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수한 형상들의 바다 깊은 곳으로 뛰어듭니다.
형상 없는 완벽한 진주를 얻기 위해.
비바람에 지친 나의 이 배로는 더 이상 항구에서
항구로 항해하지 않겠습니다.
파도에 춤추며 즐거워하던 날들은
이미 오래전에 지나갔습니다.
이제 나는 기꺼이 죽음을 갈망합니다.
더 이상 죽음 없는 존재가 되기 위해
현이 울리지 않는데 음악이 울려 퍼지는 곳,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 속 음악당으로
내 생명의 현악기를 가지고 가겠습니다.
이제 영원히 곡조에 맞춰 내 악기를 조율하겠습니다.
그리하여 그것이 흐느끼며 최후의 곡을 연주하고 나면,
내 침묵하는 악기를 침묵하는 이의 발아래 내려놓겠습니다.
<‘기탄잘리100’에서 일부 발췌,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지음, 류시화님 옮김, 무소의뿔 출판>
* 인도 시인이었던 타고르에게 동양 최초의 노벨 문학상을 안겨준 시집, 기탄잘리는 103편으로 된 산문시로 신, 고독, 사랑, 삶, 여행을 노래한다. ‘기탄잘리’는 ‘님에게 바치는 노래’라는 듯으로, 타고르에게 ‘님’은 사랑과 기쁨의 대상인 신이고 연인이며 만물에 내재한 큰 자아이다. 타고르는 오늘날까지도 간디와 더불어 인도의 국부로 존경받고 있으며 예이츠, 에즈라 파운드, 로맹롤랑 등 서양문인들뿐 아니라 아인슈타인과도 교류하였고,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에게 동양철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진화는 공작이다.
고슴도치 가시는 고슴도치 조상들의 몸을 감쌌던 털이 변한 것이다. 자연은 무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대신 기존의 것을 활용하고 임의로 변화시킨다. 그리하여 털이 무기가 되고, 씹는 일을 하는 기관은 감각기관이 된다.
프랑스의 유전학자 프랑수아 자코브는 ‘진화는 공작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단번에 변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영국의 진화생물학자 스미스는 코끼리 코가 그렇게 길어졌는지를 설득력 있게 설명했다. 코끼리 조상들의 경우 오늘날의 코끼리와는 달리 엄니가 아래턱에 나서 자랐으며, 땅에서 영양이 풍부한 뿌리를 캘 수 있도록 삽과 비슷한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우연한 돌연변이로 코가 약간 길어지게 되자 이제 코를 사용하여 좀 더 능숙하게 먹이를 입안으로 밀어 넣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후 후손들의 코는 계속된 돌연변이로 더 길어졌으며 먹는데 더욱 유리해졌다.
오늘날 코끼리의 코는 정말로 만능 도구다. 하지만 코에서 이런 만능 도구로 이르는 과정은 몇 백만 년이 걸렸고 수많은 우연한 돌연변이가 필요했다. 쓸 만한 기관을 갖게 되는 행운은 세대를 넘어 작은 파편들이 쌓이고 쌓여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기형과 진화는 백지 한 장 차이
진화의 모든 성공은 우연히 맞아 떨어져서 이루어졌으며 많은 희생자를 내고 얻어진 것이다. 모든 동물이 닮아 있는 이유를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전갈이건 뱀장어건 공작이건, 동물은 모두 대칭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한쪽 끝에 입이 달린 머리가 있고 다른 쪽 끝에 꼬리가 있다. 그리고 심장이 하나씩 있고 눈과 장이 있다. 더 넓은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눈이 네 개 달린 말도 없다. 그런데 초파리들은 분해했다가 조립을 잘못한 듯 이상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유전자코드에서의 우연한 실수가 그 곤충들을 그렇게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만든 것이었다. 1980년대에 분자생물학자들은 초파리의 난세포에서 몸의 기본 구도를 결정하는 것으로 보이는 유전자 그룹을 발견했다.
연구자들은 초파리의의 혹스 유전자 시퀀스를 바꿈으로써 머리에 다리가 돋아나고 눈이 생겨야 할 자리에 날개가 돋아나는 괴상한 파리를 얻을 수 있음을 확인했다. 혹스hox-설계도의 모든 작은 변화가 새로운 종류의 곤충을 만들어 낸 것이다.
고등생물일수록 혹스 유전자가 더 많았다. 초파리의 경우 혹스 유전자가 8개인 데 반해 인간을 포함한 척추동물은 38개였다. 특정한 유전자가 약간 이르거나 늦게 작동을 시작하거나 중단하면 몸의 형태는 무참하게 일그러진다.
뱀을 대상으로 이런 실험을 하자 뱀에게 몽당 다리가 돋아났다. 유전자에게서 일어난 우연한 변화가 새로운 형태의 비율을 유발하는 것은 틀림없다.
<‘우리가 운명이라고 불렀던 것들‘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슈테판 클라인 지음, 유영미님 옮김, 포레스트북스출판>
* 슈테판 클라인 : 뮌헨대학교에서 철학과 물리학을 공부하고 프라이푸르크대학교에서 생물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베를린 예술대학교의 객원교수로 일하고 있다. <안녕하세요, 시간입니다>,<우리는 모두 불멸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모두 별이 남긴 먼지입니다>,<이타주의가 지배한다>등의 저서가 있다.
“들판들과 강을 보기 위해서는”
들판들과 강을 보기 위해서는
창문을 여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나무들과 꽃들을 보기 위해서는
장님이 아닌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아무런 철학을 가지지 않는 것 또한 필요하다.
철학을 가지면 나무라는 것도 없다. 그저 관념일 뿐.
오로지 우리 각자만 존재한다, 마치 동굴처럼.
닫힌 창문 하나뿐, 온 세상은 저 바깥에 있다,
그리고 창문이 열린다면 볼 수 있는 것에 관한 꿈,
그건 막상 창을 열 때 보이는 것이 절대 아니다.
- 페르난두 페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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