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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탈선자의 일기!

[중산] 2021. 10. 25. 08:29

어느 탈선자의 일기

 

어린 학생 시절에 처음으로 사랑에 빠졌던 이후부터 쭉, 나는 쉽게 단념하는 연인, 서툴고 용기 없고 수줍으며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 연인이었다. 내가 사랑했던 모든 여자는 내겐 너무나도 훌륭하고 내가 도달하기엔 너무 높은 곳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오랜 결혼생활을 하면서는 내내 깊은 불만을 가진 채 다른 여성들을 사랑했고 그리워했지만, 피해 다녔다. 그런데 이미 늙어가고 있는 지금, 갑자기 내가 가는 길 여기저기에서 부르지도 않았는데 여성들이 나타나고, 내 오래된 소심함은 사라져버렸다. 내가 사는 곳의 방구석마다 스타킹 밴드와 머리핀이 발견된다.

 

오랫동안 열망해온 이 낙원에서 다음과 같은 깨달음, 즉 이 낙원이 선술집, 거기서 나서는 순간 무감각해지고 기억조차 나지 않는 그런 선술집에 지나지 않는다는 깨달음을 가진 채 내가 곧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한동안 나의 꿈들을 뜨겁게 달구었던 모든 것이 그런 운명을 겪었다. 소망이 약간 시들고 지치기 시작한 어느 날, 그 소망이 갑자기 실현되었고, 도달할 길 없이 바라보고만 있던 열매가 내 품안에 떨어졌는데, 그것 역시 다른 모든 사과와 다름없는 단순한 사과였다.

 

우리는 그것을 원하고, 그것을 얻고, 그것을 먹는다. 그러면 매력과 마력은 사라지고 만다. 내 운명을 그렇게 정해져 있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나는 한때 자유를 갈망했는데, 그것을 마셔버렸고, 그런 식으로 나는 고독을 갈망했는데, 그러고 나서 그것을 남김없이 마셔버렸다.

 

명예와 육체적인 안락함도 마찬가지였다. 그 모든 것은 오로지 질리기 위함, 또 하나의 새롭고 다른, 변화된 갈증을 가지고 깨어나기 위함이었다. 젊은 시절에 나는 결혼과 가족을 얼마나 동경했으며,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정도로 달려들었던가- 나는 아내와 아이를 얻었다.

 

내가 깊은 애정을 가지고 끔찍이 사랑한 귀여운 아이들을-그런데 그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나버렸다! 젊은이의 탐욕스러운 상상 속에서 나는 명예를 얼마나 꿈꾸었던가! 그리고 명예가 주어졌다. 그것은 갑자기 주어졌다. 그런데 쉽사리 질리게 만들었고, 너무나도 멍청하고 성가신 것이 되었다!

 

한때 나는 근심 없는 소박한 삶을 얼마나 원했던가. 직업적 강요도 없고 배고픔도 없이, 시골에 나만의 작은 집이 있는 그런 삶을 말이다. -그런데 그것 역시 이루어졌다. 나는 돈이 생겼고, 예쁜 내 집을 지었고,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었다. -그리고 어느 날 모든 것이 다시 무가치해졌고 먼지처럼 흩어져버렸다!

 

아, 젊은 시절에 난 로마와 시칠리아, 스페인, 일본과 같은 곳으로 멀리 여행을 떠나기를 얼마나 애타게 바랐던가 - 그것 역시 이루어졌고, 내 것이 되었다. 나는 여행을 떠나게 되었고, 차를 타거나 배를 타고 많은 먼 나라로 떠났으며, 지구를 한 바퀴 돈 후 돌아왔다.

 

이 열매도 이제 먹어버리고 나자, 그것 역시 더 이상 아무 마력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와 똑같은 일을 나는 여인들에게서도 경험했다. 멀리 있었고, 오래 열망했으며, 가까이할 수 없던 그런 여성들도 이제 다가왔다. 무엇에 끌렸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떨고 있는 따뜻한 가슴을 어루만지며, 기이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한 입 베어 문 과실을 망설이면서 이미 손에 들고 있다. 한때 그처럼 멀리서 낙원인 듯 유혹하던 그 과실을 말이다!

