 볼 수 있다.

 

마르셀은 ‘나’가 아닌, ‘우리는 존재 한다’라는 명제로 출발했고 ‘우리’의 만남은 다시 ‘초월자’에 의해 주어진다는 사유의 집을 지은 사람이다. 그에 의하면 존재는 한없는 신비이며 인간은 인격적∙종교적 존재로 파악되었다. 그는 인간의 사고방식을 둘로 나누었는데, 하나는 1차적 반성이며 또 하나는 2차적 반성이라는 것이다.

 

1차적 반성이란, 존재를 소유의 차원에서 보며 객체로 분석하여 개념적 지식에 환원한다. 따라서 과학이나 기술의 지식은 모두 이 범주에 속한다. 2차적 반성이란 존재 자체에 참여하여 존재를 공감한다. 회상은 하나의 전체존재를 인식케 하면서 곧 신비와 이어진다. 그러나 인간의 시도 합리적 방식으로만 발힐 수 없듯이, 인간 정신의 정화인 시도 합리적 방식으로는 너무나도 요원한 거리감을 절감케 될 일을 분명히 전제삼고자 한다 <김남조>

 

1917년 12월 만주국 간도성에서 태어났다. 1943년 도시샤 대학 재학생의 몸으로 독립운동을 꾀했다는 죄명에 의해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그리고 후에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 중 8.15를 여섯 달 남겨 놓은 1945년 2월 16일 28세 나이로 옥사했던 것이다. 윤동주는 어려서부터 강한 민족의식의 세례를 받으며 자라왔다. <‘윤동주 전집‘ P511 중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권영민박사 엮음,문학사상출판>

 

감나무
먼 산도 물들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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