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자료

기억들 , 가을~!

[중산] 2021. 11. 2. 17:36

기억들

 

널 따른 바위가 강풍으로부터 나를 막아주는 조용한 구석에서 나는 준비한 빵을 먹었다. 햄과 치즈를 넣은 흑빵이었다. - 거센 바람이 부는 날씨에 몇 시간 동안 산을 오른 후에, 속을 채워 넣은 빵을 한 입 베어 무는 것, 그것은 하나의 즐거움이며, 어린 시절의 진정한 기쁨 가운데 아직도 사무치도록 맛있고 흡족할 정도로 행복하게 해주는 거의 유일한 즐거움이다.

 

내일이면 아마도 나는 율리에로부터 첫 키스를 받았던 장소, 너도밤나무 숲에 있는 그 장소를 지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모레쯤엔 아마도 그녀 자신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그녀는 헤르쉘이라는 부유한 상인과 결혼했는데, 아이가 셋이라고 했다. 그중 한 아이는 눈에 띄게 그녀와 닮았고 이름도 똑 같은 율리에라고 한다. 그 이상은 나도 모르고, 그것으로 충분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내가 고향을 떠난 지 일 년 후에 외지에서 그녀에게 어떤 내용의 편지를 썼는지는 아직도 잘 알고 있다. 나는 그녀에게, 내가 일자리를 얻거나 돈을 벌 전망이 없으며 그녀가 나를 기다리지 않아도 좋다고 썼던 것이다.

 

그녀는 , 내가 나와 그녀의 마음을 불필요하게 힘들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답장을 보냈다. 이르든 늦든 내가 돌아올 때 자신은 그 자리에 있겠다고도 했다.하지만 반 년이 지나 다시 내게 편지를 써서는, 저 헤르쉘이란 자와 결혼하게 됐으니 자기를 놓아달라고 했다.

 

편지를 받자마자 느낀 고통과 분노 속에서, 나는 편지를 쓰는 대신 내 수중에 있던 마지막 돈으로 네다섯 마디 사무적인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 전보 내용은 바다를 건너갔고, 취소하는 건 불가능했다.

 

인생이란 참 우습게 흘러가는 법이다! 우연이든 아니면 운명의 조롱이든, 그것도 아니면 절망이 주는 용기 때문이든, 사랑의 행복이 산산이 깨지고 나자마자, 성공과 이익과 돈이 마법을 부린 듯 굴러들어왔고 게임에서 전혀 바라지도 않았던 것을 얻게 되었는데, 하지만 그것은 가치가 없었다.

 

나는 운명이 변덕스럽다고 생각했고, 이틀 밤낮에 걸쳐 동료들과 안주머니 가득 든 지폐를 술 마시는 데 다 써버렸다.

하지만 나는 식사 후에 햄을 쌌던 빈 종이를 바람에 날리고 외투에 몸을 감싼 채 한낮의 휴식을 취하게 되었을 때, 이 지나간 이야기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당시 내가 했던 사랑과 율리에의 용모와 얼굴을 생각했다. 고상한 눈썹과 커다란 검은 눈을 가진 그녀의 갸름한 얼굴을 말이다. 그리고 너도밤나무 숲에 있던 그날을 생각했다. 그녀가 천천히 그리고 뻗대면서 내 의도에 몸을 맡긴 것, 내 키스에 몸을 떨었던 것 그리고 마침내 내 키스에 응했던 것, 그리고 마치 꿈속에서처럼 아주 희미하게 웃음 짓던 것, 그와 동시에 그녀의 속눈썹에 눈물이 반짝이던 것을.

 

지나간 것들! 하지만 그것들 가운데 가장 좋았던 것은 키스도 아니고, 저녁 무렵 함께했던 산보나 밀회도 아니었다. 가장 좋았던 것은 그 사랑에서 흘러나온 힘, 그녀를 위해 싸우며 물불 가리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기분 좋은 힘이었다. 한순간을 위해 자신을 던질 수 있는 것, 한 여인의 웃음을 위해 몇 년을 희생할 수 있는 것, 그것은 행복이다. 그리고 그것을 나는 아직 간직하고 있다.

 

 

하루하루가 얼마나∙∙∙∙∙∙∙∙

하루하루가 얼마나 힘겨운지!

따뜻한 불을 쬐도 내 몸은 따뜻해지지 않고,

태양은 더 이상 내게 미소 짓지 않으며,

모든 것이 공허하고,

모든 것이 차갑고 자비라곤 없으며,

사랑스럽고 밝은 별들도

삭막하게 나를 쳐다보네,

사랑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내 마음이 알게 된 후로.

 

<‘사랑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P432 중에서 극히 일부 발췌, 헤르만 헤세 글, 정현규님 옮김, 문학판 출판>

* 헤르만 헤세: 20세기 위대한 작가 중의 한 사람이며 전 세게적으로 가장 많이 읽히는 소설가이기도 한 그는 1877년 독일 독일 칼브에서 태어났다. 14세 때 명문 신학교에 입학했으나 '시인이 되지 못하면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라는 생각으로 신학교를 도망친다. 시계부품공장 견습공을 전전하다 서점 점원으로 일하며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청춘은 아름다워>,<데미안>,<싯다르타>, <유리알 유희>등의 주옥같은 소설로 사랑을 받았다. 12946년 <유리알 유희>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들을 지나서

 

하늘 위로 구름이 흐르고

들을 지나서 바람은 가고

들을 지나서 헤매고 있는

나는 우리 어머니의 영락한 아들.