 

그 과실은 맛있으며, 달콤하고도 꽉 차 있다. 나는 그것을 헐뜯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 과실은 물리게, 그것도 쉽사리 물리게 만들고, 나는 이미 그렇게 느끼고 있다. 그리고 곧 그것을 내팽개쳐진다. ~

 

 

낙원의 꿈

푸른 꽃들의 향기가 도처에 풍기고,

창백한 시선으로 연꽃이 나를 사로잡네.

 

꽃잎마다 주문이 하나씩 말없이 숨어있고,

가지마다 뱀이 조용히 주시하네.

 

꽃받침에서는 탄탄한 몽우리가 자라며,

꽃 피는 늪지의 초록 속에서는

하얀 여인들이 몸을 숨긴 채 호랑이 같은 눈을 깜박이는데,

그녀들의 머리에선 빨간 꽃이 작렬하네.

 

생식(生殖)과 유혹의 작렬한 냄새가,

시도해보지 않은 죄악의 음침한 쾌락의 냄새가 풍기고,

잠에 취한 대지로부터 이 열매 저 열매가

어루만지라고 거부할 수 없이 유혹하고,

훈훈한 대기의 모든 입김은 성과 희열을 숨쉬며

쾌락의 요구 앞에서 부풀어 오르고,

마치 여인들의 가슴과 배 위로 사랑 가득한 손가락이

유희하듯이 교활한 시선의 뱀들이 유희하네.

 

구애하며 내 마음을 끄는 것은 이것 혹은 저것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는 그들 모두가 피어나 유혹하고,

나는 그 모두가 기쁨을 주며 내게 다가오는 것을 느끼네,

유체들의 숲이, 영혼들의 세계가.

 

그리고 천천히 동경의 복된 슬픔이 부풀어 올라서는

나를 풀어 수백 가지 방향으로 펼치고,

나는 녹아 여인에게로, 연꽃에게로, 하늘 저 먼 곳으로 가네,

내가 하나라고 생각했던 나의 영혼이

수천 개의 날개 위에서 펼쳐지며,

수천으로 분해되어, 다채로운 우주의 모습을 띠고,

나는 사라져 세계의 하나가 되네.

 

<‘사랑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P432 중에서 극히 일부 발췌, 헤르만 헤세 글, 정현규님 옮김, 문학판 출판>

* 헤르만 헤세: 20세기 위대한 작가 중의 한 사람이며 전 세게적으로 가장 많이 읽히는 소설가이기도 한 그는 1877년 독일 독일 칼브에서 태어났다. 14세 때 명문 신학교에 입학했으나 '시인이 되지 못하면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라는 생각으로 신학교를 도망친다. 시계부품공장 견습공을 전전하다 서점 점원으로 일하며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청춘은 아름다워>,<데미안>,<싯다르타>, <유리알 유희>등의 주옥같은 소설로 사랑을 받았다. 12946년 <유리알 유희>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그의 작품에는 자연을 향한 동경과 속박으로부터의 자유,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선과 악 그 너머를 찾아가는 구도자적 자세, 조화로운 삶을 모색하는 인간적인 질감의 사유가 스며있다. 시인과 화가로도 잘 알려졌다. 헤세의 인간을 향한 따스한 사랑법이 녹아 있는 산문집<사랑하는 사람은 행복하다>에는 그가 한 생애동안 방랑하고 성찰하고 사랑했던, 사랑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우주가, 사람 냄새 짙은 향수로 묻어난다. 

 

감이 익어가고 있다!
쑥부쟁이
구절초
가을하늘과 갈대
도시 속 단풍나무에도 잎이 물들었다!
기장 정관 중앙공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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