거리 위로 꽃잎은 나부끼고

나뭇가지에는 새들이 우는데

아. 나의 옛집은 어디쯤일까?

산 너머 저쪽인가∙∙∙∙∙∙.    

                                                      - 헤르만 헤세

 

젊은 시절, 나는 헤세보다 릴케를 좋았는데 나이 들면서부터 점점 헤세가 좋아진다. 어쩌면 인간적인 삶, 인간적인 고뇌, 그리고 솔직성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의 수채화는 우리에게 많은 상상력을 제공한다.

 

헤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은 어머니, 어머니에 대한 경도(傾倒)와 사랑이 더욱 헤세의 시작품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게 아닌가 싶다. 인간은 누구나 언제나 어머니 앞에서는 철부지 어린아이. 그 나름대로 진솔해지기 마련이다.

 

 

어머니께

 

이야기할 것이 참 많았습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나는 객지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나를 이해해준 분은

어느 때나 당신이었습니다.

 

오래전부터 당신에게 드리려던

나의 최초의 선물을

수줍은 아이처럼 손에 쥔 지금

당신은 눈을 감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읽고 있으면

이상히도 슬픔이 씻기는 듯합니다.

말할 수 없이 너그러운 당신이. 천 가닥의 실로

나를 둘러싸고 있기 때문입니다.

                                                        - 헤르만 헤세

 

이 세상 모든 젊은 영혼보다 먼저 아프고, 먼저 헤매고 먼저 길을 찾은 그. 그가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드리는 고백은 그냥 그대로 시적인 고백이 아니라 공적인 고백으로 바뀐다. 그리하여 우리에게도 위로와 안식을 준다.

 

 

방랑길에

           - 크놀프를 그리며

 

서러워 마라, 머지않아 밤이 온다.

그러면 우리 창백한 들판 저편으로

남몰래 웃음 짓는 싸늘한 달을 보게 되리라.

그러면 그때, 손을 잡고 쉬어도 좋으리라.

 

서러워마라, 머지않아 때가 온다.

그때 우리 안식하며 우리의 십자가

밝은 거리 모퉁이에 나란히 서게 되리라.

그 위로 비가 오고 눈이 내리고

바람은 또 오고 가리라.

                                                      - 헤르만 헤세

 

크놀프는 헤세의 소설<크놀프>의 주인공 이름이다. 평생을 고향을 떠나 방랑으로 살아간 구도자적인 인물이다. 헤세, 바로 자신의 분신과 같은 인물이다. 그런 점에서 소설은 작가의 자전(自傳)이기 십상이다. 

 

고백체이고 일방적으로 하는 말. 하나의 위로다. 사람 마음을 다독인다. ‘서러워 마라, 머지않아 밤이 온다.’ 왜 이런 대목에서 우리는 목이 메어오는 걸까. 헤세의 말처럼‘그들은 참 인간적인 데가 있다’. 우리 정서에 참 잘 맞는다.

 

 

가을날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놓으시고

들판에 바람을 풀어 놓으십시오.

 

마지막 과일을 익게 하시고

하루 이틀만 더 남국의 햇빛을 허락하시어

그들을 완성해주시고,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주 속에 스며들게 하소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은 오래 고독하게 살아갈 것이며

잠자지 않고, 일고, 그리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바람에 나뭇잎이 날릴 때, 불안스러이

이리저리 가로수 길을 헤맬 것입니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릴케의 시, 첫 문장에 그만 압도되고 마는 시. 아, 이 문장의 감격,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드디어 여름이 물러가고 가을이 왔음을 해마다 알려주는 누군가의 음성이 거기에 들어 있다.

 

우리가 살면서 이런 문장을 만난다는 건 그것 자체가 행운이요. 감사다. 잊지 말아라. 이런 시를 처음 만났을 때의 그 감격을 잊지 말아라. 내가 나에게 타이르곤 한다. 내 시의 모든 모범이 이 시 안에 들어 있음을 나는 부정하기 어렵다.

 

 

가을

 

잎이 진다. 하늘나라 먼 정원이 시들 듯

저기 아득한 곳으로 떨어진다.

거부하는 몸짓으로 잎이 진다.

 

그리고 밤에는 무거운 지구가

모든 별들로부터 고독 속으로 떨어진다.

 

우리 모두가 떨어진다. 여기 이 손도 떨어진다.

다른 것들을 보라 떨어짐은 어디에나 있다.

 

하지만 이 한 없는 추락을 부드럽게

두 손으로 받아주시는 어느 한 분이 있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아, 나는 소년 시절 릴케의 시를 얼마나 좋아했던가. 그가 쓰는 시 작품 하나만이라도 쓰고 싶었다. 그의 모든 이야기나 생애는 나의 신화가 되었고 베일 속 비밀이 되었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릴케. 언뜻 들으면 여성 같은 이름. 이름 자체가 시처럼 느껴지곤 했다. 가을의 시. 한 편의 기도이다. 마음이 멀리 간다. 맑아진다. 고개가 떨구어진다. 우리도 하나씩 낙엽이다.

 

<‘시가 사랑을 데리고 온다’에서 극히 일부 발췌, 풀꽃 시인 나태주 엮음, 넥서스출판>

* 풀꽃 시인 나태주 : 1945년 충남 서천군에서 태어나 충남대학교 교육대학 졸업 후 43년 동안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1971년<서울신문> 신춘문예에서 시 <대숲 아래서>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하였다. 시집, 산문집, 동화집, 시화집 등 100여권이 있으며, 현재 한국시인협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부산 기장 정관 중앙공원에서~!
무등산 토끼등 쉼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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